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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핍의 임상심리사 Mar 21. 2024

진단은 셀프

임상심리사는 훌륭히 고통을 감내했을까. 

사실 그렇다기 보다 나는 일시적인 부적응을 겪었다.  


처음 문제가 불거졌을 때, 평소처럼 집중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환자를 대할 때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 이전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일이 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미리 해두는 성격임에도 작성해야할 보고서가 쌓이고 기한을 겨우 맞추는 날이 늘어났다. 식욕이 사라져서 끼니를 억지로 떼우거나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 밤도 많아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퇴근 후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기 일쑤였다. 


영락없는 적응장애였다. 

과장님께 조용히 말씀드려 몇주간 약을 먹어볼까. 

며칠 길게 휴가를 내고 시체처럼 누워있을까. 

이런 저런 대안들을 생각해 봤지만,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두려워도 할 건 해야지, 현실 직시하기

 

임대인(정확히는 임대인의 딸)은 우리 건물 1층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거기에서 일 하고 있는 것은 거의 못봤고, 길에 나와 맛있게 담배를 피고 있는 것은 몇번 목격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녀의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고, 내가 계약 해지를 통보한 시점에는 완전히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임대인과 통화한 다음 날, 퇴근하고 건물에 들어서자 한 여자가 복도에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기다려 달라고 하니까. 한번 믿고 기다려 보는 거지."

집 얘기라고 확신했다. 나와 같은 임대인이었을까. 이 건물에만 30채의 집이 있다던데. 


내가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가장 잘 한 일은 임대인을 믿지 않은 것이다. 

사실 너무 불안해서 그녀가 하는 멍멍 소리를 믿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녀는 곧 집이 나갈 거라고 했다. 집 값이 시세보다 너무 높아 명백한 깡통 전세였지만, 들어올 사람은 들어올 거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그녀야 말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주택도시 보증공사에 보험 한도 증액을 신청하겠다고 했다. 지금 집 값이 높아서 새로운 세입자가 보증 보험 조차 들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보증 보험 승인만 나면 새로운 임차인이 들어올테니 부동산에 집이나 잘 내놓으라고 했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해보기로 했다. (저 인간이 내가 지 직원인줄 아나 싶었지만 관계가 악화되어 좋을 건 없으니) 임대인의 주거래 부동산이 있지만, 거기 뿐만 아니라 그 지역 모든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내놓아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집을 보러 오니까. 


실제로 집을 보러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나는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군가 여기 들어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거지, 싶으면서도, 보험을 들면 괜찮은건가, 하면서. 


하지만 당연히, 집을 보고 돌아가서 조금만 알아보면 그 집이 안전한 매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찜찜해. 아니야. 이건 현실적인 대처가 아니었다. 



내용증명은 무조건 필수


시작은 내용 증명이다. 일이 잘 해결되든 안 되든, 일단 내용 증명은 보내야한다. 계약 종료일이 도래하기 3개월 전에 보내야 하기 때문에 시기를 놓치면 절대 안된다. 


내용증명은 충분히 직접 쓸 수 있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봐도 내용 증명 서식이 넘쳐난다. 

전세 사기 위험에 처해있을 때 내용 증명

"나는 너에게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다. 

이것은 나중에 모든 법적처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계약 연장하지 않겠다"

"너가 전세금을 제 때 돌려주지 않으면 나에게 (구체적인: 새 집의 계약금을 잃게된다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

"전세금 돌려주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

 

이 정도 내용이 포함되면 된다. 

내용증명은 서류를 작성해서 우체국에 가서 보낼 수도 있고, 온라인 우편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내가 임대인에게 의사 표현 했음을 우체국에서 증거 자료를 보관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임대인들은 내용증명을 곱게 받아주지 않는다. 



곱게 받지 않는 너에게 공시송달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기로 결심한 임대인은 많은 경우 잠적한다. 

이사를 하고, 핸드폰을 끄거나 바꾸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꼴값을 한다. 


그래서 계약서 상에 있는 임대인의 주소로 내용증명을 보내도 자꾸만 나에게 되돌아 온다. 

그럴 때는 전세 계약서와 신분증, 그리고 반송된 내용증명을 들고 주민센터에 가면 집주인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볼 수 있다. 


나도 반송된 내용증명을 들고 그녀 가족의 주소를 찾아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나와 같은 건물, 같은 층, 옆옆 호실에 살고 있었다. 

반가워라. 


새로운 주소로 내용증명을 보내면 어떤 경우 서류를 받기도 하지만, 

징글징글한 임대인은 그것 조차 받지 않는다. 

그러면 빨리 법원에 공시송달을 신청해야 한다. 


공시송달은 내용증명이 임대인에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법원에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임대인이 나타나면 즉각 서류를 전달해 주겠다고 법원 게시장에 게시하는 것이다. 

임대인이 의도적으로 서류를 피해 전달이 안되더라도 내가 의사 표시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가 된다. 



뭐요? 내용증명이요?


법원에서 보낸 서류를 받고 임대인은 발악했다. 

곧 집이 나갈텐데 왜 법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냐고 했다. 

이런식으로 나오면 자기도 주택도시공사에 신청한 보험금 증액건을 취소하고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다. 


에이씨. 어쩌라고. 내가 너를 어떻게 믿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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