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만나고,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by 퇴근후작가
image.png 초대전 전날 풍경. 인사동 사거리 쪽으로 현수막이 걸려있다


초대전을 하루 앞두고 가만히 돌아보니,

내 안에서 참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나는 바깥의 기준으로 나를 더 많이 바라보았다.
어떤 자리에 있는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 사람인지, 잘하는 만큼 인정 받고 있는지...


해야 할 일을 해내고, 기대에 부응하고, 주어진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시간들은 분명 내 삶의 일부였고, 나는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금 다른 질문이 생겼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나다워지는지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는지...

그 질문 끝에서 만난 것이 그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이 가는 쪽으로 손을 뻗은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림을 계속 그리다 보니,
나는 그림을 통해 단순히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나를 만나고 있었다.

내가 내 마음을 점점 살펴보게 되었다.


그림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많은 것이 단순해졌다.

잘 보이려는 마음도, 설명하려는 마음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도 조금씩 옅어졌다.

인정받지 못해도 나는 달라지는게 없고

여전히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림을 통해
결과보다 감각을, 평가보다 몰입을
역할보다 존재를 먼저 바라보게 되었다.


그 마음들이 이번 초대전의 자양분이 되었다.


예전의 나는 바깥의 흐름에 따라 마음이 쉽게 흔들리곤 했다.
무언가 잘되지 않으면 내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고,
내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곧 나 자신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만나고 난 뒤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는 안다.
나를 설명하는 것은 하나의 역할이나 위치만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라는 것.
그리고 그 시선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그림이라는 것을.


그림은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하루의 틈에 하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림은 내가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누구의 기대도 아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시간.
아무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그 시간 안에서 나는 오히려 가장 단단해졌다.

신기하게도 그림을 만나고 난 뒤
내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오래 매달리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보다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작업을 붙드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이제 내가 건강하게 오래 그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을
내 삶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먼저였다면,
지금은 오래 가야 한다는 마음이 더 크다.
오래 가려면 나를 소모시키지 않아야 하고,
나를 지키려면 내가 무엇으로 회복되는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림은 그 답을 조금씩 알려주었다.


나는 그림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배우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려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불완전한 마음 속에서도 끝내 빛을 찾으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초대전을 앞둔 지금,
나는 완벽하게 정리된 마음으로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복잡한 마음도 있고, 지치는 순간도 있고,
스스로가 크게 느껴지는 날과 작게 느껴지는 날이 번갈아 찾아온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럴 때마다 결국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복잡한 마음 속에서

나는 다시 그림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마 내 안의 많은 변화는
바로 그 반복 속에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조금 흔들려도 다시 그림으로 돌아오고,
또 다시 흔들려도 다시 나의 감각을 붙드는 일.
그 시간을 지나며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래서 오늘은 조용히 내 마음을 기록해 두고 싶다.


그림을 만나고 달라진 나의 모습을
더 단단해졌고, 더 솔직해진 나를


그리고 지금의 나는 안다.

내 안의 많은 변화가 결국

그림을 만나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나의 첫번째 초대전이 시작된다.



초대장 엽서_양면.jpg


작가노트


우리는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받는 세상 속에 산다. 오늘 하루를 얼마나 빈틈없이 채웠는지,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세상은 늘 제 몫을 다하라고 말했고, 나는 그 기대에 맞춰 괜찮은 척 웃고 있었다.


괜찮지 않은 날이 더 많았지만,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다.

숨 막히는 유용함의 강박 속에서 내가 도피하듯 찾아낸 위안은 철저히 무용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스마일미러볼을 그렸다. 미러볼은 어둠을 없애지도,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저 잘게 나뉜 조각으로 빛을 흩뿌릴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무용한 반짝임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하루를 다시 건너갈 힘을 얻었다.


유용한 세상 속에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무용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애써 내 가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그것이 나를 살게 했다. 그래서 나는 늘 위대함과 완벽함을 요구받았던 얼굴들을 캔버스에 다시 불러낸다. 그들에게도 이 무용한 빛 하나쯤은 허락해주고 싶어서다.


존재는 유용하지 않아도 빛날 수 있고, 깨진 채로도 충분하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이 무용한 반짝임이 오늘을 지나게 했으니까.


나는 오늘도 나의 스마일미러볼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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