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 장편소설 / 전은경 옮김 / 들녘 출판사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183페이지)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사람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스스로를 견디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될 테니까.(279페이지)
우리가 다시 리스본에 왔을 때, 그는 혹시 자기 자신에 대한 신의라는 것도 존재할까 자주 생각했소. 생각으로든 행동에서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의무 말이오.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편을 들 준비 자세..... (285페이지)
난 언제나 이른바 '성숙'이라는 걸 거부하던 사람이오. 싫어해. 난 사람들이 말하는 성숙이란 걸 낙관주의나 완벽한 권태라고 생각하오. (291페이지)
숨어 있는 실존감, 반대되는 가면을 쓴 채 내 인생을 결정한 부모의 실존감이 나에게도 있었을까? (409페이지)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이라는 메모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거두어가면, 왜 우린 그들에게 '그런 건 필요 없소. 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말하지 못하나?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소름끼치는 속박의 한 형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일을 견디는 댐이나 보루로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하나? 내적인 견실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418페이지)
내 영혼의 짐을 져야 할 아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작은 아이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 (중략)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벽하게 무기력하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찾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 (453페이지)
아마데우는 그녀를 통해 자신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걸 느꼈을 거예요. 남자로서 완전해질 기회. (457페이지)
문제는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요. (471페이지)
그 말에 실우베이라가 웃음을 떠뜨렸다. 그레고리우스도 따라 웃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한순간이긴 해도, 두 사람은 모든 불안과 슬픔과 실망과 삶의 피로 위에 우뚝 설 수 있었다. 그 불안과 슬픔과 실망이 완벽하게 각자의 것이라서 오로지 각자에게만 해당하는 외로움을 만든다 해도, 두 사람은 웃음 속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528페이지)
'당신, 너무 허기졌어요. 당신과 함께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지만, 당신은 너무 허기졌어요. 그 여행은 할 수 없어요. 그건 당신의 여행, 오로지 당신 혼자만의 여행이에요. 우리의 여행이 될 수 없어요.' 그녀가 옳았다. 타인을 자기 삶의 건축용 석재로, 자기 구원의 경주를 위한 일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536페이지)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배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 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537페이지)
누군가 저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저는 언제나 도망쳤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 가지는 그대로 남았지요. 저는 누군가가 저를 '완전히' 이해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의 눈이 멀어야 저는 안전하고 자유로우니까요.
제 말이 아마데우가 정말 정열적으로 저를 좋아했다는 듯이 들릴 거 같아요.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건 만남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특히 그가 아무리 얻어도 물리지 않는 삶의 원형질을 빨아들였던 거예요. 다르게 말하자면 저는 그가 정말 원했던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가 잡으려고 했던 삶의 무대였지요. 죽음에 이르기 전에 한번 완벽한 삶을 살고 싶다는 듯, 지금까지 사람들이 마치 그를 속여왔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잡으려던 완벽한 삶의 무대. (553페이지)
진정으로 고전어와 문학을 사랑하는 고전문헌학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비 내리는 어느 날 출근길에 다리 난간에 서서 뛰어내릴 듯한 여자를 발견한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수수께끼 같은 그 여자와의 만남을 축으로 그는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깨닫는다. 그 여자가 발음했던 포르투갈어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빗물처럼 스며든다. 지난 30년의 교사 생활 동안 단 한 번의 지각도 결근도 없었던 그가 수업 도중에 태연히 외투만 챙긴 채 교실을 나서 그 길로 학교를 떠난다. 갑작스럽게 경로를 벗어난 그가 경로 재설정을 위해 선택한 건 에스파냐 책방이었고, 그곳에서 포르투갈어로 쓰여진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만난다. 책방 주인이 번역해준 서문에서,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중략)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페이지)
그레고리우스는 자기 생의 결핍을 마주한다. 그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글을 따라 그의 생을 되짚어감으로써 그 자신이 놓치고 있던 생의 이면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무려 세 번째 읽는 책이었지만 예의 철학적 질문들로 인해 마치 처음처럼 더디고 더뎠다. 다만, 세 번의 독서 사이에 흘러간 십여 년의 시간은 여실했다. 이제 더 이상 인물의 서사에도 고뇌에도 파묻히지 않았다. 나는 인물 바깥에 서 있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인생을 따라가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도 모르는' 인생이라는 열차 칸에서 '내가 말하는 나와 남이 말하는 나.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가?'라는 화두를 쫓아가는 동안 나는 앞선 두 번의 독서와 달리 그의 열차에 따라 오르지 않았다. 이건 그레고리우스가 이전 30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리스본으로 향하는 것과 맞먹는 혁신이다. 덕분에 아마데우의 글을 통해 작가가 무차별적으로 던져대는 자아와 인생에 대한 질문들이 더 이상 묵직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건 뭐냐면, 살아볼 만하다는 거다. 고전어에 정통한 교사 그레고리우스가 아니어도, 평생토록 자기 자신으로서 충실했던 지식인 의사 아마데우가 아니어도, 그저 살아내기만 해도 저들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이 새삼스럽지 않게 되는 비결이 우리네 삶 자체에 이미 깃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세 번의 독서 끝에야 만난 이 신선한 독서가 단지 나이듦으로 인한 감정의 메마름에 따른 결과라고 해도 무척이나 흡족하다. 나로선 분명 지난한 등반 끝에 만난 어느 봉우리의 탁 트인 시야이기에 이 가지런한 이성적 시선에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말하자면 흰머리처럼 마치 그 어떤 업적 같다.
작가는 아마데우를 통해 "사유의 바깥쪽에는 설 자리가 없"으며,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라고 역설한다. 요컨대 산다는 게 명징한 의식과 철학으로만 구현되는 건 아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더 나은 인식을 위해서는, 낯선 언어와 낯선 세계를 무릅쓰는 그레고리우스처럼,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결국 리스본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이면을, 야간열차는 주간까지 기다릴 수 없는 간절한 목마름의 자기 인식을 표상한다.
인식하기 어렵고 예견도 장담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대변하듯 그레고리우스는 심각한 어지럼증을 느껴 귀로에 오른다. 정밀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들어서던 그가 주치의에게 "나를 잃어버릴 병이라면 어쩌지요?"라고 묻자, 주치의는 차분하고 굳건한 눈길로 "나한테 처방전이 있어요."라고 답한다.
누구나 어느 날 갑자기 야간열차에 오를 때가 온다. 열차는 방향도 목적지도 알 수 없어 어지럽다. 하지만 어느 역에 정차해도, 심지어 열차가 탈선한다 해도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각자에게 맞는 섬세한 방식의 처방전을 이미 가지고 있다. 야간열차는 우리가 항상 지니고 있었으나 알지는 못했던 그것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다. 어느 날 야간열차에 오르게 되면 어지럼증을 견디며 그려보자. 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내 마음 속의 우물에 도착하는 그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