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작품을 소개합니다 04
동성애, 퀴어, 성소수자, 엘라이, 등의 키워드로 검색될 수 있는 소설과 에세이를 틈나는대로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하기 힘든 독립서적들도 포함되어 있으니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댓글로 달아주세요. 아는 만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지난 2월 동성 부부의 배우자도 건강보험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판결이 났다.
기독교 신문들이 일제히 개탄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동성애자들이 손뼉 치고 환호하는 와중에 갑자기 드는 생각.
“그래서 앞으로 뭐가 어떻게 변하는 거야?”
“어... 글쎄... 그다음 이야기가 없었는데... 그러게,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가 궁금해하던 차에,
소송을 승리로 이끈 사람들과 국회의원 등이 모여 <동성 부부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2심 판결 의미와 향후 입법과제 모색 토론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정토론자로 나서는 분 중에는 가족구성권연구소(가족 상황에 따른 차별 해소 및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가족·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단체)의 대표인 김순남씨도 있다.
동성 부부로 정체화하며 살아가다 보니 가족구성권연구소의 근황에 항상 귀를 열어두고 있는데, 바로 그곳에서 발행한 따끈한 신간이다.
한 지붕 퀴어 대가족 여기는 무지개 집입니다
서울의 핫한 동네로 유명한 망원동에는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멋진 5층짜리 다가구주택이 있다.
1인 가구를 위한 방을 포함 총 10가구, 15명의 퀴어, 5명의 고양이가 그 건물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간다.
가족과 이웃에게 ‘친한 형동생, 친한 언니동생’으로 커버링하며 살아야 했던 삶을 끝내고, 24시간 내내 자유와 안전을 느끼며 게이로, 레즈비언으로 살 수 있는 곳.
퀴어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안부를 물으며, 여행 갈 때 반려 고양이를 서로 돌봐주고, 애인과 싸웠을 때 푸념을 털어놓을 친구가 곁에 있다는 장점은 덤이다.
나는 무지개 집이 지어질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 집의 기획자로 알려진 재우형과의 인연 덕분이다.
내가 게이 커뮤니티에 들어왔을 때부터 대략 십 년 동안, 그러니까 오스씨와 사귀면서 탈서울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같이하며 교류하는 사이였는데, 나의 탈서울 이후 연락이 뜸하다가 오랜만에 서울 친구를 통해 형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이러저러해서 친한 친구들과 같이 살 주택을 만들고 있대.”
“그 형은 항상 재미있는 일들을 잘 벌이시네. 친한 게이들끼리 모여 살면 진짜 재미있긴 하겠다.”
“오다기리 조 나온 영화 <메종 드 히미코>의 국내 판이 되는 거지. 상상만 해도 진짜 좋다.”
게이가 모여 사는(나중에 레즈비언 등 다른 퀴어 친구들도 같이했다고 들었다) 다세대주택이라니, 주변 인물 잘 챙기기로 정평이 나 있는 재우형스러운 선택이었다.
언제 한번 놀러 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면서도 다른 일들에 치여 잊고 있다가, 이렇게 책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다정다감한 이웃일 것이 분명한 재우형과 함께 살기,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지만, 무지개 집은 건물 설계 면에서도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다가구주택이지만 입구는 하나다.
그리고 일단 현관을 열고 들어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단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은 익숙한 신발을 보며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에 들어왔다고 느낀다.”
모두의 공용주방이자 회의실인 홍다방이란 거실같은 공간이 1층에 있다.
“홍다방은 10가구가 따로 또 같이 거주하는 무지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공간이다. 여기서 함께 회의하고, 영화 보고, 노래 연습도 한다. 망원동 이웃과 번개 모임을 하는 공간도 여기다. 홍다방이 없다면 10가구가 모여 산다 한들 각자 먹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잠들기 바쁜 삭막한 공동주택이 되었을 것이다.”
방들은 층마다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5가구가 사는 2층은 셰어하우스로, 각자의 방만 개인 공간이고 거실과 부엌, 화장실은 함께 사용한다. 3층 역시 셰어하우스지만 두 커플이 사는 공간으로 계획했다.
현재 3층은 가운데 공용부엌을 중심으로 오른쪽에서 커플, 왼쪽에는 1인 가구가 살고 왼쪽 한편에 게스트룸(쉼터)이 있다. 게스트룸은 위기 성소수자 청소년이나 급히 공간을 필요로 하는 활동가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이다.
4층은 2가구가 분리된 공간에 거주하고, 5층은 한 커플이 단독으로 이용한다.
세탁실은 1, 3, 4층에 있고, 옥상은 6층. 엘리베이터는 없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니... 위층에 사는 커플은 분명 다리 근육이 발달하여 있으리라.
공동생활이니 회의는 필수!
“월 1회 진행하는 2층 거주자 회의의 핵심 주제는 청소 점검과 자기반성”이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사랑하는 연인끼리도 생활 방식이 다르면 힘든데,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안 맞으면 같이 살기 쉽지 않다.
“청소, 소음 예절, 이런 것들(의 기준이 사람마다) 굉장히 다르죠. 꼼꼼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같이 살기 힘들 거예요.”
하지만 이런 자질구레한 역경들을 이겨내면 이 집에서의 공동생활이 주는 진정한 기쁨이 찾아온다.
“재우는 무지개 집에 게이들만 살았으면 어쩔 뻔했느냐고 말한다. 무지개 집을 통해 여성 퀴어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되게 좋은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막내와 최고령이 스무 살 차이가 나니 다양한 에너지가 섞여든다.”
레즈비언 입주자도 생각이 비슷하다.
“여성들만이 모인 공동체가 자동으로 편안함을 주지는 않는다는 걸 느끼면서 단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되는 공간일 때 편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각 구성원이 이전과 다른 내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것, 그 과정에서 훨씬 더 안정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삶이 더욱더 풍요로워진다고 느끼는 것은 성소수자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준다.
무지개 집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삶을 배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입주자들은 느끼고 있다.”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 있고, 함께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옆에 있고, 다양한 퀴어들과 살아가면서 새삼 공존과 존중을 배우고, 스스로 ‘되게 좋은 사람’이 돼가는 기분까지 느끼는 생활이라니, 아~ 부럽다.
MBTI 분류에서 ENFP로 낙점된 사람으로서, 즉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으로써, “관계 빈곤”은 언제나 나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그곳에서 내가 빨아들일 좋은 기운들을 떠올려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거기에 플러스.
“무지개 집 사람들은 함께 밥을 먹고, 고양이를 함께 돌보면서 돌봄의 관계망을 만들어내고, 서로에게 소속감과 삶의 의지처를 제공한다.”
“입주민들끼리 이 집은 '고양이 돌봄공동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관계망이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가구는 셋인데, 집사가 며칠 집을 비워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아랫집 윗집 사람들이 짬을 내 고양이를 돌본다.”
여행을 자주 다녀서 고양이 돌봄비로 많은 금액을 지출하는 우리로서는 군침을 날 정도로 매력적인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구성원마다 삶의 조건과 차이에서 오는 경계선도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를, “같이 살고 싶은 마음 55%, 떠나고 싶은 마음 45%인 관계”라고 하거나,
“어떤 사람은 가족 같고 어떤 사람은 정말 친구, 어떤 사람은 그냥 한 빌딩에 사는 이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가 한뭉치로 어우러질 필요는 없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함께 하는 시간을 거절해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서로 깨달아가면서 변화무쌍한 일상을 기꺼이 조율해간다.”
어쩌면 그런 차이가 오히려 관계를 구체적으로 긍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는 힘일 수도 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원래 차이를 긍정하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
내가 가진 차이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함께 살아봄 직하다고 느끼기 마련이니까.
“인생에서 힘든 순간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조건이다. 관계 속에서 산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대하는 태도나 대접을 통해서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무지개 집은 무엇보다도 ‘누구와 함께 살고 싶습니까?’를 먼저 묻는 집이다. ‘함께 살아가 봄 직한 사람들’을 향한 관계적 소망을 주거를 통해 현실화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도 함께 살아가 봄 직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이성애자 사회에서 자신이 소속될 공간을 찾기 위해 혹독한 투쟁을 해야만 하는 퀴어라면 누구나 꿈꿀 것이다.
주말 게이바에서만이 아니라, 회원제 인터넷 게이 커뮤니티에서만 아니라, 지금 사는 이곳에서 게이로서의 나를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받고, 친구들과 자연스러운 일상을 영위하고 싶다.
책은 무지개 집이 2호, 3호로 확장될 것을 꿈꾸며 마무리된다.
사실 무지개 집이 던진 질문,
“누구와 함께 살고 싶습니까?”
에 대한 내 대답은 딱 정해져 있었다.
“지금 같이 사는 오스씨랑 건강하게 천년만년...”
하지만 오로지 둘만의 힘으로 아름다운 노년의 삶을 꾸리기란 무지개 잡는 일처럼 불가능하리란 걸 안다.
당연한 얘기지만 게이 커플의 삶에도 다정한 이웃은 필요하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차이를 존중해주는 이웃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훨씬 많이 많이 필요하다.
만약 부산에 무지개 집 2호가 만들어질 예정이라면 나는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
“와,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감탄사처럼 내뱉고 책 덮으면 다 잊어버릴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오스씨는 어떻게 생각할까?
조건을 감내해낼 수 있을까?
만약 못한다면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보고 싶다.
정말로 무지개 집 2호 소식을 듣게 되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어쩌면 이 질문들이,
"너 지금 잘살고 있어?"
에 대한 훌륭한 답이 될 수도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