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작품을 소개합니다 05
지난 글에서 <더 글로리>에 나온 55년생 기혼자 게이인 김신태 이사장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얼마 전에 읽은 책 <마이 폴리스맨>이 떠올랐다.
소설은 “동은이에게 아웃팅 협박을 받은 김신태씨가 태어난 5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두 명의 서로 사랑하는 게이와 게이 남편을 둔 불행한 여인의 안타까운 사랑을 전한다.
당시 영국은 “동성애가 사적인 일탈을 넘어 공적인 범죄로서 처벌을 받았”고, 신문 한 귀퉁이에는 체포된 동성애자 명단이 버젓이 실리는 그런 나라였다.
노동계급에서 자라난 경찰관 톰과 박물관에서 일하는 중산계급 출신 패트릭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당시 경찰관은 보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톰은 결국 어릴 때부터 자신을 짝사랑해온 이웃집 소녀 매리언과 결혼한다.
패트릭은 톰을 만나기 전 5년을 사귄 연인을 잃은 경험이 있다.
그는 누군가로부터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자살했다.
동성애자로 낙인찍힌 채 살기보다 죽음이 더 명예로운 시대였다.
그래서 패트릭은 사랑하는 톰의 결혼을 막지 않는다.
결혼은 톰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매리언은 너무나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던 톰과의 결혼으로 행복하지만, 황홀한 기분은 금세 깨어지고 만다.
주변인들에게 들었던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위’가 주는 기쁨을 그녀는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톰이 숨을 멈추더니 마지막으로 한번 더 깊숙이 들어왔고, 나는 너무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이어 그가 내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나는 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숨을 가다듬은 뒤 아주 조용히 물었다.
“괜찮았어?”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울고 있었으니까.
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려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 울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행스러워서, 경이로워서,
그리고 실망스러워서.
그래서 나는 질문을 못 들은 척했고, 그는 내 손에 입을 맞춘 뒤 돌아누워 잠이 들었다."
결혼했어도 패트릭과의 사랑은 계속 유지하고 싶은 톰,
사랑하는 남편의 수상한 움직임에 깊이 절망한 매리언,
결국 매리언은 패트릭을 그들의 삶에서 밀어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소설을 읽으면 누구의 행동도 비난하고 싶지 않아진다.
그냥 동성애를 처벌하는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고통이 느껴질 뿐이다.
영국은 1967년에 동성애자를 처벌하는 법 조항을 삭제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60년 전 영국에서 얼마나 발전한 사회일까.
동성애자를 차별해야 한다고 너무나 당당히 말하는 정치계와 종교계.
퀴어 퍼레이드를 하면 바로 옆에서 혐오 시위를 하고,
그런 행위를 내버려두는 행정부.
서울시는 퀴어문확 축제 측의 광장 사용신청을 받은 지 64일 만에 수리했다. 광장시민위의 권고를 따른 것이다. 6일간 신청했던 사용기간은 단 하루로 줄었다. 아쉬운 결정이었지만 시민위가 그나마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기초로 불허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회의록에 담긴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한 위원이 말했다.
“저 사람들(성소수자)은 다른 세계(나라)에서 하니까 우리도 하겠다고 뛰쳐나온 건데 앞에 ‘서울’이라는 건 뺐으면 좋겠어요. 그냥 그들만의 문화축제…사실 저게 왜 문화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감정적으로, 눈으로 국민 대다수가 피해를 보니 강한 제재가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그는 발언을 쏟아낸 뒤 한마디 덧붙였다.
“이 회의록도 공개되나요?”
(기사 출처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718004008&wlog_tag3=naver)
동성애를 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을 테니 내 눈앞에는 띄지 말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자칭 차별에는 반대하는 사람들’.
그들은 동성애자를 억눌러 무언가 소중한 걸 지키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동성애자끼리 만나서 행복해질 권리를 억압한 대가로 이성애자들이 얻을 것이라곤,
본인도 모르게 인생을 낭비해 버린 ‘매리언들(상대에 따라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 뿐이다.
최근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전국 미혼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연구한 ‘연애와 행복’ 인식보고서를 발표했는데, 미혼남녀의 평균 이성 교제 횟수는 3,9회로 집계됐다고 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통계를 하나 만들어보자.
많은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전체 인구의 5-10% 정도 비율이라고 한다.
최근 미국에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연애 집중 나이인 10대와 20대에서 이 비율은 15~20%까지 올라간다.
그냥 보수적으로 5%로 잡아보자.
그렇다면 이성애자가 4번의 연애를 하는 동안 동성애자를 만날 확률은 어떻게 될까?
동성애자 역시 4번의 연애를 한다고 가정하면,
1에서 0.95의 4제곱을 빼면 0.18549375라는 값이 나온다.
백분율로 하면 18.5%다.
생각보다 확률이 높다!
이성애만 권하는 사회다 보니, 거의 완벽에 가깝게 동성애자 정체성을 자각하고 있던 나조차도 여성과 연애를 해본 적이 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제대로 된 여자를 못 만나서 네가 그럴 수도 있잖아.”
고등학교 시절 남자 좋아한다고 고백하자 친구 녀석이 해준 말이었다.
남중, 남고를 나왔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녀석으로서는 합리적인 이의제기였다.
그래서 대학에 가자마자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가 그 두 명이었다.
둘 모두에게 우리의 연애가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그녀들의 소중한 새내기 시절을 내가 망친 것은 분명하니 미안할 따름이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많은 여성이 ‘잘 꾸미고 다니는 데다가 여자를 음탕한 시선으로 보지 않는, 자신을 덤덤하게 대해서 오히려 더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는 (게이) 남성’에게 끌려 젊음을 탕진하고 있다.
아무리 (사실은 게이인) 남자 친구가 사랑한다고 속삭여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내 남자의 시선에 열정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소설 속 매리언처럼 스스로를 자책하고 매력을 높이기 위해 채찍질해보지만, 그녀의 노력은 결코 보답받을 수 없다.
게이들이 ‘스스로가 게이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이성애자 여성들을 테스트용으로만 쓴다면 그나마 다행일 수도 있다.
이성애자인 척 연애 시장에 나오는 동성애자는 높은 확률로 결혼 시장에도 나온다.
게이와 결혼한 여성은 젊음의 한 때를 낭비하는 게 아니라 인생 전체가 꼬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노인이 된 매리언은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패트릭을 돌보는 것으로 그녀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보상하려 한다.
이는 몇 해 전 영국 정부가 성소수자를 처벌했던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 동성애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람들의 전과를 일괄 삭제하기로 한 결정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영국 사람에게 <마이 폴리스맨>은, “세상에, 60년 전에는 저런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놀라운 과거일 뿐이다.
하지만 2023년, ‘이제는 선진국에 들어선 나라’ 대한민국에서의 성소수자들의 삶을 보면 세상일이란 게 참으로 만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좋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억압에 반대하는 운동이 지지자를 모으기 힘든 이유는, 그 억압이 다 남의 문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구호에 집중하기 힘들다.
또한 수전 손태그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연민보다 필요한 건 내가 연루되었다는 걸 아는 것"이라고 했으니,
“동성애자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참해주세요.”
라는 구호가 먹히지 않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외쳐보는 건 어떨까?
“동성애자에게 속아서 연애하거나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동성애자들끼리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을 같이 만들어갑시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얼마전 내한공연을 가졌던 원디렉션의 스타 해리 스타일스가 경찰관 톰 역을 맡아서 열연했다.
왓챠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