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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영 Jun 21. 2023

데이트 폭력을 목격하다(1)

한산한 공원 주차장에서(1)



 한 여름 못지않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6월의 주말이었다.

딸 둘은 이제 시시한 주말 나들이 따위엔 흥이 동하지 않아 집에 있겠다고 하기에 막둥이 아들만 데리고 시외 공원으로 갔다.

지구가 병든 지는 오래되었지만 최근 들어 기상이변에 관한 소식이 많이 들린다. 6월인데도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공원 주차장도 한산했다. 높은 기온에 막둥이가 더위 먹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나와는 달리 오랜만에 고카트를 탈 생각에 남편은 한껏 들떠있었다.


 쿠팡에서 로켓배송으로 시킨 싸구려 원터치 텐트는 나 혼자서도 거뜬히 펴고 접을 수 있을 만큼 간편하다. 내가 텐트를 치는 사이 남편은 차에서 고카트를 내리고 막둥이와의 드라이브를 준비했다.  

두 남자를 태운 고카트가 저 멀리 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좇다가 책으로 시선을 돌려 오랜만에 야외에서 독서를 했다. 하지만 폭염과 자꾸 텐트를 침범하는 작은 벌레들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10여분이 흘렀을까? 고구마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두 남자가 돌아왔다. 얼음물을 손수건에 적셔 막둥이의 얼굴을 닦아주며 열을 식혀주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데 거리 탓인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집중해 겨우 알아들었을 즈음에 그 소리는 멈추었다. 하지만 분명히 외치고 있었다.




사. 람. 살. 려.!!




 마침 통화 중이라 사태 파악을 못한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가 듣기로는 소리가 아주 아득하고 멀리서 들려왔기 때문에 우리가 있던 곳에서 20미터 이상 떨어진 언덕 위 도로 건너편에서 소란이 났다고 생각했다.


“여보!! 저 멀리 도로 건너편에서 난 것 같아. 소리가 엄청 멀었어. “


 하지만 도로를 향해가던 남편은 우리 차 바로 옆 승용차 내부를 기웃거렸고 곧이어 여자가 하나 튀어나왔다. 여자의 모습을 본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 한 순간에 더위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비틀거리며 겨우 나무 그늘로 피신해 주저앉았다. 화려한 집게핀으로 틀어 올린 머리는 다 헝클어져있었고 코와 입 주변은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지난주 남편과 <범죄도시 3>도 보고 왔는데 실제로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보니 영화 속의 칼부림과 살인은 아무것도 아닌 듯 공포로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여자는 발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핸드폰을 쥐더니 경찰에 신고를 했다. 남편은 “괜찮으시냐” 물었고, 여자는 이제 괜찮다,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물이라도 한 잔 건네고 싶었지만 마땅히 덜어줄 컵도 없어서 안절부절 마음이 불편했다.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남편과 이게 무슨 일이냐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냥 둬도 될까? “

“티슈라도 가져다 드릴까? “

“경찰이 오면 그래도 현장을 봐야 하니 피는 안 닦는 게 좋을 것 같아. “

“남자 완전 쓰레기네. 여자를 어떻게 저렇게 때려? 차 안에서? 미쳤어 정말. ”


이런 걱정이 담긴 대화를 주고받았다.

폭행을 휘두른 남자는 무얼 하는지 차를 빼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곧 경찰이 올 텐데 뭐가 당당해서 저러고 있는 거지?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딘 걸까. 이곳은 한적한 강변이고 근처에는 민가가 없어 경찰이 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남자가 움직인다. 차 뒷좌석 문을 열어 이것저것 살피는 모양새다. 뭘 하는 걸까? 남자가 차 문을 닫는다. 이번엔 조수석 자리 문을 연다. 또 몸을 숙이고 혼잣말을 하더니 문을 쾅 닫았다. 우리 차에 가려 잠시 남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뭘까, 하는 사이 금방 다시 모습이 보인다.

세상에, 긴 우산을 들고 왔다. 여자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우산으로 여자를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한다. 여자는 기겁을 하고 성치 않은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있는 힘을 향해 우리 쪽으로 왔다. 여자가 “가까이 오지 마!” 하고 소리치니 남자는 이내 차로 돌아갔다.

정말 미친놈이다. 공원에 사람이 아무리 얼마 없다 해도 차 네댓 대에 다들 의자 하나씩 꺼내 앉아 상황을 보고 있는데 우산까지 들고 나와서 폭행할 생각인가?

복잡한 심경은 나보다 남편이다. 나중에 들으니, 혼자였으면 어떻게든 몸빵(?)을 하겠는데 이놈의 처자식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고 한다.



10여분이 흘러 경찰차와 곧이어 구급차도 도착했다. 경찰은 먼저 여자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남자 쪽으로 가서 조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구급대원들은 여자 얼굴에 상처를 살피고 신속하게 응급처치를 했다. 눈치 없는 막둥이는 “와! 엄마!! 경탈타랑 구굽타가 왔떠!! 오!!! 머찌네!!” 하며 신이 났는데 내가 다 민망했다.  구경꾼 티를 내면 몰지각해 보일까 봐 남편과 애써 어떤 이야기들을 나눈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해서 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경찰이 돌아와서 무슨 얘길 하는지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경찰은 남자를 먼저 돌려보낸 뒤, 여자를 태워 그곳을 떠났다. 주변에 차편도 없는 곳이라 시내까지 태워다 준다고 했다. 여자는 퉁퉁부은 얼굴로 경찰차에 타기 전 우리 쪽을 향해, 정확히는 남편에게 감사하다며 살짝 목례를 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긴장했고 폭행을 휘두른 남자를 비난했고 맞은 여자에게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에 영혼까지 피로감을 느꼈다. 그만 집에 가자며 다시 고카트를 싣고 텐트를 접었다. 집으로 가는 길, 막둥이는 금세 잠이 들어 차 안은 낮은 음악소리만 감돌았다.




“사모님 말씀 잘 들었고, 남편분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로 시작하던 경찰관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우리는 더 이상 그 어떤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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