제주 수상록

by 글섬

현실로 완전히 유턴하기 전, 비행기를 타고 가을을 연장한다.

수상자가 잘못 선정된 상을 받는 기분으로 제주 바다를 마주한다.

수개월 전, 제주가 계획되던 그때엔 그래도 어느 만큼은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것 같은데.

제주 바다는 내게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물러서는 이유를, 완전히 소진해 재가 되지 못하고 그을리기만 한 지점에서 자꾸만 멈춰서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 어떤 이유의 자격도 없기에.


그리고 그녀.

인연이 시작된 이래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을 거두지 않고 쏟아 붓기만 지속하는 그녀는 부질없는 나의 이야기엔 귀가 되어주고, 가난한 내 얼굴엔 웃음이 되어주고, 초조한 내 주머니엔 지갑이 되어 주며 제주를 통째 안긴다. 살면서 응당하게든 부당하게든 상을 받는다고 여겨지는 모든 순간은 그녀로부터였다. 그녀는 내게 제주다. 휴식과 위로, 여정과 체류, 충만과 여백, 박수와 질타, 그 모든 생의 나침판이다.


바다를 향해 불쑥 솟구친 상업 건물 뒤편에 숨어 있던 첫 숙소. 건물 벽 사이 좁은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간 지 얼마되지 않은 지점에, 도저히 거기 있을 것 같지 않은 지점에 짜잔, 하고 나타나 신비롭다.


소박하고 따뜻한 이곳에서

늘 그랬듯이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가장 중요한 얘기들을 오랜 시간 아무렇게나 주고받는다. 아무렇지 않은 사소한 이 대화가 주는 안정감은 살아있는 모든 시간의 중추가 된다. 늘 그랬듯 무슨 대화였는지는 이미 벌써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공간의 충만감은 이외 시간들의 세포가 되고 뼈가 되어 나를 버티게 해준다. 차오름은 언어가 아니라 공기이다. 사람과 나누는 시공간 그 자체이다.


그리고 바다,

바다,

바다,

바다.

바다만을 엮어 새로 갈피를 만든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마치 이 바다를 만나기 위해 살아낸 사람처럼

끈질기게 제주를 휘돌며 바다를 열고 닫는다.

돌아가 다시 일상의 폭우를 맞으며 버티다 어느 날엔가 이 갈피를 열면, 그래, 그렇지, 할 수 있도록.


차분하게 닫혀 있던 커튼을 열자 감성이 와르르 쏟아진다. 흔하디 흔한 나무와 돌이건만 적재적소의 최소가 제 역할을 다할 때 다다르는 최적의 조화로움은 아름다움을 극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런 최소이고 싶었다.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제 크기의 홈에 딱 들어맞아 아름다운.


곳곳이 두 개씩 놓인 의자와 달리 주인 여자는 혼자서 동분서주했다.


이처럼 여자는 써 두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다'는 여자의 바람은 제주에서도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판결하기까지 지난했을 그 애씀의 충분함에 숙연해진다.


그래서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어지는 그곳,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득한 그곳에서 그 충만함과 배를 맞댄 쓸쓸함을 마주한다. 참 이상하지. 가득 찬데 쓸쓸하다니.

그러하니 믿을 수 없다. 그 충만함이 충만함인지, 그 쓸쓸함이 쓸쓸함인지를. 그러하니 내 마음은 과연 옳을까.


제주에서 겨우 이틀을 보내고 마트에서 당근을 사고 있는 나를 본다. 이제 이렇다. 이렇듯 충분히 나의 담이 높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했던 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 부서지기 전에 멈춰서 끊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건, 그러하니 어쩌면 나의 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먹다 남은 당근을 캐리어 구석에 찔러 넣으며 생각한다.


얼마를 어떻게 살아야 다시 길 위에 서지 않을 수 있는 건지 망연히 물어왔다. 얼마를 어떻게 살아서가 아니라 그게 나여서였다는 걸 제주에서 조용히 끄덕인다.


돌아온 현실에서 시간 저편의 인연에게서 보고 싶다는 문자가 도착한다. 어디서 얼마를 어떻게 보냈든 나라면 언제든 길 위에 다시 오를 것이다. 중요한 건 나의 애씀의 지난함이나 결과가 아니라 애를 쓰는 과정에서도 누군가에게 그리움으로 남겨진 나라는 존재감이다.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았던 나와 나의 결정을 존중하며 두 다리를 단단히 버티고서 다시 길 위에 오른다. 어쩌면 나는 이미 내가 바랐던 최소였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