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

by 글섬

1

그 시절의 내가 그랬다. 줄곧 거기에서 벗어날 기회를 엿보았다고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 무지근한 고통이 전부라고 믿으며 마지막까지 그냥 부유했던 것 같다. (22페이지)


2

프로메테우스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녹인 금에 담근 조각상처럼 보일 정도로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러는 내내 신들은 번개처럼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았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번갈아 에리니스의 채찍을 휘두르며 즐거워했을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달랐다.

다르다고? 낮고 우렁찬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생각을 해야 한다, 키르케. 그들이라면 어떻게 하지 않겠는지.(81페이지)


3

"내 얼굴을 치료할 때 중얼거린 게 뭐였어?"

"힘의 주문."

"나한테 가르쳐줄 수 있어?"

"마법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기 스스로 찾지 않으면 못하는 거야." (92페이지)


4

나는 아이가 팔을 날개처럼 구부리고, 자기 동작과 사랑에 빠진 어리고 튼튼한 다리를 움직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명성을 쌓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과 끈기를 통해, 태양 아래에서 빛날 때까지 정원을 가꾸듯 기술을 연마해가며. 하지만 신들은 이코르와 넥타르의 산물이라 탁월함이 이미 손끝에서 터져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며 명성을 쌓았다. 도시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일으키고 역병과 괴물을 낳고. 우리의 제단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그 모든 연기와 향기. 남는 건 재 가루뿐이었다.(176페이지)


5.

내 집은 마흔여 명의 남자들로 북적거렸고 나는 난생처음 인간의 육신에 파묻혀 지냈다. 허약한 그들의 육신은 끊임없는 관심, 음식과 술, 잠과 휴식, 청결과 배출을 필요로 했다. 그걸 매시간 반복하다니 참으로 끈기 있는 족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77페이지)


6.

"신들은 자기가 부모인 듯 굴지."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손뼉을 치며 좀더 달라고 외쳐대는 어린애다."(427페이지)


7.

페넬로페가 물었다. "그럼 마녀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신이 아니라도 된다면요."

"나도 잘은 모르겠다." 내가 말했다. "예전에는 혈통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텔레고노스는 주술에 소질이 없더구나. 의지가 가장 큰 요소가 아닌가 믿게 됐다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의지가 뭔지 알았다.(440페이지)


8.

분노가 그의 얼굴 위로 숨김없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에게서 순수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시인들이 얘기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순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텔레마코스의 그것은 이야기가 끝나면 무너져야 하거나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유지해야 하는 미덕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어리석었다거나 순진했다는 뜻에서 하는 말도 아니다. 그는 찌꺼기가 들어붙은 우리와 다르게 자기 자신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일직선상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 그의 아버지가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오디세우스는 항상 숨겨진 뜻과 어둠 속의 칼을 찾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텔레마코스는 칼을 내놓고 다녔다.(442페이지)


9.

산들바람이 아이들 위로 불지만 세상은 산들바람보다 더한 것으로 가득하다. 질병과 재앙, 괴물과 천 가지 다양한 고통. 나는 하늘에서 칼처럼 눈부시고 날카롭게 우리의 괴로운 육신을 겨누고 있는 아버지와 그의 일족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앙심과 악의에 겨워서, 또는 실수로 아니면 충동으로 우리를 덮칠 것이다. 숨이 목구멍에서 걸린다. 그렇게 불행한 운명을 짊어진 채 무슨 수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499페이지)


10.

키르케, 그가 말한다. 괜찮을 거예요.

신탁이나 예언이 아니다. 어린애한테 함직한 얘기다. 그가 악몽을 꾼 아이를 안고 흔들며 다시 재울 때, 베인 상처를 소독할 때, 뭔가에 쏘인 곳을 진정시킬 때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어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의 살결이 내 살결만큼 익숙하다. 밤공기 위로 따뜻하게 번지는 그의 숨소리가 들리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무섭지 않다는 뜻에서 한 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여기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파도 속에서 헤엄친다는 게, 흙을 밟고 걸으며 그 느낌을 감상한다는 게 그런 뜻이다. 살아 있다는 게 그런 뜻이다.(500페이지)






애초엔 누구나 다르지 않다. 평범함조차 애써 도달해야 할 어떤 최선이다. 키르케의 첫사랑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지만 평범에도 미치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대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운명은 고통의 표면으로 온다. 만일 키르케가 첫사랑을 이뤄 결혼이라는 피상적 행복쯤으로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게 되는 운명으로 흘렀다면 본연의 힘을 깨닫기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첫사랑을 처참히 일그러뜨려 키르케를 극단의 고통으로 몰고 감으로써 그를 각성의 길로 이끌었다.

당장은 알 수가 없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 피어날 어떤 꽃의 씨앗인지를. 그저 믿어야 한다. 지금 고통스럽다면, 이미 내일의 꽃이 움트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그러냐면, 반드시 그렇다. 왜냐면 고통은 현재 진행형뿐이기에.


한동안 이 책은 나의 선물 목록 1순위였다. 이 책에서 내가 캐낸 '마법'을 선물 받은 이들도 캐냈는지는 모르겠다.

"마법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기 스스로 찾지 않으면 못하는 거야." (92페이지)

누구도 누구에게 표지는 될 수 있어도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 그게 삶의 공평함 중 으뜸이다.


파르마케이아. 세상에 변화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약초 파르마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녀. 땅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이기에 신계의 일반적인 법칙을 따르지 않으므로 신의 한계에 구속받지 않는 존재. 때문에 신계에도 인간계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

작가는 신화 속 키르케가 마녀라는 점에 착안했다. 키르케는 8세기 호메로스가 지은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의 발목을 잡아 그의 귀환을 늦추는 아이아이에의 마녀로 잠깐 등장하는 조연급 님프이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긴 하지만, 신의 세계에서 님프는 자기 삶의 결정권이 전혀 없는 말단 중에서도 말단이다. 작가 매들린 밀러는 여신이라면 대개 질투와 변덕이 심하고 미모에만 집착하며 후계자를 낳는 데 만족하는 존재로 그려졌던 서양 문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마녀라는 존재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사회가 여자에게 허용해준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에게 주어지는 단어가 마녀라는 관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발상의 전환 그 자체다. 학사와 석사 모두 고전학 학위를 얻은 이력답게 매들린 밀러는 그리스 신화 속 모든 인물과 이야기를 그녀만의 베틀에 감아 새로운 직물을 짜 내는 데 성공했다. 능수능란한 그녀의 직조술 덕분에 나 같은 신화 젬병도 책을 놓지 못하는 병폐가 발생한다.


신계의 최하위 존재를 통해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극복하는 성장기로만 쉽게 읽혀지다가 뒤통수를 맞는다. 헬리오스의 황금색 머리칼을 지닌 존재가,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기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답을 할 필요가 없는" 마녀가 한낱 님프로서, 그것도 못생긴 님프로서의 태생적 한계와 좌절, 멸시와 자기 혐오, 오판과 실패 끝에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 성장해 다다르는 곳이 인간계라니. 인간과 인간 생애에 대해 이보다 열렬한 애정 표현이 또 있을까. 키르케가 신으로서 스스로 짊어진 모든 의무를 다하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기꺼이 인간을 선택하는 순간, 삶의 의미가 새로이 쓰여진다. 살아있음으로 겪어내야만 하는 불행한 운명도, 그에 대한 두려움도 다르게 읽힌다.


좋은 책일수록 읽을 때 밑줄을 긋지 않는다. 다시 읽겠다는 의지의 일환으로, 다시 읽을 때는 밑줄이 달라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키르케가 미운 오리 새끼처럼 가족의 지탄 속에서도 홀연히 홀로 서기 위해 아이아이에 섬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부분에 밑줄을 그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N차의 희열이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전지전능한 인간인데 그 전능한 의지의 한 귀퉁이도 활용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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