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기울어진 운동장의 눈 내리는 풍경

티파니와 하리보젤리

by 우주별
IMG_7957.HEIC

12월의 서울은 입김이 얼어붙는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코엑스(COEX)라는 거대한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계절의 감각은 기묘한 모순에 빠진다.

'정시 대학입학정보박람회'라는 대형 현수막 아래 그곳은 더 이상 차가운 전시장이 아니다. 바깥의 냉기와는 무관하게 타오르는 욕망의 용광로이자, 숨겨진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모한다. 차가운 바깥공기와 뜨거운 내부의 열기, 그 비현실적인 온도 차가 공간을 메우게 된다.


우리 대학은 지방에 위치한 사립대다. 일반 학과의 경우 80퍼센트 이상이 지역 학생들로 채워지지만, 의예과, 치의예과, 약학과 같은 특수 학과는 예외다. 이곳은 전국구,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울의 욕망'이 투사되는 지점이다. 내가 이곳 부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람회장 문이 열리는 순간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마치 거대한 댐의 수문이 열리는 것과 흡사하다. 새벽부터 줄을 서 있던 수백, 수천 명의 인파가 일제히 달려 들어온다.


그들의 동선은 잔인할 만큼 솔직한 욕망의 서열을 그린다.


소위 'SKY'라 불리는 명문대를 향해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면, 그다음 파도는 '서성한', '중경외시'를 거쳐 최근 서열 놀이에 새로이 등판한 마지막 '광명상가' 라인으로 흘러 그 물줄기는 지방으로 흘러간다.

그 거대한 파도타기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 혹은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 승리하지 못했거나 전략적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그제야 우리 대학 부스로 눈길을 돌린다.

정확히는 우리 대학의 간판이 아니라 '의예과', '치의예과', '약학과'라는 세 글자의 학과명을 향해서. 지방대 입학사정관으로서 나는 그 풍경을 보며 안도감과 비애를 동시에 느낀다.

이 특수학과들마저 없었다면, 우리 대학 부스는 이 큰 공간에서 텅 빈 무인도처럼 고립되었을 테니까.

IMG_3535.jpg

오전의 상담은 '대리전(代理戰)' 양상을 띤다. 의자에 앉는 것은 학생이 아니라 대부분 부모들이다.

"아이는요?"라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기숙학원에 갇혀 있죠. 1분 1초가 아까운데 여기 와서 줄 서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정보 싸움은 부모 몫이죠. 그래서 각자 할 일을 하는거에요"

그들은 일종의 용병이자, 고도로 훈련된 정보 요원들이다.

웬만한 신임 입학사정관들은 그들의 정보력 앞에서 식은땀을 흘린다.

그들은 대학별 환산 점수의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꿰뚫고 있다.


그중 한 학부모와의 상담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12월의 실내 난방이 무색할 만큼 두꺼운 모피 코트를 의자에 걸쳐두고 앉았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손목이었다. 얼마 전 결혼기념일 선물로 검색했다가 내 몇 달 치 월급을 웃도는 가격에 조용히 창을 닫았던(여보 미안해^^;), 티파니와 까르띠에의 뱅글들이 층층이 레이어드 되어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자본주의가 연주하는 맑고 경쾌한 타악기 소리 같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 등급이 안 나와요. 00고등학교 아시죠? 공부 잘하는 학교에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역차별 아닌가요? 지방 대학들이 죄다 '지역인재전형'이라고 그쪽 애들만 뽑으니까, 정작 실력 있는 서울 애들이 갈 자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학교 때 애 데리고 지방으로 유학이나 갈 걸 그랬어요. 진짜로."


나는 처음에 그것이 농담인 줄 알고 옅은 미소를 지었으나, 이내 그녀의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남의 최고급 사교육으로 무장된 그녀의 자녀가, 사교육의 불모지에서 공부한 지방 학생들의 쿼터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는 논리. 부와 정보의 독점을 넘어, 이제는 '기회'마저 쇼핑하듯 지방으로 주소지를 옮기는 것을 '전략'으로 말하는 세상. 그녀의 팔목에서 반짝이는 수천만 원어치의 금속들이 순간 서늘하게 느껴졌다.


오후 4시, 전쟁 같던 오전이 지나고 박람회장의 공기가 조금 느슨해질 무렵이었다.

검은색 롱패딩을 입은 한 여학생이 쭈뼛거리며 부스 앞을 서성였다.

문득 '가난은 이자가 붙는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어쩌면 추위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더 가혹한 이자를 매기는 법인지도 모른다.

오전의 학부모가 걸쳤던 모피 코트가 따뜻한 승용차와 난방이 잘 된 공간을 배경으로 얇은 블라우스 위에 걸친 '여유의 장식'이었다면, 이 학생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롱패딩은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마주했을 바깥의 칼바람을 견디기 위한 '생존의 갑옷'처럼 보였다.

얇고 세련된 옷차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부라면, 투박할 정도로 두꺼운 옷을 입게 만드는 것은 결핍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녀의 행색을 보고 우리 대학의 일반 학과 상담일 거라 짐작했다.


의치약 계열을 상담하러 오는 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부의 세습이 만들어낸 특유의 윤기가 그녀에게는 없었으니까.


"저... 의예과 상담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내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이는 가방에서 꼬깃꼬깃해지지 않도록 소중히 다룬 플라스틱 파일철을 꺼냈다. 그 속에는 수능 성적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성적표를 받아 든 순간, 나는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교육 업체들이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쏟아내는 '수능 난이도'의 공포나, 'N수생 유입'에 따른 등급 컷 변동 같은 고급 정보들은 이 아이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아이는 오직 자신의 점수와, '의사가 되고 싶다'는 순진한 희망만을 가지고 이 정글 같은 코엑스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데이터는 냉정했다. 의예과 합격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전년도 입시 결과를 바탕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의예과는 어렵고 치의예과도 예비 번호를 받고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는, 그야말로 벼랑 끝의 점수였다.

하지만 나는 차마 "어렵겠다"는 말을 쉽게 뱉을 수 없었다.


내 앞에는 수백만 원짜리 컨설팅을 받는 대신, 스스로 밑줄을 그어가며 입시 요강을 분석했을 열아홉 살의 고독한 수험생이 앉아 있었다.


오전의 그 화려한 팔찌를 찬 학부모들이 아이 대신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짜는 동안, 이 아이는 홀로 이 거대한 벽 앞에 서 있었다.


엄밀히 말해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는 건 이 학생뿐인데, 왜 세상은 룰을 지키는 사람에게 더 가혹한 것일까. 부모의 정보력과 경제력이 개입된 경쟁을 우리는 과연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상담은 자꾸만 겉돌았다. 나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게 현실을 전달할 단어를 고르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책상 위에 놓인 상담학생에게 주는 하리보 젤리 한 줌을 아이의 손에 쥐여주는 것뿐이었다.


"온 김에 여기 말고 다른 대학 상담도 꼭 받아봐. 변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자세히 물어보고 가."


그것은 입학사정관으로서의 조언이라기보다는, 어른으로서의 무력한 사과에 가까웠다.

내가 주지 못한 희망을, 혹은 나 같은 사람들이 숨겨놓았을지 모를 어떤 요행을 다른 부스에서라도 찾기를 바라는 마음.

아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검은 패딩 뒤로 코엑스의 소음이 다시 밀려들었다.

IMG_3551.jpg

상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함박눈이 코엑스 앞의 번잡한 도로와 조형물 위로 소음 없이 쌓이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나는 문득 그 검은 패딩을 입은 학생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원하는 답을 얻었을까. 아니면 차가운 현실의 벽만 확인하고 돌아갔을까.

티파니 팔찌를 찬 학부모가 따뜻한 자가용 안에서 승리의 전략을 아이와 공유하는 동안, 그 학생은 이 미끄럽고 차가운 눈길을 홀로 밟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을 것이다.


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리지만, 그 눈을 맞는 온도는 누구에게나 같지 않다.

주머니 속의 하리보 젤리 몇 개가 그 아이의 귀갓길에 아주 작은 위로라도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12월의 서울은, 그리고 코엑스는 참 춥고도 서글픈 계절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