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이 책은 군대에서 읽었었고,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라는 유튜버가 쓴 책이다. 나는 이 사람의 구독자로서 이 사람의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마침, 내 군대 후임이 이 책을 사게 되어 빌려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책을 읽으며, 나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더 단단해졌음을 느꼈던 책 중 하나다. 그래서 군대에서 썼던 독서 기록장을 다시 펼쳐서 그때의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나약해진 것이다. 성별 간의 불평등이 더욱 커진 게 아니다. 인종 간의 차별이 더욱 극심해진 게 아니다. 우리가 더욱 나약해진 것뿐이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기 시작한 결과다. 늑대에게 팔다리를 물어뜯기지 않은 오늘에 감사하자. 섹시한 여성이 엉덩이 춤을 췄다고 여성의 인권이 하락하는 것이 아니다. 청소부와 변호사의 임금이 다른 것이 기득권층의 음모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편 레이더를 돌려가며 하루를 소비하기 전에, 내가 이 사회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자는 거다. 거짓된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되지 말자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하자. 내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건 불공평한 시스템과 쓰레기 같은 사회가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책임을 회피하고 남 탓만 할 줄 아는,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탓일 테니까. 그러니 그럴 시간에 진정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고민하자.
오늘날 젊은 남성은 그들이 정작 가져본 적도 없는 가부장적 권력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가진 본연의 남성성을 유해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이상한 상황에 처해 있다. '남성성의 위기'란 이렇게 찾아왔다.
과거에는 여성보다 남성이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에서 더 많은 책임을 졌다. 그만큼 남성이 갖는 권력은 컸고 그것은 곧 가부장제로 이어졌다. 하지만 현재는 다르다. 여성도 지게 되는 책임이 많아졌고 그만큼 여성이 갖는 권력 또한 커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가부장적인 권력 또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배제한 채 과거의 가부장적인 권력에 대한 책임을 오늘날 젊은 남성들에게 묻고 있는 여성들이 생겨나고 있다. 과거에 남성이 짊어진 책임감의 무게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남성은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여성은 경쟁보다는 조화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말이다. 이 말은 즉슨, 우리는 남녀평등을 바라볼 때 오직 사회적인 구조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왜 이러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는지 다양한 시각, 즉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위 1%의 부자의 성비가 50:50이 된다면 정말로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 질까? 국회의 여성의원과 남성의원의 비가 50:50이 된다면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진 건가?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 원양어선을 타는 노동자의 대부분이 남성이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점을 제기할 때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판단을 하기 전에 내가 정말 상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지 항상 돌이켜보아야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피해자이고 희생자이다.
나도 한 때는 학창 시절에 키가 작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피해자 취급을 한 적이 있다. 여학생들은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키만 크면 나의 불행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키 큰 친구들을 질투하고, 키가 컸었더라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라는 망상에 빠져 살았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나는 공부도 못했고, 외모를 가꾸지도, 운동을 하여 몸을 키우지도 않았었다. 그저 뭐 하나 노력한 거 없이 세상을 탓하며,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랐다. 나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했다. 만약 내가 그때 좋아했던 여학생에게 "왜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 너도 결국 잘생기고 키 큰 남자만 좋아하는 거지? 결국 나 같은 사람한테는 관심도 없는 거잖아. 위선자" 이런 식으로 악담을 퍼부었다면,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해 버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나약한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사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집단과 이념에 개인이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철저히 독립적인 존재로 사고하고 비판하여 강인하게 일어설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만 한다.
개인은 외롭고 나약한 존재다. 그래서 끊임없이 유대를 원한다. 자신의 주장과 가치관을 꺾고서라도 집단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오롯한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쉬운 길을 따르지 않으려면, '숭고한 정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조던 피터슨은 더 나아가 '진실을 말하는 것'도 이러한 숭고함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어떤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온전히 지는 것, 거짓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을 말할 때 세상이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조던 피터슨이 생각하는 숭고함의 절대적 가치다.
우리는 쉽게 삶의 목적을 행복에 둔다. 그러면 삶의 질을 내가 지금 행복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되고, 행복한 상황이 유지되지 않으면 삶은 무척이나 괴로운 것이 된다. 행복을 추구할수록 더욱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삶을 '고통'으로 보고, 자발적으로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면, 고통스러운 삶을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기업, 그 밖에 여러 집단들은 개인이 모여 형성된다. 이러한 집단 안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가치는 잊은 채 집단의 가치에 따라 움직인다. 자신의 행동이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집단에 의존하여 자신이 보호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이 집단에게 더 헌신할 때,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오히려 세상에 더 많은 혼란을 준다. 집단의 목적과 의식에 사로 잡혀, 개인의 개성을 잃고 성장 가능성을 낮추게 된다면, 역으로 개개인의 능력이 약화되어 집단 또한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좋은 집단은 개인을 개인으로서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더 나은 가족, 회사,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실을 추구하며,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책임감을 가지면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추적 군중에게 죄의식은 없다. 상대의 잘못이 명백하기에 자신의 공격은 정당화된다. 잔인할수록 즐겁다. 상대의 죽음은 군중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튜버는 추적군정에 의해 사회적 죽임을 당한다. 이와 동시에 이들 추적 군중은 순식간에 흩어진다. 이 잔인한 공격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다. 군중의 구성원은 하나의 '군중' 그 자체로서 인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든 거리낌이 없다.
...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이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형태였는지, 잔인한 살인의 현장이었는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잔인한 축제가 끝나면 깊게 반성하는 사람도, 이에 책임을 지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변화는 존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존경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가치는 지켜야 한다. 그렇게 역사는 진보해 왔다.
우리는 개인의 이념과 가치를 바로잡아야 한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비정상적인 군중에 속하여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나'라는 사람과 '너'라는 사람은, 진정한 자신을 망각한 채 집단에 선동되어 조종당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진짜 자유로운 세상은 40대 백인 남자가 10대 흑인 혼혈아에 대한 영화를 비평할 수 있는 세상일 것이다. 진짜 평등한 세상은 누구라도 인종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영화를 자유롭게 비평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영화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데 나의 인종이나 성별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 비평을 잘하는 사람이 영화 비평을 하면 된다.
...
평등해야 하는 것은 오직 기회뿐이다.
위계질서가 없는 사회를 요구하는 급진주의는 나의 변화보다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므로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말하니까.
...
결국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쟁은 과연 나쁜 것일까? 우리는 경쟁에 살아남은 최고의 의사한테 진료를 보고 싶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부르는 영화나 음악 등을 즐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더 좋은, 더 나은 것을 원한다. 이러한 것들의 특징은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즉슨, 경쟁이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해진다면 발전이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경쟁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의 경쟁을 기반으로 한 교육체제가 좋지 못할까? 경쟁이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건 자신의 삶의 진정한 목표와 의미가 있을 때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에는 아이들의 삶의 목표나 의미를 찾아주려는 의지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무작정 학생들을 경쟁 구도에 몰아넣고 급을 나누어 버린다.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삶의 목표와 의미가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닌, 사회 구조에 의해 결정되어 대학 타이틀에 목을 매고 자신이 원하는 대학을 못 갔거나 좋지 못한 대학을 간 학생들은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 느끼게 된다.
정말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현재 나는 지방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고 이곳에서 실제로 자신의 삶에 많은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친구들을 종종 보게 된다. 눈빛의 초점은 흐리고, 목소리에는 힘이 없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할 줄 모르고, 심지어 자신이 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개인의 기준에 따라 어떤 집단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러한 친구들이 하루빨리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정리하자면, 나는 바람직한 경쟁은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존재할 때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경쟁자들을 의식하며 열등감을 원동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닌, 어제보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달릴 때 경쟁에서 진정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