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브의 'LOVE DIVE'라는 노래를 즐겨 듣고 있다. 곡의 제목을 직역하자면 사랑에 다이빙하다, 빠지다, 뛰어들다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유의하며 듣다가 최근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이 떠올랐다. 바로, 피트 데이비스의 '전념'이다.
사랑에 다이빙한다는 건, 사랑에 전념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전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전념하다(dedicate)의 뜻에는 무언가를 신성하게 하다, 오랫동안 무언가에 헌신하다 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피트 데이비스)는 말한다.
‘전념하기란 곧 신성한 일'이다.
하지만, 전념하기는 '반문화'다. 반문화란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는 문화로, 대중적이기보다는 비주류적이고 마이너한 문화를 뜻한다. 왜 그럴까? 지금 시대의 문화 트렌드가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이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나 공동체, 신념, 기술, 기관, 사람 등에 전념하는 것은 개성과 융통성 그리고 다양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지금 시대의 문화·사회적 트렌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문화 트렌드는 '선택지 열어두기'다. 사람들은 하나의 취미, 직업, 역할, 생각, 연애, 집단, 관계, 기관, 지역에 오랫동안 같은 형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선택지를 끊임없이 탐색하며,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와 여지를 둠으로써 리스크를 피하는 '무한탐색모드'를 즐긴다.
'무한탐색모드' 덕분에 사람들은 특정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부담 없이 이것저것 즐길 수 있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기존의 사회 구조 속에서 구축된 가짜 자아의 옷을 벗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며, 이러한 새로움은 반복되고 지루한 삶에 신선한 공기와 자유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무한탐색모드의 한계 역시 또렷하다. 우선, 무한탐색모드는 특정 시점이 지나면 점점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내 선택보다 항상 더 나은 대안이 있을 거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절대 이룰 수 없는 만족감을 좇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지가 다양해질수록 오히려 결정이 마비되며, 자유가 아닌 허상 속 쾌락의 쳇바퀴를 돌며 자신을 병들게 한다.
또한, 무한탐색모드는 모든 곳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때문에 아무도 내게 막중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뒤르켐'은 이를 '아노미'라고 부르며 이러한 현상이 자살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마지막으로, 무한탐색모드는 한 가지에 오랫동안 몰두할 때만 겪을 수 있는 커다란 기쁨과 감각, 그리고 더 깊이 있는 경험을 놓치게 한다. 인스타그램의 글은 읽은 즉시 머릿속에서 눈 녹듯이 사라지지만, 어떤 분야에 깊이 빠져 미친 듯이 읽었던 그 순간의 텍스트들은 생생하게 각인된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여전히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에 열광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무한탐색모드를 즐기고 있다. 왜나하면 전념하는 것이 어렵고 두렵기 때문이다. 저자(피트 데이비스)는 전념하는 게 어려운 이유를 3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첫 번째는 '후회에 대한 두려움'이다. 후회에 대한 두려움은 선택한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찾아온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선 선택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택한 길이 잘 안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감정의 목소리를 통해서, 롤모델과 공명하는 지점을 통해서, 합리적인 비교·분석을 통해서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전체 여정을 생각하지 않고 한 단계씩 바라보고 전진하는 태도 역시 도움이 된다. 또한,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내 선택이 올바른 것이 되도록 만드는 데 집중하는 태도 역시 필요하다.(156) 이런 식으로 전념을 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적응하게 되고(심리적 면역 체계), 보이지 않았던 사람, 장소, 사건, 관계, 역사 등이 보이면서 가속도가 붙게 된다. 결국 삶의 태도와 정체성 그리고 가치관까지 재설계 되면서, 한계를 수용하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에 사로잡히지도 않으며, 후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하는 목적의식(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목적이 주는 자유는
자유의 허상보다 훨씬 심오하다.
두 번째는 '유대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은 무언가와 깊게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정체성, 평판, 통제감이 위협받을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깊은 유대 관계보다는 언제든지 여지를 남기고 떠날 수 있는 유대 관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이들에게 자아는 고정적이고 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는 역동적이고 유기적이며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다. 무언가와 유대를 형성하면 인간은 기존 정체성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아가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관점을 지니면 그 무언가는 나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체성 형성을 도와주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존 듀이는 '한 사람이 자기만의 개성을 얻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발휘하는 것도 전부 유대를 통해서'라고 말했다. 사회와 자아는 서로 공생한다. 우리가 사회를 형성하고 사회가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다.(180)
평판에 대한 위협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내가 무언가에 전념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의 결함까지 모두 옹호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상과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데 거부감을 보이고,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추상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견지한다. 하지만 이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호하고 보편적인 것보다 매력점이 분명한 사람에게 마음이 끌린다. 전념한다는 것은 좋은 것에도 나쁜 것에도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통제감에 대한 위협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동체로부터 내 시간, 에너지, 의사결정 등이 통제받고, 지나친 질서를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노출해야 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이 유대의 취약점이다. 하지만 공동체와 유대를 맺고 헌신할 때, 공동체 고유의 문화와 기준을 이행할 때, 공동체는 당신에게 영웅이 될 기회를 제공하며, 더 큰 차원의 변화를 가능케 도와준다. 연대란 나보다 더 큰 무언가에 헌신할 때, 반대로 나도 그 무언가의 헌신을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196)
혼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주는 기쁨과
정신없고 비효율적이고 쾌적하지 않지만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기쁨은 비교할 수 없다.
전념하기가 어려운 마지막 이유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여기서 고립은 FOMO 증후군을 뜻한다. *FOMO 증후군이란 다른 사람은 모두 누리는 좋은 기회를 자신은 놓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롭고 흥미로운 기회들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새로움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만성적 포모가 찾아온다. 새로운 경험이 주는 보상은 줄어들고, 즐거움은 지루함으로 굳어진다. 반면에 전념은 지루하게 시작하지만 점점 더 새롭고 흥미로워진다. 왜냐하면 깊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깊이는 초능력이다. 새로운 경험이 주는 즉각적 즐거움보다 깊이가 가진 힘이 더 크다. 깊이 파고들면 통제력을 얻을 수 있고, 세계를 들어 올릴 만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축적된 깊이만큼 전문성과 내공이 쌓이기 때문이다. 또한, 깊이는 차원이 다른 기쁨을 준다. 사실 우리가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가장 평범한 것일 때가 많다. 오랜 시간 쌓아온 친밀함의 깊이 덕분이다. 이처럼 깊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가를 발휘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알아차리게 해준다. 미묘한 변화까지도. 그래서 깊이가 곧 궁극적인 새로움인 것이다.(224)
깊이는 대개 새로움을 이긴다
①후회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고 사명과 목적을 찾으면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찾는다.
②유대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고 연대를 형성하면 더 큰 공동체와의 관계를 찾는다.
③깊이가 주는 즐거움으로 고립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면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찾는다.
결국 전념하기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전념한다는 것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는 시간을 들이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이 문화는 즉각성과 중립성 그리고 발전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념하기 반문화의 경제는 자본 논리를 거부하고 고유한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도덕에 있어서는 특정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을 부여함으로써 명예 문화를 조성하며, 교육에 있어서는 의무와 존경 그리고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하지만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는 고유성과 명예 그리고 애착 형성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유성을 도려내고 규격에 맞도록 일반화(프랜차이즈화) 시키며, 도덕의 중립성을 통해 특정 공동체에서 주어지는 명예 문화를 소멸시킨다. 마지막으로 의무와 존경, 애착을 형성시키는 교육 대신 개인적인 발전을 위한 교육을 주입시킨다.(275)
따라서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는 마치 홍수처럼 느껴진다. 자아감도 잃어버리고, 뿌리가 뽑히고, 과거와 역사 및 이웃과 동료들과 연결되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때문에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 것 같은 느낌을 얻기 위해 수천 가지 하위문화들에 들어가 자아 정체성을 부풀린다. 물론 이러한 문화들이 장기적으로 실질적인 헌신과 공동체가 더해지면 건강한 기능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파괴와 무관심, 유기와 부패, 혼란과 외로움이라는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295)
그래서 전념하기 반문화를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전념하기 반문화는 다시 숲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천천히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관계를 심는다. 그렇게 자신을 바꾸고 사회를 바꾼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불안해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좀 더 영구적이고 의미 있고 진중한 무언가에,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갈망이 있고 그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념하는 삶은 편하다. 선택이 쉽다. 지도가 있고 지침이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무한탐색모드가 즐비한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라고 명명했다. 기존의 전통과 의무, 방식, 라이프스타일, 직업, 활동, 역할 등은 모두 녹아 없어졌다. 대신에 온갖 새로운 변화에 맞춰 새로운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유연성과 변화와 불확실성에 대응할 수 있는 것만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긱 워커, 디지털 노마드, 결혼시장, 스트리밍, 밀키트, 공유오피스 등의 개념들은 모두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에 따른 액체 근대의 현상들이다. 액체 근대는 전념을 허용하지 않는다. 쉽게 접근하고 빠질 수 있는, 느슨한 유대와 얕아진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결혼이 늦는 이유 중 하나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폭이 넓고, 잠재적 연인으로 고려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졌기에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게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사회 구조와도 맞물려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다가온 액체 근대를 부정할 수만은 없다. 어느 지점까지는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와 무한탐색모드를 긍정하며 누려야 한다. 전 시대가 남긴 악폐습들로부터 벗어나고 탈구속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의 사람들은 비자발적 헌신에 얽매여 있었다. 삶은 어느 정도 이미 결정됐고, 자유는 한정적이며,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그런 방식은 필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를 위한 투쟁과 문명 및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무한한 선택지가 주어졌다. 기회, 의사결정, 새로운 경험, 생활방식 등의 선택지가 증가했고 사람들은 비자발적 헌신에서 비로소 해방됐다. 자유의 미덕을 긍정으로 여겼고, 자유를 옹호하는 메시지의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72)
따라서 비자발적 헌신의 문화와 시대에서 벗어나 선택지 열어두기 문화와 무한탐색모드를 향유하는 것은 필연 순차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 역시 어느 순간까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전념에 대한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그것은 비자발적 헌신이 아닌 ‘자발적 헌신’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우리 정체성의 절반밖에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을 채우는 것은 헌신이다. 사실 사람들은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속박에서 벗어난 후, 무언가에 헌신하기를 원한다. 전념하기를 원한다.(75)
결론적으로, 저자는 비자발적으로 묶여 있던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자발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전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액체 사회 속에서 액체 인간으로 산다면 그 어떤 자유도, 기쁨도, 깊이도 얻지 못할 것이다. 분리와 융합, 용해와 응고, 해체와 조립 같은 해방과 헌신의 사이클을 가동할 수 있는 영역을 각자의 삶에서 감각하고 그것에 전념할 때, 비로소 유동적인 사회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나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단단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평] 전념 / 피트 데이비스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