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성내에서 21g 솝플레이트까지 ep.2
지난 3월 3일 임피디와 잔느로, 디자이너안이 선택지 사무실에 모였다. 문자와 유선으로 몇 가지 사전 정보를 공유한 후 첫 만남이었다. 안부를 묻고 바로 일 이야기. 디자이너안은 그동안 구상한 컨셉도를 내놓았다. 우리는 딱 필요한 기능만 담긴 딱 필요한 크기의 ‘비누받침’을 만드려고 한다. 지난해부터 주변 이웃들과 모은 플라스틱을 재활용해서.
플라스틱을 가공하는 건 매우 간단하다. 플라스틱이 녹을 수 있는 온도로 가열하여 고체를 액화하고 성형틀에 넣거나 판으로 압착하는 방식으로 형태를 만들면 된다. 그러고 보면 이런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주변에 꽤 있다. 오징어게임으로 이제는 글로벌 간식거리가 된 달고나, 벨기에 와플, 겨울철 대한민국 국민 간식 붕어빵, 그리고 선택지앙의 최애템 비누까지.
다들 비슷비슷한 생각을 한다고. 이미 플라스틱 방앗간도 있고, 플라스틱 베이커리도 있다.
받침은 판상형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사람은 괴는 걸 좋아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물건을 괴는 건 물건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비누야 바닥에 놓을 수 없어 받침이 꼭 필요하지만, 받침이 딱히 필요 없는 것들도 바닥에 그냥 놓질 않는다. 바닥에 있는 물건은 잠시 놔둔 것이거나 버려진 것, 제자리에 있는 않은 물건으로 보인다.
처음 머릿속에 떠올랐던 이미지는 N. 선택지 로고의 Z를 뒤집어 놓은 것 아니냐고 혹자가 그러더라만, 그것보다 여러 개를 겹칠 수 있는 형태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N ∞ = NNNNNNN….. 판형의 종이를 두 번만 접으면 되면 단순한 형태. 누가 건축쟁이 아니었다고 이런 생각만 한다.
잔느로의 꼬맹이는 유튜브에서 네모아저씨를 영접하고 종이접기 세계에 빠져들었다. 꼬맹이들에게 종이접기가 신세계이겠지만 철없는 어른이에게도 종이접기는 항상 신세계다. 이차원을 삼차원으로 만들어주는 신세계.
같은 형태의 조각이 모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건 꽤 근사하다. 이질적인 것을 이것저것 모아 만든 것보다. 조각을 연결하여 만들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해진다. 하나의 기본 형태만 있으면 된다. N자에서 시작한 ‘어떻게 엮을까’에 대한 고민은 여러 방향으로 생각의 조각을 엮어간다. 형태가 확장되는 만큼 기능이 확장되고 분리와 조합으로 다양한 사용 방식을 상상할 수 있다.
N. 각지고 딱딱해. 플라스틱이 딱딱하다고 모양도 딱딱해서야. 잔느로의 말이다. 부드러운 형태, 곡선형, 조약돌같이 동글동글한 모양이 좋다. 플라스틱 성형 과정의 컬러 조합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마블링과 그것을 닮은 의도하지 않은 비정형.
이러한 이미지의 단초가 아래의 스케치를 낳고…
이후 이렇게 되었다.
3월 내내 선택지 사무실에서,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줌 화상회의에서 줄곧 만나 회의하고 작업하고 회의하고 작업하고 회의하는 시간을 보내며 스케치는 도안으로 도안은 3D 모델링 3D 모델링은 목업 결과물로 발전한다. 컬러를 선택하고, 컬러에 대한 회의만 3번, 비누받침의 이름을 정했다, 비누받침 이름 정하느라 회의 3번. 욕심 많은 우리는 컬러를 6가지나 골라버렸고, 비누받침의 이름을 I was a bottle cap_21g 이라고 다소 긴 제목을 붙여버렸다.
그동안 디자이너안은 도안 수정 작업을 반복한다.
제작한 샘플을 노플라스틱선데이에서 찾아 상품 촬영팀에게 넘기고 또 한 번 컬러 고민을 했다. 컬러에 대한 고민을 최종 제작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패키지 디자인. 옆에서 개봉하는 종이 상자, 봉투 형태, 과자봉지 형태, 엽서 형태 등을 고민하다 서류철 형태로 결정했다. 패키지는 과하지 않을 것, 패키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을 것, 외부에서 색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 등을 기준으로 정했다. 소재는 사탕수수 비목재 종이, 미색 컬러, 평량 297g.
제작된 패키지가 도착하고. 인쇄 필름이 뒤집어졌는지 비누받침의 스마일 병뚜껑 문양과 패키지의 도려낸 부분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 디자이너안은 인쇄소로 향하고, 재제작이라는 협상의 결과를 안고 돌아온다. 패키지를 묶어줄 고무줄을 찾으러 디자이너안은 방산시장에 가고 고무줄의 색상과 굵기를 하나하나 따져 고르고 묶음 제작을 맡기고 돌아온다. 나같이 입만 놀리는 인간과 달리 부지런하다.
고무줄 색상을 고르는 데도 우리는 한 이틀 반나절 더하기 하루를 고민한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많아서인지 결정에 시간이 걸린다. 아이보리색으로 결정을 하고 주문할 때는 형광노란색이다.
하고많은 것 중에 왜 비누받침을?
세상 쓸모없는 물건을 좋아하지 않아 세상 쓸모없는 일이 주는 가능성과 상상력, 주변을 살피는 감성이라고는 1도 없는 임피디가 세상 쓸모 있는 비누받침을 갖고 싶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비누받침을 만들게 되었다. 비누받침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플라스틱만한 소재가 없다.
왜 플라스틱을 재활용할 생각을?
플라스틱이 재활용되는 물질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물건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물건이 세상에 거의 없으니까.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다양한 생활용품이 시중에 나오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의미로 손가락 하나 걸친다.
이름이 왜 21g?
21g은 비누받침을 만드는 데 사용된 병뚜껑의 무게다. 개수로 따지면 11~12개 분량. 병뚜껑 하나라도 소중하게 다루면 쓸모가 생긴다. 에계… 12개라고 말하는 임피티에게, ‘우리의 활동이 티끌부터 모아보자라는 의미니깐… 10개 모으는 건 쉬운데 처음 1개를 모으기는 정말 어려운 듯요.’라고 디자이너안이 말한다. 12개는 작은 수가 아니다.
사람의 머리가 세 개 모이면 모인 사람의 머릿속에 세 개의 세상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그려내고 이야기하고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우리는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고 사공이 세 사람이어도 배는 산으로 간다. 산이 좋은 곳이냐 아니냐와 상과 없이 세 사람은 산의 경치를 보며 지금은 마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