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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업 Jun 04. 2024

일본의 힙합, 메인스트림 속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다

Bling-Bang-Bang-Born!

* 해당 글은 위버스 매거진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지난 2월 19일, 일본 음악 씬에 새겨질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다. 바로 힙합 크루 배드 홉(BAD HOP)이 해당 장르의 단일 아티스트로서는 최초로 도쿄 돔에서 단독 라이브를 개최한 것. 이들은 2014년 티-파블로(T-Pablow)와 와이저(YZERR)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고향인 가와사키에서의 와일드한 일상을 트랩이나 시카고 드릴과 같은 트렌디한 사운드로 그려내며 빠르게 10~20대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키워갔다. 밴드 씬에서의 시티팝 리바이벌 흐름과 ‘고교생 랩 선수권(高校生RAP選手権)’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대중과 블랙뮤직 간의 거리감을 단숨에 좁혔던 2010년대 중후반. 이들은 그 흐름을 타고 힙합이 젊은 세대의 음악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랬던 그들이, 이날 5만 명의 관객 앞에서 장렬히 활동의 마침표를 찍었다. 마치 만화 ‘원피스’ 속 골 D.로저의 마지막 순간을 연상시키는, 신시대의 도래를 스스로 선언하는 마무리였다.



일본에서 유독 힙합이나 랩 뮤직이 힘을 못 쓴다는 것도 이제 옛날이야기다. 신예 래퍼들은 스트리밍 차트의 상위권을 활발히 배턴터치 중이며, 최근 데뷔하는 밴드들은 블랙뮤직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솔로 뮤지션들의 활약도 간과할 수 없지만, 각자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내비치는 크루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배드 홉과 캰디타운(KANDYTOWN), 옌타운(YENTOWN), 우메다사이퍼(梅田サイファー) 등. 이들은 각기 다른 개성, 퍼포먼스를 통해 대중들의 틈을 순식간에 파고들며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던 중 작년 말과 올해 초 캰디타운과 배드 홉이 차례로 해산을 선언했고, 집단에서 개인 중심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감과 동시에 페스티벌 개최가 전보다 활발히 이루어지는 등 올해 들어 일본 힙합은 새 국면을 맞이하는 중이다.


다만 공연장 수용 인원 확대와 음원 시장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가 마냥 대중적이라고 보기엔 무리인 것도 사실이다. 이 장르가 으레 그렇듯 타깃이 한정되어 있고, 즐기는 사람만 즐기는 인상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타가 존재함에도, 그 인지도가 범세대적으로 고루 퍼지는 경우가 흔치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황이기에 이들의 활약은 더욱 각별하다. 팝과의 절묘한 융합과 신들린 듯한 무대를 통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랩 뮤직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DJ 마츠나가(松永)와 R-시테이(R-指定)로 구성된 2인조 유닛 크리피 넛츠(Creepy Nuts)의 이야기다.



이들은 앞서 이야기한 ‘힙합’이라는 장르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이들과 달리, 좀 더 파퓰러한 접근법으로 진입 장벽을 낮추며 세대 구분 없는 지지자를 포섭 중인 팀이다. 그들의 히트곡 중 하나인 ‘노비시로(のびしろ)’와 같은 곡이 대표적인데, 밴드 사운드 기반의 경쾌한 곡조를 바탕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랩이 기분 좋게 얹혀 듣는 이의 마음을 고양한다. ‘다텐(堕天)’의 경우는 어떤가. 혼 세션과 피아노를 적극 활용함과 동시에 리듬감이 꽉 들어차 있는 R-시테이의 퍼포먼스가 마치 뮤지컬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멋’과 ‘유니크함’보다는 ‘친숙함’과 ‘즐거움’을 지향하고 있으며, 타이업 또한 활발하게 전개함과 동시에 록/뮤직 페스티벌에서도 환영받는 등 사람들과의 접점을 최대한 만들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렇게 경력을 차곡차곡 겹쳐온 덕에, 그들의 단독 라이브는 이제 홀에서 아레나 투어로의 업그레이드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에 결성되어 4년 만에 메이저 데뷔를 달성한 이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그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DJ 마츠나가는 ‘DMC 월드 DJ 챔피언십 2019(DMC WORLD DJ CHAMPIONSHIPS 2019)’에 일본 대표로 출전해 우승한 이력이 있으며, R-시테이는 앞서 언급한 우메다사이퍼 소속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프리스타일 랩 경연인 ‘얼티미트 MC 배틀(ULTIMATE MC BATTLE)’ 전국 대회 3연패를 달성한 전대미문의 경력자다. 특히 유튜브 채널 ‘THE FIRST TAKE’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래핑이 우리나라에서도 쇼츠로 퍼져나가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정도. 그야말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막강 듀오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구성이다.




최근 따라잡을 자가 없는 ‘Bling-Bang-Bang-Born’의 인기는, 특유의 대중친화적인 접근법이 여러 요인과 맞물려 큰 시너지를 일으킨 사례라 할 만하다. TV 애니메이션 ‘마슐 신각자 후보 선발 시험 편’의 주제가로 타이업된 이 곡은, 숏폼을 중심으로 전개 중인 ‘BBBB 댄스’ 챌린지와 맞물려 올 한 해 최고의 히트 곡 중 하나로 자리할 기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준으로 빌보드 재팬의 종합 차트인 재팬 핫 100 차트에서 11주 연속 1위, 해외 인기의 척도로 여겨지는 빌보드 글로벌 재팬 송즈 차트(일본 제외)에서도 오랫동안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강렬한 색조가 인상적인 오프닝 영상 역시 공개 1개월 만에 유튜브 조회 수 8,700여 만 회를 기록하며 순항 중. 작년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을 타고 글로벌 히트를 일궈냈던 요아소비의 ‘아이돌(アイドル)’이 연상되는, 전 세계적인 열풍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떻게 보면 한층 확대된 힙합과 랩 뮤직의 영향력을 새로운 팝으로 정착시키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이 제대로 된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주제가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저지 클럽 사운드의 과감한 기용은, 이것이 팀 자체의 역량과 지금까지 보여준 커리어를 담보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더불어 OTT를 통해 한층 커진 영상 작품의 영향력에 숏폼 챌린지를 덧붙여 그 확산을 극대화하려는 일본 레이블들의 전략적인 움직임 또한 목격된다. 이처럼 해당 장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Bling-Bang-Bang-Born’의 히트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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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에이위치(Awich)의 활약도 눈에 띈다. 최근 몇 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온 결과, ‘코첼라 밸리 뮤직&아츠 페스티벌’의 88rising Futures 무대에 섬과 동시에 올해 ‘후지 록 페스티벌’ 첫째 날 서브 헤드라이너의 자리를 꿰찬 그다. 같은 옌타운 소속으로 꾸준히 높은 퀄리티의 비트를 제공해온 챠키 줄루(Chaki Zulu)의 지휘 아래, 어두웠던 시절을 지나 힙합 씬의 여왕으로 군림하기까지의 삶을 그대로 녹여낸 비장미 어린 서사와 당당함과 상냥함이 공존하는 특유의 카리스마, 여기에 고향인 오키나와의 지역색을 그대로 녹여낸 음악에서의 차별화까지. 특히 높은 완성도로 하여금 대중음악 씬을 포괄해 독보적인 완성도를 자랑하는 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 ‘Queendom’(2022)과 ‘THE UNION’(2023)은 그의 비상을 채근한 결정타였다. 더불어 동시대 여성 래퍼들을 한데 모아 강렬한 시너지를 선보인 ‘Bad Bitch 美学’을 통해 남성 중심의 신에 작지 않은 균열을 가하기도 했다. 작년 11월엔 2만 명이 입장 가능한 K-아레나 요코하마에서 성공리에 공연을 개최하는 등 크로스오버를 지향하는 크리피 넛츠와 달리 힙합이라는 정체성에 고스란히 몸을 실어 일궈낸 성취라는 점이 그만의 독자성을 돋보이게 만든다.
 
일본의 힙합은 지금도 쉼 없이 약진 중이다. 독특한 음색과 플로우로 승부함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박재범, 식케이와도 함께 작업한 이력이 있는 제이피 더 웨이비(JP THE WAVY),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단단하게 세공 중인 챤미나(ちゃんみな), 젊은 세대가 소구하는 무드를 명확히 제시하는 옐로우 벅스(¥ellow Bucks), 10대 특유의 불안정한 정서를 강한 어프로치로 전달하는 렉스(LEX), 비비드한 색감의 팝/랩 뮤직을 무기로 최근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라나(LANA)까지. 동시에 셀프 메이드(SELF MADE), 스타키즈(STARKIDS)와 같은 새로운 크루나 그룹들도 가세. 다양한 방향성을 가진 풍운아들이 춘추전국시대가 연상되는 격전지로 속속 모여들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상승세와 화력은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영미권의 최신 트렌드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아티스트나 대중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공통분모를 갖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양국의 아티스트들은 활발한 협업 체계를 구축 중이며, 일본의 가장 큰 힙합 페스티벌 중 하나인 ‘Go-AheadZ’는 다수의 한국 아티스트들을 라인업에 올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에이위치챤미나와 같은 이들이 이미 다녀가기도 했으며, 역대급으로 일본 아티스트의 내한이 활발한 시점이기에 앞으로 그 방문 빈도수는 더욱 커지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서로의 시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 중인 상황. 과연 앞으로 일본 힙합의 부상은 열도의 메인스트림에 어떠한 충격파를 일으킬까. 더불어 양국의 교류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갈까. 새로이 그려질 지형도가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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