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과 친구 가능, 평서문.

지구감상일지: 프로젝트 헤일메리

by 선연


어렸을 적을 떠올려 보자면, 나는 놀이공원 가기 전날 밤 설레어 잠 못 자는 타입이었다. 내일 펼쳐질 모험과 환상의 나라를 마구 상상하며 설레어하는 타입.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이 되어가며 그런 설렘 다신 느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러 가기 전날 밤의 나는 다음날 놀이공원 현장체험학습을 앞둔 초등학교 2학년 아이처럼 설레어 잠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돌아온 지금.

전날 밤의 감각보다도 설렘으로 완충된 상태이다.


원작을 읽을 때 머릿속 내 상상을 스크린 안에 충실히 구현해 둔 영화.

소설을 모르는 사람도 이들의 우정을 친절히 느낄 수 있는 영화.

영화를 보고 나오면, 행복, 행복, 행복! 이란 말을 외치게 되는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영화 후기다.




SF 버디 영화이기 전에,
SF 영화로써 최선을 다 한 영화.


나는 원작을 '로키가 그레이스의 우주선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읽고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를 관람한 후 전부 책을 완독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책과 영화 중 순서를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면,

꼭 나와 비슷한 섹션까지 읽은 뒤 영화관에 들어가시는 것을 추천한다.


책의 1/3 정도는 영화에서 사용되는 과학적 개념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개념적 설명은 책의 앞단에 힘주어 설명된다(내가 읽은 파트까지).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독자가 이를 이해해야 스토리 또한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그래서인지 책은 구체적이고,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함량이 높은 편이다. 책이란 독자가 해당 구간을 이해하기 위해 원 없이 시간을 소모할 수 있는 매체이니까.



반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관객인 내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도, 넷플릭스 되돌아가기를 누르는 것처럼 좌측 탭을 2번 터치하여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친절하다. 다만 원작을 읽은 내가 억울하지 않게끔 친절하다. 영화가 선사하는 시각적 비주얼과 배우 특유의 재치에 넋 놓고 있다 보면, 영화에 필요한 SF적 개념에 대하여 이미 이해 완료한 상태일 것이다.




출처: 소니 픽쳐스
출처: 소니 픽쳐스


책을 읽다 보면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문장이 나를 덜컥 본인의 소설 속으로 끌고 갈 때.


책을 주체할 수 없이 읽게 되고, 막힘이 없어지고, 등장인물이 내 머릿속으로 튀어나와 대본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진짜 자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연상되고, 그들 뒤에 놓인 풍경이 그려지고, 목소리가 구현되고, 눈 감았다 떠 보니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눈코 뜰 새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으며 나는 멍하니 여운에 젖어 허공만을 바라보게 되는. 그럴 때.


그 상상이 구현되어 있다. 고스란히.

왜 IMAX 역대 최장 비율로 제작된 것인지에 대하여 영화는 빠짐없이 어필한다.

그 점만으로도 모두에게 최선을 다한 영화다.







대우주적
돌덩이와 지구인의 우정


*여기서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크게 존재합니다.
꼭!!!!!!!!!
영화를 보고 읽어주세요.
출처: 소니 픽처스



그레이스는 동료를 잃었다. 기억도 잃었다. 혼자인 채로 기억까지 잃은 거다. 그것도 우주 한복판에서! 본인이 왜 여기에 왔는지조차 모르고 헤맬 때, 기적처럼 로키를 만났다. 지적이고, 유능하고, 사회적 생명체를.


그 시점부터 그레이스와 로키의 우정 스토리가 시작된다. 로키의 행성 또한 아스트로파지로 인해 모두가 죽게 될 위기에 놓였다. 그래서 승조원들과 함께 우주로 나섰지만, 방사능의 여파로 인해 로키를 제외 전부 사망했다. 혼자가 된 이방인(이방왹?) 둘.


같은 아픔을 가진 개인이란 하나의 집단이 되기 쉽다. 둘은 그레이스의 함선에서 지내며 많은 일들을 해낸다. 타우세티에서는 아스트로파지가 활개 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과감히 행동으로 옮기는 열정도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서 우주선의 연료가 타우세티로 탈출한다. 그 관성으로 인해 연료 탱크가 휘어버리고 만다. 한마디로 우주선이 외지의 행성으로 추락하여 둘 다 죽어버리기 일보직전의 상황이 된 셈. 그레이스가 다급히 수습하려 했으나, 중력이 그를 깔아뭉개어 짓눌려버린다. 그렇게 원심 분리기 하나를 켜지 못한 채로 기절한다.



그리고 그런 그레이스를

로키가 살려낸다.



로키는 나를 구하고 내 구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죽어가고 있다! 로키는 몸을 떤다. 몸통 아래쪽 다리가 꺾인다. "지구를.... 구해.... 에리드를.... 구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더니 푹 고꾸라진다.

...

"미안해." 내가 다시 말한다.
"미안해하지 마. 나를 여기 넣었을 때 네가 나를 구함. 감사, 감사, 감사."



그레이스와 로키는 서로의 대기층이 다르다. 살아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다르다. 서로가 살아남기에 한쪽은 너무 뜨겁고, 한쪽은 너무 차갑다. 그래서 로키는 그레이스 우주선 전용 '공' 안에서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레이스를 위하여 그 알을 깨고 나온다. 그렇게 나머지 원심 분리기 스위치를 킨다.


아스트로파지, 타우메바, 지구, 에리디언...

전부 상관없이


오로지 그레이스를 살리기 위하여.


살아난 그레이스는 로키의 곁을 지킨다. 잠이라곤 혼자 자야 하는 지구인은 온데간데없고 로키의 곁에서 잠을 청한다. 얘가 깨어나면 기뻐할 연구 소식을 하루하루 쌓아 나간다. 그렇게 로키를 기다린다. 유일한 친구이자, 유일한 동료이자, 유일한 벗을.


그렇게 지구를 구한다. 에리드도 구한다. 로키의 말대로.


지구에서 쏘아 올린 헤일메리 패스가

우주에서 쏘아 올린 또 다른 헤일메리 패스에게로 날아가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어준 것이다.







지구의 비겁한 겁쟁이,
돌덩이 하나를 위하여 우주로 되돌아가다.

출처: 소니 픽처스
아.
그래.
그런 거구나.
...
나는 겁쟁이다.

내가 인류를 구원할 최고의 희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지는 꽤 됐다. 나는 그냥 코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나는 이 사실을 꽤 오래전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겁쟁이였다는 건 몰랐다.


사실 지구에서의 그레이스는 영웅이 아니었다. 소위 '루저'였다. 학계에서 본인의 주장을 펼치다 퇴출당하고, 전도유망한 일을 때려치운 다음 중학교 교사로 전전하며 살아가는 루저. 가족도 없고, 연인도 없으며, 부양할 강아지도 없는. 쓸쓸히 외톨이 루저.


본인이 우주로 향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겁쟁이 그레이스는, 선장 야오에게 물었다.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는데. 대단해요. 그런 용기는 타고나는 거겠죠?

그러자 돌아온 대답.


아뇨. 용기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 마음으로도 충분한 거예요.

(명확한 워딩은 아니나 이런 뉘앙스였다.)



기억을 잃었던 그레이스는 야오의 말을 떠올리고 화이트보드에 적는다. '나는 누구를 위해 죽으러 우주에 왔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우주행 편도 티켓을 끊은 것인가. 나의 이 사명감의 원천. 대의의 근거.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살리고픈 대상. 그게 지구 속 누구일까. 그걸 까먹어버린 그레이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그 답을 찾는다. 그 존재는 지구에 없었다.



블립A에 있었다.

바로 바위투성이 '로키'였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하여 우주로 뛰어든 줄 알았던 그레이스.


사실 그딴 거 아니고 강제로 태워져 지구를 구해야 하는 임무에 놓였음을 알게 된 겁쟁이 그레이스.

로키가 귀환 가능할 정도의 연료를 준다 말했을 때, 기뻐서 '포옹 인사'까지 알려주던 그레이스.

사실상 자살 임무를 맡은 당신이 대단하다며 그럴 용기 따윈 없다 말하던 그레이스.


그런 그레이스는,

로키를 구하기 위하여 다시 우주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죽으러 가기 위해 우주선을 돌렸다.


아주아주 용기 있게.

(이번엔 자발적으로!)




Amazon MGM Studios



그레이스는 그저 돌아갈 구석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키고픈 존재가 없었을 뿐.


그레이스는 그 구석을 찾았다.

광활하디 광활한 우주에서.


그렇게 로키만의 '내가 본 지구인 중에 가장 용기 있는 지구인'이 되었다.


그 무렵의 그레이스는 야오의 말을 이해했으리라.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죽음을 감수할 용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Amazon MGM Studios


이처럼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각자의 누군가들을 떠나보낸 둘이,

서로의 누군가가 되어 주는 영화였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임을 일깨워주는 영화.


SF라 장황한 지식을 늘어 놓지 않았다. 매순간 엄청난 CG와 그래픽으로 승부 보지 않았다. 지구인과 외계인이 만나,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 서로 다른 생명체가 만나 이루어지는 따듯한 변화를 담아냈다.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따듯한 마음에 집중하여 이야기가 전개되는 참으로 친절한 영화였다.

지금까지 따듯한 SF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후기, 평서문.



P.S

나였다면 peanut butter 란 단어는 지워버리고, Fuck u 라고 써 스트라트에게 타우메바를 보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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