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고, 모든 존재는 애닳고 소중하다
초등학교 시절,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 'ㅎ'이 들어가는 성씨라서 늘 마지막 순서로 불렸기 때문에. 둘째,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인의 책이 학급 도서에 있어서 애들이 놀려댔기 때문에. 셋째, 같은 교회에 같은 이름을 가진 지적장애인 'A 언니'가 있었기 때문에.
애가 셋이나 있어 그런지, 엄마 아빠도 이따금 우리 삼 남매의 이름을 잘못 부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구가 되기도, 저기가 되기도 했다. 마침 나에게는 둘째 콤플렉스가 있어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남동생과 세트로 여겨지거나 누나로서 남동생을 챙겨야 하는 일에 이골이 나있었다. 집 밖에서 만큼은 오롯이 홀로 존재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공동체가 으레 그렇듯, 교회는 어린이의 이러한 욕구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진 못했다. 교회 사무국은 서류상 동명이인을 구분하기 위해 이름 뒤에 알파벳을 붙였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 일찍 교인으로 등록된 A 언니는 “OOO A”가, 나는 “OOO B”가 되었다. 남동생이 없는 곳에서 또 누군가와 한데 묶인 데다가 우선순위도 뒤로 밀려났다는 게 불만스러웠다.
A 언니를 직접적으로 대면한 건 교회 초등부에서였다. 언니가 밉지는 않았다. 내가 싫어했던 건 교회에서 우리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둘 중 누가 불린 것인지 확인하려고 주변 사람들이 A 언니와 나를 번갈아 보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A 언니를 보면 다양한 반응을 했다. 동정심도, 호기심도, 보기 불편한 듯 급히 돌아가는 고개도 훤히 보였다. 그 장면을 언니와 나란히 서서 보고 있자면 나도 언니처럼 대해지는 것 같았다.
“둘이 이름이 똑같네. 사이좋게 지내~” 우리가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된 날, 어른들은 언니와 나를 한 자리에 앉히고 서로 인사하게 했다. 어딘지 모르게 시선이 의식되어서 나는 착한 어린이답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내가 살짝 다가가자 언니는 곧장 성큼 다가왔다. 언니는 발랄한 어린이였고 본인 의사를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어른들의 걱정대로 혹시 내가 못되게 굴더라도 그저 당할 것만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A 언니는 언니였고 나는 동생이었다. 집에 있는 남동생과는 달랐다. 언니를 보살펴야 할 거라는 처음의 생각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사라졌다.
언니와 얼마간 같이 놀았다. 친하게 지내는 교회 친구가 없었기도 했고, 언니랑 노는 동안은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느꼈다. 집에서 충족되지 못했던,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너무 달콤했다. 그러나 언니를 이해하는 일은 다른 친구들을 이해하는 일보다 어려웠다. 함께 놀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어른들의 관점대로 언니를 수동적이고 연약한 존재로 봤고, 동등하지 않은 상대와의 놀이는 금방 불편해졌다.
언니가 먼저 중등부로 올라가면서 함께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언니와 인사를 주고받지 않았다. 대신 관찰자가 되어 언니를 지켜봤다.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니가 여전히 나를 알아볼까? 다시 고개를 돌리면 언니는 이미 나를 지나쳐 사라진 후였다. 언니처럼 내 이름 뒤에 붙던 B도 어느새 지워졌다. 내 이름 석자만 남아있는 이름표를 보며 후련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마음을 누구에도 말할 수 없었다.
10년 뒤 나는 교회를 떠났다. 가부장적인 문화와 성소수자 혐오를 더는 견딜 수 없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이름을 직접 지어서 개명했다. 개명 절차가 끝나자 기존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던 모든 기관에 개명 사실을 알렸다. 교회에는 엄마가 대신 개명 사실을 알렸다. A 언니와 나의 연결고리는 그때 완전히 끊어졌다. 그제야 10년 전 처음 언니를 만났을 때 느낀 불편함의 이유가 선명해졌다.
각자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는 이름 석 자가 같다는 이유로 서로 한 묶음이 되었다. 언니가 장애를 이유로 남들과 다르게 대해질 때, 이름 석 자가 같은 나는 완전한 남이 되지 못한 채 언니가 겪는 것을 함께 겪었다. 안 그래도 'ㅎ'이 들어간 성씨라서 맨 마지막 순서에 불리는 내 이름이 더욱 뒤로, 바깥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그게 무서웠던 거다.
얼마 전, 아직도 내가 교회에 돌아오길 바라는 엄마의 손에 붙들려 교회를 방문했다. 예배 도중에 화장실 가는 척 1층 카페로 도망 나왔는데, 거기에서 A 언니를 봤다. 언니는 여전히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언니 옆에는 돌봄 선생님으로 보이는 내 또래의 젊은 여성이 함께였고 언니를 포함해 여러 명을 동시에 인솔하고 있었다. 언니는 소파에 앉아 어떤 방향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 교회에서 어떻게 지내? 언니는 여기가 정말 괜찮아? 계속 여기에 있어도 되겠어?' 언니를 보자 머릿속에 질문이 가득 차올랐지만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언니를 바라봤다. 건너편에서 앉아있는 언니에게서는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언니는 그저 어떤 방향을 똑바로 보다가 돌봄 선생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고개를 돌렸다. 그날도 언니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마음속에는 차마 꺼내놓지 못한 질문이 웅웅 울렸다.
책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란 영어에서 쓰이는 관용적 표현으로 타인의 입장에 서본다는 뜻이다." 그 순간 A 언니를 떠올렸다. 어른들의 시선을 답습하던 그때의 나는 언니의 신발을 신어보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언니의 신발이 궁금하다. 이렇게 변한 건 내가 기득권이면서 소수자라는 걸 알게 되어서다. 나는 서울 출신에 인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왔다는 점에서 기득권이지만 동시에 아시안 여성이자 성소수자이고 정신질환자이라는 점에서 소수자다. 소수자로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가 겪는 어려움을 떠올리면, 소수자로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삶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A 언니의 신발을 신어 본다.
언니와 나는 남들과 다르지만 있는 그대로 가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겐 자유롭고 우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부대끼며 더 나은 것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첫 단추는 공감, 즉 스스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적어도 누군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를 향해 목소리 낼 때 진지하게 듣고 함께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누구나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다. 동시에 모든 존재는 애닳고 소중하다. 스스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자. 그렇게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