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약, 법정에 가면 어떻게 될까?
모든 분석은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며, 법률적 해석의 재미를 위해 가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내가 요즘 추억의 드라마를 다시 돌려보는지, 거실에서 낯익은 배경음악이 들려오곤 합니다. 무심코 함께 보다 보니, 변호사인 제 눈길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소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20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등장하는 '연애 계약서'입니다.
5천만 원의 채무 관계를 담보로 한 아슬아슬한 '가짜 연애' 약속. 아내는 두 주인공의 로맨스에 다시금 설레는 듯했지만, 제 머릿속은 온통 '이 계약서, 법정에 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직업적인 호기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제 로펌의 문을 두드렸다면, 저는 이 계약서를 어떻게 수정했을까요?
드라마 속 달콤한 로맨스는 잠시 잊고, 얼음처럼 차가운 법률가의 시선으로 이들의 계약서를 조목조목 해부해 보겠습니다.
먼저 문제의 계약서 조항들을 한 줄 한 줄 뜯어보겠습니다.
제1조: 현진헌과 김삼순은 자발적인 합의하에 2005년 12월 31일까지 연애하는 척을 한다.
계약의 가장 기본은 '당사자 간의 합의(의사의 합치)'입니다. 이 조항은 "자발적 합의"를 명시하고, 계약의 목적("연애하는 척")과 기간("2005년 12월 31일까지")을 특정했으므로 일단 계약의 외형은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목적에 있습니다. '연애하는 척'이란, 결국 현진헌의 어머니 등 제3자를 속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망 행위'를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민법 제103조가 규정하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법원은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에 반하는 내용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2조: 현진헌은 김삼순에게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 조항은 김삼순에게도 해당된다. 단, 이 계약 이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서로 동의함.
신체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을 명문화한 조항입니다. 상대방의 동의 없는 신체 접촉을 금지하는 것은 당연하며, 법적으로도 보호받는 권리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단서 조항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는 표현은 법률적으로 매우 불명확하고 추상적입니다. 무엇이 '어쩔 수 없는 경우'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어, 향후 분쟁 발생 시 이 조항을 근거로 권리를 주장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처럼 해석의 여지가 넓은 용어는 계약서에서 가장 피해야 할 표현 중 하나입니다.
제3조: 연애하는 척은 하되, 연애는 하지 않는다. 절대로.
법률가로서 볼 때, 이 계약서에서 가장 무효에 가까운 조항입니다. '연애'라는 감정은 법률로 강제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법원은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의무를 부과할 수도,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이행 자체가 불가능한 '원시적 불능'에 해당하며, 개인의 내심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그 자체로 효력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굳은 다짐일지는 몰라도, 법적인 구속력은 전혀 없는 선언적 문구에 불과합니다.
제4조: 양다리를 걸치지 않는다. 맞선도 안됨.
이는 계약의 목적물인 '가짜 연애'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일종의 '성실의무' 조항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헌법이 보장하는 사생활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소지가 큽니다. 계약을 이유로 개인의 교제나 결혼 상대를 만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민법 제103조의 사회질서 위반에 해당하여 무효로 판단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제5조: 위 조항을 어길 경우 계약은 자연 파기 된다. 그 책임이 김삼순에게 있을 시 오천만원을 당장 상환하고, 현진헌에게 있을 시 오천만원을 깨끗하게 탕감해준다.
드디어 이 계약의 핵심, 위약벌(Penalty) 조항이 등장했습니다. 5천만 원이라는 구체적인 금액이 오가는 이 조항 덕분에 앞선 비법률적인 조항들이 마치 법적 강제력을 갖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김삼순의 책임: 계약 위반 시, 기존에 있던 5천만 원 채무의 '기한이익'을 상실하고 즉시 변제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합니다.
현진헌의 책임: 계약 위반 시, 5천만 원 채무를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이 조항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벌칙을 부과하려면 '어떤 조항을 위반했는지'를 법적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앞서 분석했듯, 제3조(연애 금지)나 제4조(양다리 금지)는 그 자체로 무효이거나 위반 여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현진헌이 몰래 선을 봤다는 사실을 김삼순이 알게 되어 "계약 위반이니 5천만 원을 탕감하라!"고 소송을 제기한다면, 법원은 "해당 조항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여 무효이므로, 이를 위반했더라도 채무 탕감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판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계약서는 법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신사협정' 또는 '숙녀협정'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큽니다.
"뭘 이렇게까지??" 싶으시겠지만, 만약 두 사람이 5천만 원이라는 거액이 걸린 이 문제를 들고 제 사무실에 찾아왔다면, 저는 감정과 다짐은 잠시 배제하고 다음과 같이 계약의 성격을 완전히 재구성했을 것입니다.
계약서의 명칭 변경: 연애 계약서 → 업무(연기) 대행 및 금전소비대차 연계 계약서
<수정 계약서 주요 내용>
제1조 (계약의 목적)
본 계약은 '갑'(현진헌)이 '을'(김삼순)에게 빌려준 금 오천만 원(50,000,000원)의 채무(이하 '대상 채무')와 연계하여, '갑'의 사업 및 대외 관계 유지를 위한 특정 역할을 '을'이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용역의 정의 및 범위)
① '을'은 계약 기간 동안 '갑'의 공식적인 파트너로서 아래 각호에 명시된 업무를 수행한다.
1. '갑'이 지정하는 가족 모임 및 공식 석상 월 3회 이내 동행
2. '갑'의 모친(나현숙) 주 1회 이상 대면 및 안부 소통
3. 기타 상호 합의된 대외 활동
② '갑'은 상기 업무 수행을 최소 3일 전까지 '을'에게 서면(문자메시지 포함)으로 요청해야 하며, '을'은 합리적인 사유 없이 이를 거부할 수 없다.
(변호사의 한 마디: '연애하는 척'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동행', '대면' 등 관찰과 입증이 가능한 구체적인 '용역'으로 정의하여 법적 분쟁의 소지를 줄입니다.)
제3조 (비밀유지 및 품위유지 의무)
① '을'과 '갑'은 계약 기간 및 계약 종료 후 3년간 본 계약의 내용과 그로 인해 알게 된 상대방의 개인 정보, 가족 관계 등에 대해 제3자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② '을'과 '갑'은 계약 기간 중 본 계약의 목적(공식 파트너 관계 연기)이 허위 사실임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상호 노력하며, 대외적으로 파트너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언행을 삼간다.
(변호사의 한 마디: '양다리 금지'와 같은 사생활 침해 조항 대신, 계약 목적 달성을 위한 '비밀유지'와 '품위유지' 의무를 부과합니다. 이는 용역 계약에서 통용되는 합리적인 수준의 제한입니다.)
제4조 (계약 위반 및 위약벌)
① 아래 각호의 사유가 발생했을 경우, 귀책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대상 채무액(50,000,000)에 상응하는 위약벌을 지급할 의무를 진다.
1. '을'이 제2조 제2항의 정당한 요청을 계약 기간 내 2회 이상 거부하는 경우
2. '갑'이 '을'의 명시적 동의 없이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시도하여 '을'이 계약 해지를 통보하는 경우
3. 어느 일방이 제3조의 비밀유지 의무를 위반하여 상대방에게 명백한 손해를 입힌 경우
② '을'에게 귀책사유가 발생한 경우, '을'은 대상 채무의 기한이익을 즉시 상실하고 채무 전액을 '갑'에게 변제함으로써 위약벌 지급을 갈음한다.
③ '갑'에게 귀책사유가 발생한 경우, '갑'은 '을'의 대상 채무 전액을 면제함으로써 위약벌 지급을 갈음한다.
(변호사의 한 마디: 감정에 기반한 불명확한 위반 사유를 제거하고, '용역 불이행', '동의 없는 신체 접촉', '비밀 누설' 등 객관적이고 입증 가능한 위반 행위를 위약벌의 발동 조건으로 명시합니다. 이로써 5천만 원의 향방은 법정에서도 다툴 수 있는 명확한 근거를 갖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삭막하게 수정된 계약서에서는 드라마 속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감정선이나 인간적인 매력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법은 차갑고, 논리를 먹고 삽니다. 감정의 영역, 특히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화학작용을 법의 언어로 재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쩌면 무모한 일일지 모릅니다.
결국 현진헌과 김삼순의 계약서는 법적 효력을 떠나,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약속이자, 5천만 원이라는 현실의 무게 위에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해나가는 가장 극적인 장치였을 겁니다. 이처럼 허술하고 비법률적인 계약서야말로,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진짜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인간적인 문서가 아니었을까요?
가끔은 법정의 냉철한 판단보다, 계약서 이면에 숨겨진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한 진실에 다가가는 길임을, 이 낡은 '연애 계약서'가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