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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Nov 11. 2024

채식주의자를 읽고 식물파는 위안을 얻는다.


난, "쟤 병 있는 거 아니야?" 수준으로 기억력이 좋지 못한데, 그래서 책을 빌려서 읽다가 마음에 쏙 들면 무조건 사둔다. 그리고 읽고, 수년이 지난 후 또 읽고, 십여 년이 지난 후 또 읽는다. 집에 책을 쌓아두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픈 습성이다. 본 것을 또 보고 또 보고 하므로, 달달 외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대부분의 책 내용을 다 잊어버린다. 첫 장을 다시 들춰봐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굴하지 않고 계속 읽으면 그제야 이전의 기억이 소환되면서 뒤 내용이 서서히 떠오르는 식이다.

"안 본 눈 삽니다!"

재미있는 작품을 보고 나서 종종 이런 한탄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난 아니다. 서너 번을 읽은 책도 처음 읽는 것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르겠다.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 사서 읽은 <채식주의자>가 집에 있었다.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다시 꺼내보았다.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당시에 다 읽고 나서 오스씨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엔더의 게임>이라는 SF소설이 있어. 그 작품의 성공 이후에 시리즈물이 계속 나왔는데, 주인공 엔더가 자신이 멸종시킨 벌레 행성의 여왕과 함께 정착할 행성을 찾으러 다닌다는 얘기야. 그들은 어느 행성에 가게 돼. 그 행성인들은 죽을 때가 되면 숲으로 가서 나무가 되는 거야. 그 행성의 숲은 조상들의 거대한 묘지, 아니 나무의 형태로 살아있으니 또 다른 삶의 터전인거지. 혹시 영혜는 그 책을 읽지 않았을까? 나도 그 책에서 그 설정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었거든. 갑자기 그 책을 읽고 싶네. 온갖 중고서점을 다 뒤졌는데도 이미 절판돼서 구할 수도 없어. 아, 너무 읽고 싶다."


노벨상 이슈가 생겨서 <채식주의자>를 다시 읽어보았다.

진짜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처음 읽는 양 두근두근 한 장 한 장 넘겨나갔다. 챕터 1 '채식주의자'를 다 읽었을 때, "엥? 이게 끝? 너무 짧잖아. 겨우 이 정도의 내용으로 수상을 했다고? 음, 실망인걸." 했다. 책이 단편집인 줄 알았고, 이어지는 챕터 2 '몽고반점'은 전혀 다른 소설인 줄 알았다. 이미 한 번 읽은 책인 데다, 심지어 좋은 작품이라고 기억하면서도 책 구성까지 까먹을 수 있다고?

그래서 처음 말했던 거다. 나는 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감상을 보게 되었다. 너무 보기 힘들다, 처제랑 형부랑 어떻게, 같은 내용이 있었다. 그제야 내가 책을 다 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책을 잡고, 챕터 3 <나무 불꽃>까지 내리읽었다.

예술혼을 불태우는 형부 이야기가 조금 진행되자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시에도 성과 폭력에 대한 묘사 수위가 높아서 깜짝 놀랐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책이 쓰였을 때는 대한민국 예술계가 폭력에 흠뻑 취해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엽기라는 단어가 최고 유행어였고, 인터넷이란 신생 매체를 통해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표현들이 예술로 승화되고 있었다. 거대 상업 예술 세계에서도 양상은 비슷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 박쥐, 친절한 금자씨 같은 '잔인한 폭력 묘사로 점철된' 영화가 영화계 담론을 휩쓸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를 통과해 온 나에게 <채식주의자>에 묘사된 섹스와 폭력은 읽기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노벨상이란 필터가 끼어져서인지 오히려 그런 묘사가 소설 속에서 모호하게 읽혔던 은유와 상징들이 꽤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가부장적인 월남전 참전용사 아버지부터, 아내를 도구로 생각하는 남편, 성욕을 어떻게든 예술이란 외피로 둘러싸고 싶어 하는 형부까지, 현재 한국 페미니즘의 좋은 땔감 역할을 하는 남자들의 행위도 꽤 흥미롭지만, 처음 읽었을 때나 다시 읽었을 때나 나를 사로잡은 것은 역시 영혜가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는 설정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 꽃으로 피어났다가, 마침내 동물적 대사 행위를 거부하고 나무가 되어 물과 햇빛만을 원하기까지, 영혜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을까.

어서 빨리 내장이 녹아내려, 남김없이 땅에 흡수되어, 어린싹으로 태어나 다시 자라고 싶어 했던 영혜. 큰 나무가 우거진 숲에 가고 싶었던 영혜. 엔더가 도착한 행성의 원주민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그저 사람에서 나무로 조직 체계가 바뀔 뿐이라고 여겼듯이.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듯이. 영혜도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줄 울타리 같은 숲 한가운데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었을까? 웬만한 생채기로는 결코 꺾어낼 수 없는 거목이 되고 싶었을까?


종종 어떤 사람들은 동물보단 식물이 되고 싶어 한다.

새가 되어 나르리.

저 대양의 고래가 되어...

한 마리 고독한 표범처럼 초원을 질주하고...

이런 식으로 동물화를 염원하는 동물파와는 달리, 그냥 어딘가에 툭 하니 떨어져서 그냥 그대로 서 있기를 원하는 식물파가 있다. 채식, 명상, 환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 중에 특히 많다고 주장하면 성급한 일반화일까? 어릴 때부터 동화나 만화 덕에 동물의 의인화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삶이지만, 따지자면 굳이 식물파!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싶은 사람들은 꽤 많을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이미지보다는 고지대에 산다는 구상나무 같은.

비록 선지자 영혜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지만, 차라리 나무였으면... 하고 바라는 세상의 많은 식물파의 마음을 위로하는 작가의 부드러운 손길에 위안을 얻었다고 하면, <채식주의자> 감상문으로는 조금 뜨악~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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