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나는 늘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사실 책 읽기가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읽고 싶어서 읽었고 때론 필요해서 읽었으며 이따금은 절체절명의 순간처럼 아주 절박했기에 그저 읽어 나갔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독서는 어떠했을까? 나와 비슷할까?
가끔 궁금해서 질문을 해보지만, 이제까지 읽은 책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는 건 어쩌면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는 느낌이기에 그런 질문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럴 때면 책의 소재와 약간의 거리를 둔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책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비록 피상적인 껍데기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기에 나는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온다.
마치 숙명처럼.
열 살 무렵부터 나에게 책은 보물상자였다.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지켜보게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나만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만화책에서 동화책에서 판타지 소설에서 무협소설에서 때론 위인전과 고전에서 나는 내 마음속의 이끌림을 따라 줄타기하듯 책 읽기를 이어갔다. 하굣길이면 내 발은 저절로 동네서점 안으로 미끄러져지듯 들어가 있었다. 용돈이 조금이라도 모였다 싶으면 읽고 싶던 책을 냉큼 사서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책을 읽어나갔다. 마냥 재미있어서 산책하듯 책방 서가 사이사이를 구경하던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만나고, 헬렌 켈러를 만나고, 모모를 만나고 그리고 데미안을 만났다.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잘 읽는 아이는 아니었던 탓인지 소설책을 읽을 때면 자주 읽고 있던 줄을 시야에서 놓치기도 했고, 주인공과 등장인물 이름을 읽던 도중 잊어버려 수시로 책장 앞뒤를 뒤적거려야 했다. 수업시간에는 읽을 때마다 헷갈리던 국어시험 문제를 여러 번 고심하여 성심성의껏 풀면 더욱더 미로에 빠져서 반토막도 안 되는 점수를 받곤 했다. 국어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도덕 과목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면 부모님은 으레 생각을 너무 깊게 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정말 그랬을까?
책 읽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덕에 삼십 년의 시간이 흘러 나는 나름의 답을 찾았다.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를 읽으며 사람의 뇌는 원래 책 읽기에 적합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짐 퀵의 <마지막 몰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의 뇌는 읽기에 비효율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기도 했다.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나의 어려움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적잖이 위로가 되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내게 잔잔한 안도감을 주었다.
책 읽기는 늘 어려웠고, 초등학교 시절 가장 난해했던 과목도 국어였지만 놀라우리만치 신기한 것은 나는 책 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리도 답답하게 느끼는 책 읽기를 나는 지속했던 걸까? 아무리 읽어도 기억나지 않고 휘발되는 그 무수한 반복을 겪으면서도 나는 왜 계속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과정은 어려웠지만 나는 늘 호기심에서 책 읽기를 시작했었고 읽다 보면 또 책마다 각양각색의 재미가 있었다.
재미있어서. 그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때론 불편함이 행복이 되듯이 나는 우여곡절을 벗 삼아 그렇게 나만의 책 읽기를 만들어왔다. 재미있기만 하다면 그것이 책을 읽는 충분한 요건이 되지 않을까.
금세 잊힌다 할지라도 사유할 수 있는 책 읽기는 나에게 청소년기를 버텨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고 그렇게 책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삶이 고단할 때, 그 누구에게 말 못 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읽고, 싶은 책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십 대, 삼십 대를 지나 사십 대의 초입에 다시 책을 들여다본다. 오랜 친구를 만나듯이 책 속을 거닐며 반가운 책들에게 눈인사를 한다.
뇌의 신경가소성을 믿는 나는 오늘도 새로운 독서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