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석의 정석
사랑과 오해와 파국의 드라마 고전 백조의 호수가 천재적 예술가를 만나면 어디까지 확장 가능한지를 증명해낸 작품, 재해석의 정석, 바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만나고 왔다.
십여 년 전 텅 빈 메가박스에 홀로 앉아 전율했을 때엔 이 전위적인 작품의 실연을 접하게 될 날이 죽기 전에 도래하리라고 꿈에도 그리지 못했다. 얼마나 전율했길래 총 4막의 모든 구성을 지금껏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나를 바람결처럼 스치고만 지났던 무용계의 열망까지 떠안느라 그땐 원작과 이 위대한 현대식 재해석을 온전히 받아 들지 못하고 쩔쩔맸던 기억이 고스란하다.
자랑스럽게도 그 사이 나는 그냥 늙지 않았나 보다.
오늘 나는 그때와 전혀 다른 왕자와 백조를 조우했다.
어린아이는 무조건 사랑 받아야 마땅하다는 방정환 선생님의 말씀은 무조건 옳다. 유년 시절에 충분히 사랑 받지 못한 존재는 사는 내내 그 자신과의 혈투를 피할 수 없다. 부모에게 손쉽게 받았어야 할 존재의 의미를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야 하기에. 부모라면 호흡처럼 당연히 장착해주었을 존재감을 스스로 확약 받자면, 운 나쁘면 평생을 소모하고도, 더 나쁘면 목숨까지 내걸고도 얻지 못한다.
매튜 본의 왕자는 여기서 출발했다. 고전에서의 남녀 간의 사랑은 그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었고, 오해와 질투와 절망으로 결국 파국에 이른 고전의 백조는 가없는 질문과 의혹과 검증으로 닳아빠지다못해 사그라져버리는 자아의 형상화로 막을 건너갈수록 절박하게 가려졌다. 보이지 않는 나. 그리고 그 뒤로 더욱 꽁꽁 숨어버린, 내가 갈구하는 사랑의 실체.
애초에 없었고, 그래서 더욱 절박했던 사랑은 왕자를 좀먹는다. 왕자의 자아가 무너질 때마다 기운차게 날아오른 백조는 결국 죽음으로써 그를 구원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구원인가.
로 싸워야 할 것 같은데 30년 전 매체들은 퀴어 논란으로 뒤엉켰다. 초연을 보던 무수한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매튜 본으로선 오히려 쾌재를 불렀을 법한 시대상이다. 어느 시대를 사느냐가 어떤 부모 밑에서 자라느냐만큼 절대적 운명의 허들이 된다는 걸 가상의 예술이 현실에 그대로 투영한 셈이다.
춤은 왕자의 분열된 자아를, 그 강박적 사랑에의 희구를 무자비하게 형상화한다. 여리고 나약한 왕자의 자아가 불러낸 강력하고 완강한 순수에의 백조,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왕자의 자아가 불러낸 옴므파탈 마력의 백조, 지치고 버림 받은 왕자의 자아가 불러낸 피에타 마리아상의 백조.
극단의 자아들을 조율해내는 데 실패한 왕자는 운명의 신과의 담판에서 필패한 대가로 그 자신을 넘긴다.
인간은 그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만 전지전능하다.
30년의 시간을 거슬러 여전히 무용계의 일대 획을 긋는 매튜 본 또한 전지전능하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예술을 만나 더더욱 허기지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