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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연장 신경다양인 접근성은
어떨까?

휠체어 접근성만 접근성 아니다! 신경다양인 접근성은 어떻게 보장할까?

by 선율


신경다양인 특파원 선율입니다. 지난 8월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세계적 공연예술 행사인 프린지Fringe 축제에 업계 새싹(?)으로 참가했어요. 영국의 공연예술계에서는 신경다양인 접근성을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지 전해드립니다.


공연예술, 방송미디어에서 "접근성"을 떠올리면 많이들 신체장애인의 접근성을 떠올린다.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휠체어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듯하다. 문제는 "접근성 = 때때로 휠체어석 운영" 처럼 이해되기도 하는 점이다. "휠체어석이 존재하니 접근성 보장 완료!"하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혹은 수어 통역,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이나 공연 전에 배우들과 무대소품을 만져 볼 수 있는 터치 투어, 휠체어석과 동반인석을 상시 운영하거나 시야가 잘 트인 곳에 배치하는 등, 더 폭넓게 접근하는 프로덕션/공연장도 많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신경다양인의 접근성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지난 8월 에든버러에서 열린 2024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Fringe Festival에 다녀왔다. 저연차 예술 사무직 종사자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어서 티켓 및 숙박 예산, 멘토링, 각종 이벤트 초대장까지 지원 받아 마음껏 공연예술계 현황을 탐색하고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무용, 어린이 공연, 연극 분야의 접근성에 초점을 두고 공연과 세미나를 찾아다녔다. 공연예술계는 다른 업계보다는 접근성과 다양성에 훨씬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장애 접근성 및 장애인의 시각과 경험을 녹여 만든 장애 예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스코틀랜드/잉글랜드 단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에서 관람한 28개 공연, 영국 생활 중 실황이나 현장에서 접한 그 외 공연들, 관련 주제에 관한 세미나/강연에서 접한 접근성 조치를 소개한다.




1. 릴랙스드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


릴랙스드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는 공연의 규칙들을 좀 덜 빡빡하게 운영한다는 뜻이다. 크고 작은 공연장/프로덕션에서 두루두루 운영하는 접근성 조치다. 관람권을 살 때 어느 날이 릴랙스드 퍼포먼스인지 미리 확인할 수 있다. 공연만이 아니라 세미나나 강연 등 행사에 적용하기도 한다. '이러이러한 것이 갖춰져야만 릴랙스드 퍼포먼스다'라는 엄격한 지침은 없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운영한다. 릴랙스드 퍼포먼스일 때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조치는 다음과 같다.


보통 공연 중 객석은 캄캄 하게 암전시키지만

=> 불을 좀 켜 둔다.

보통 공연 중 객석 출입문은 암전을 유지하고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통제되지만

=> 중간에 입장 퇴장 할 수 있다.

보통 공연 중 조용히, 제자리에 앉아, 휴대폰 등 쓰지 않는 등 예의를 지켜야 한다

=> (타인을 고려하면서) 돌아다니거나 서있을 수 있다.

공연 중 극적 효과를 위해 소리 음량이 커지거나, 조명이 번쩍번쩍 하는 부분

=> 볼륨도 덜 높이고 조명 변화도 차분하게 한다.


암전하지 않으면 갑자기 불빛이 바뀌는 것에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며, 다양한 이유로 객석을 뜨고 싶은 사람이 넘어지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된다. 휴대 기기를 쓰고 싶으면 써도 되고, 틱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소리나 움직임을 억제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 느낄 수 있다. 아기를 동반한 보호자나 노인, 만성 질환자 등 수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가만히 있기가 힘든 사람도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한계점은 모두가 덜 빡빡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서는 공연에 원하는 만큼 몰입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 차원에서 더 상상하고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에든버러 프린지 대부분 공연은 객석을 차지하지 않고 팔에 안을 수 있는 아기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 정책을 운영했다. 아기 보호자나 아기들도 공연을 볼 수 있게 하는 접근성 조치다. 당연히 공연 중에 아기가 울 수 있는데, 대체로 예의바르게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2. 조용한 공간 Chill-out Spot, Quiet Space


릴랙스드 퍼포먼스 못지 않게 널리 운영되는 접근성 조치이다. 영국의 많은 공공장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느 한 구석에 그냥 조용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공항에 흔히 있는 기도실, 유아휴게실, 흡연실 같은 시설과 비슷하다.


공연장에서 운영하는 조용한 공간은 대체로 소란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한다. 선호하는 자세로 쉴 수 있도록 소파, 빈백체어, 방석을 골고루 배치하고 주무르는 장난감, 푹신푹신한 쿠션, 반짝이 등 감각 용품을 놓아 두기도 한다. 낮은 조도로 조명을 조절해 놓기도 하고, 자유롭게 집어갈 수 있게끔 귀마개나 선글라스를 비치해 둔 곳도 있다. 릴랙스드 퍼포먼스와 함께 운영하기 좋은데, 공연 중에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자극을 받았거나 피로해진 사람이 객석을 나와서 조용하게 휴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관객이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될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공연에도 설치할 수 있다.


한계점은 언제나 조용하게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조용히 이용해야 하며, 운이 안 좋게 내가 이용하고자 하는 때에 수요가 많으면 딱히 조용한 공간도 못 된다.


3. 소셜 스토리, 비주얼 스토리 Social Story, Visual Story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책자다. 번역하자면 '사회적 상황 이야기책', '보이는 이야기책' 정도일 텐데, 썩 와닿는 이름은 아니다. 극장에 들어 오는 길, 외관, 로비, 극장 안내원, 객석, 무대 장치, 배우들, 극 안의 여러 장면을 사진과 함께 찬찬히 소개해 주는 책자다. 말 그대로 이야기책처럼 하나하나 읽어 나가면 공연 당일에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게 해 두었다. 미리 알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내용도 미리 파악할 수 있게 막 별로 스포일러도 해 준다. 극 상황에 따른 조명, 음향 효과, 무대 장치 변화도 미리 설명해 둔다.


온라인 PDF로 배포하는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예시를 참조 (링크)


4. 자막Closed Caption 및 음성 해설Audio Description


극히 일부 공연은 자막 프롬프터나 공연의 시각적인 요소를 해설하는 음성 파일을 제공했다. 주로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염두에 둔 접근성 조치이지만 신경다양인에게도 도움이 되기에 덧붙여 소개한다.


자막은 대사, 음악 및 여러 유의미한 소리를 읽을 수 있도록 표시하는 장치다. 다른 언어로 된 일부 공연에서는 상시 운영하지만, 영어 공연은 구석에 조그만 프롬프터를 놓아두었거나 / 두 가지 악조건을 동시에 갖추어서 그다지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나마도 전혀 없는 공연이 대다수다. 한국의 공연들도 더하면 더했지 낫지는 않다. 즉흥 요소가 많으면 현장에 속기사를 두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지만, 스크립트가 있는 연극 등에서는 운영 부담이 크지 않을 텐데 참 아쉽다. 자막은 청각장애인 및 각 감각 처리가 남다른 신경발달장애인에게도 유용할 뿐 아니라 다채로운 영어 액센트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에게도 도움이 된다.


음성 해설은 소리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시각적인 요소, 예컨대 배우의 옷차림이나 무대 장치의 모습, 소리 없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부분 등을 들을 수 있게 해 준다. 완벽하게 운영하는 방법은 동시통역을 듣는 기계 같은 걸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영화 스트리밍이나 DVD에 있는 화면 해설 트랙처럼 별도 해설 트랙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작품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성 해설가를 초빙하면 더욱 좋다. 하지만 작은 공연이라면 작품 관계자가 5분~15분 정도 녹음해서 사운드클라우드 등에 업로드한 QR코드를 붙여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배우들의 옷차림, 무대의 분위기, 중간에 눈으로 봐야만 따라갈 수 있는 포인트들을 미리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접근성을 훨씬 향상시킬 수 있는데다가 돈도 안 든다. 아쉽게도 이 조치를 취한 공연 역시 극소수였다.




번외로 자막과 음성해설과 같은 접근성 요소들을 아예 작품의 일부로 표현하는 "창의적 접근성 Creative Access" 혹은 "(작품에) 통합한 접근성 Embedded Access" 역시 소개하고 싶은데, 다음 기회에 좀더 자세히 다뤄 보겠다. (너무 궁금하다면 Bird of Paradise 의 소개글(영문)을 읽어 보실 수 있다.)


영국 공연예술계 신경다양 접근성도 이상에 가깝지는 않았다. (특히 에든버러는 언덕과 계단이 많고, 오래된 도시라 휠체어 접근성이 많이 떨어진다.) 접근성은 어쨌든 계속해서 지향해야 할 방향이기에 이상적이긴 어렵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치를 취해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점, 정상성에 대한 사고를 근본적인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꽤 의미 있었다. 접근성 조치를 만들고 홍보하는 것만으로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관객과 업계 관계자들에게 더 나은 방법을 상상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정리하다보니 접근성 조치는 예산 여유가 없어도 의지가 있다면 개선할 수 있다는 점이 보다 분명히 보인다. 한국의 공연예술계 및 여러 분야에서도 예시를 참고하여 더 나은 접근성 조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길 바란다.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요즘은 영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과 신경다양성, 접근성에 대해 생각해요.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선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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