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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Jan 26. 2023

햇빛을 받은 내가 바삭해지면 그만큼 너는 증발한다

퀴어작품을 소개합니다 03

동성애, 퀴어, 성소수자, 엘라이, 등의 키워드로 검색될 수 있는 소설과 에세이를 틈나는대로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하기 힘든 독립서적들도 포함되어 있으니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댓글로 달아주세요. 아는 만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주기적으로 동성애와 문학, 또는 소설을 키워드로 포털사이트나 서점 사이트를 검색하는데 작년 말 박선우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닉네임에도 '선우'가 들어있다.

여기서 잠깐,

브런치를 허락받아 닉네임을 지을 때 이야기를 해보자.

평소 닉네임을 지을 때 아기 이름검색 사이트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쳐보곤 한다.

선우비라는 이름이 문득 떠올라 검색을 해봤더니,     


"선우비" 이름은 2008년부터 ~ 2023년까지 총 2명이 출생신고를 하였습니다.

이중 남성은 총 1명이며, 여성은 총 1명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우비"는 중성적 느낌의 이름입니다.

출생신고 계절은 봄이 제일 많습니다.

여자 이름 순위는 31,166명 중 10,835위입니다

남자 이름 순위는 41,788명 중 17,131위입니다     


한마디로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중성적인 느낌이라는 설명도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엔 우리 시대 사람의 본능대로 이름에 걸맞은 한자를 찾아보았다.

이리저리 조합해서 만든 결과가, 선우비(敾郁斐).

선은 敾글잘쓸선, 우는 郁문채날우, 비는 斐문채날비로,

글잘쓸선이야 다들 아시는 그 의미고,

문채난다는 말은 문장이 멋있다거나 빛이 난다거나 하는 의미로 쓰인다.

글과 관련해 어떻게든 있어 보이려고 발악을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한자가 얻어걸렸다.     


각설하고, 박선우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읽을 책들이 밀려 바로 주문하진 않았는데,

문현동에 아부라소바 맛집이 있다고 해서 갔다가 근처에 있는 ‘나락서점’에 가보기로 했다.

독립서점을 탐방하는 재미의 반은 인테리어 구경이다.

대체로 서점주인의 개성이 카페 못지않게 강하게 배어 있다.

나락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전체적으로 쫘악 훑어봤는데, 어라? 온라인 퀴어퍼레이드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인테리어 지향성이 맘에 드는군.

더 볼 것 없이 인테리어 점수 100점!


독립서점 탐방의 또 다른 재미는 서점주인이 팔 걷어붙이고 큐레이션 해 놓은 책을 구경하는 것이다.

깨알같이 정리한 감상문 쪽지를 몸에 끼운 서점의 대표선수들이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놓여있기 마련이다.

그곳에 박선우 작가의 신간 소설집 『햇빛 기다리기』가 있었다.

어쩜 내 마음을 이리 잘 알꼬.

전시점수도 100점!     


박선우의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내뱉은 감탄사는, 아... 아름답다! 였다.

문장을 '쓴다'가 아니라 '조각한다'가 적당할까?

포토그래퍼의 전시용 도록 같기도 하고, 음영을 잘 쓰는 단편영화의 미장센을 관람하는 느낌도 들었다.

적어두고 싶은 표현들이 너무 많아서 문장을 두 세 번씩 읽기도 했다.

독자를 낚아버리는 문장이 군데군데 바늘처럼 늘어서 있다. 

안 걸릴 도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걸어온 길을 보았다. 입김을 뿜으며 가로등이 비추는 눈길 위의 발자국들을 멀거니 응시했다. 아마도 호프집 입구에서부터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죽 이어져 있을 흔적을, 머지않아 흰 눈으로 뒤덮여 사라질, 다만 한 사람의 궤적이었던 시간을. (「우리 시대의 사랑」 중에서)”    

 

게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 다 내 얘기 같은 느낌이 들곤 하는데, 한국 사회에서 게이로 살면서 마주치는 역경들이 대체로 도긴개긴이라서 일 테다.

앞서 인용한 「우리 시대의 사랑」이라는 작품은 HIV 감염인과 사귀는 게이의 이야기인데,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신호를 주고받자마자 감염인은 자신의 병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초면에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예요. 저도 형이랑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은데, 그래서 뭔가 진지하게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데, 그 모든 과정에 앞서 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형이 저를 원망한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거든요. 다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괜찮다고 말해요. 애써 받아들인 척하죠. 그런데 연락은 점점 뜸해지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시간을 좀 갖자면서 저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드문드문 연락하면서 이 년 가까이 기다렸던 사람도 있었죠. 이제 와 생각해보면 참...... 그렇지만 저는 허수아비가 아니에요. 제가 감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인 관계에서 언제나 약자가 될 수는 없다고요.”


이 부분을 읽고 나서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렸는데, 내 친구 중에도 HIV 감염인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그 친구도 호감 가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저러한 대화를 나눠야만 했을 것이다.

HIV 보균자와 에이즈 감염자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을 것이고,

“친구나 가족도 아니고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단지 연인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가능성 하나 때문에 자신의 내밀한 질환을 털어놓아야 했을” 친구의 곤혹스러운 순간들이 상상됐다.


어쩌면 이러한 연상작용이,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도무지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또는 그가 하는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상상할 수 있게 해주고, 조금은 배려할 수 있게 해주고, 나의 태도를 학습시킨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이 즐겁고 뿌듯하다.

비록 가공의 인물이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웃, 가족, 또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햇빛 기다리기』가 너무 좋아서 곧바로 도서관에서 그의 전작 『우리는 같은 곳에서』도 빌려 읽었다.

역시 아름답고, 약간 슬프고, 단어들을 시처럼 직조한 솜씨에 감탄하고,

특히 이 문장을 읽을 땐 그냥 지려... 아니, 감동했다.

     

“우거진 이파리들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리는 빛. 그 아래에서 두 눈을 감고 있으면 네가 떠오르곤 했다. 아마도 살갗에 내려앉은 온기가 내 안의 물기를 푸근히 데워 증발시키는 감각 탓이었겠지.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바삭해지며 너를 잃었다. 잊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시는 너를 만나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무릎이 툭 꺾일 것만 같았어. 그러니까 그날, 늦여름의 태풍이 짙은 먹구름을 몰고 온 그때처럼, 네가 내 앞에 나타날 일은 더이상 없으리라는 확신이 나를 말라붙게 만들었다. 야위게 했고, 덕분에 내 삶은 옥상 난간에 널어두고 까맣게 잊어버린 솜이불처럼 수척해서..... 누군가의 수거를 기다리는 형태로 남아 있다. 기약 없이, 그 어떤 기대도 없이.(「빛과 물방울의 색」 중에서)”


오스씨를 흔들면서 격정적인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때, 너무 멋지지? 햇빛을 받으면 바삭해지고 그만큼 너가 증발해 버린다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그러게.”

햇빛이라는 단어에 세로토닌 합성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중년 남자들은 삽시간에 촉촉해졌다.

“이런 작가가 돈을 벌어야 해!”

이미 다 읽은 책이지만, 제발 작가가 소처럼 일해주길 바라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전자책을 구매했다.

하루빨리 다음 소설을 맞이할 수 있길 바라며...

선우 작가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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