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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Dec 20. 2020

애인이었던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이 감정이 수정될 필요 없는 사랑임을 믿어서

사랑의 경계와 진화 혹은 변화에 관해 쓰고 싶었는데, 말을 더할 수록 잘못 표현될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어쩌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하나의 일화가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은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 낭만적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은과 헤어진지 6년반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낸다. 그때보다 은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더 신뢰하고 있다.


"마음 좀 정리되면 연락할게. 우리 친구로는 지내는 거야."


헤어질 게 뻔한데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두렵다며 헤어지자던 은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내가 떠나는 날, 공항에서 배웅해 주기로 한 약속은 지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너였으면 하는 바람은 절대 안 변할 거야."


나는 은이 언제고 내 친구이기를  때려치리라고 생각하곤 했다. 내가 새 애인을 만나면 더이상 잠재적 애인이 아니게 된 나를 홀대할 것 같았고, 그러면 내가 은에게 실망해야 하니까 두려웠다. 은을 좋아했던 내 판단력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한동안 은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은과 서로의 연애든 섹스든 사랑이든 뭐든간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낭만적 감정이 완전히 소멸된 거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 난 은이 나의 안위를 걱정할 때, 특유의 세심한 기억력으로 6년, 7년이나 지난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때,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단 걸 보여 줄 때, 이름모를 기분을 느낀다. 그건 내 15년지기 친구에게 느낀 적 없는 감정이다.


은은 나에게 은이다. 나의 전애인이라는 이름표도, 나의 친구라는 이름표도 우리의 관계를 단순화 하고 왜곡한다. 은과 헤어지고서는 이 관계에 실패한 나 자신을 탓하고 미워했는데, 이제 보니 은은 내 삶에 있어 기념할 만한 성공 사례다. 헤어짐, 매일 밤을 울며 보낸 한 계절, 과도하게 조심스러운 거리감, 날카로운 그리움, 오해, 모진 말, 자기혐오, 실망, 차단, 몇 년만에 누는 어색한 통화, 느린 바운더리 재정립, 그런 들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잊거나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넓은 의미의 사랑을 나누는, 그래서 명료한 말로 정의되지 않, 그래도 좋은 사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아까워서도 아니고, 욕심나서도 아니다. 우리가 키운 관계가 이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자라났을 뿐이다. 이거야 말로 욕심인데, 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 받고 싶. 은에게 보내기엔 너무 감적이지만 블로그엔 적을 수 있을 것 같은 편지 혹은 독백을 첨부한다. 이 감정이 검열되거나 수정될 필요 없는, 온전한 종류의 사랑임을 믿어서.




은,


벌써 옛날 일이 되어 버렸지만 말야, 나랑 처음 저녁을 먹었던 날 이태원에서 봤던 보름달을 기억하니. 그 뒤로 이태원 거리를 혼자 걸을 때마다 무작정 걷고 싶어지곤 했어. 널 마주칠 때까지. 이태원에서 같이 달을 본 사람이 여럿이 되고서는 가는 날마다 널 생각하진 않아. 그때 넌 바다 건너에 있었는데 널 우연히 마주칠 때까지 걷고 싶은 기분이었으니 녹사평역에도 가고, 해방촌에도 가고, 경리단길과 회나무로를 걷기도 했어. 한남동, 보광동으로도 배회하고. 언덕을 오르내리다가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순간에 울고 싶어졌어. 우린 어쩐지 언덕을 여러 번 올랐잖아. 낙산공원 한켠에 앉아 날 기다리던 너의 모습이 나를 얼마나 벅차게 했던지, 여전히 기억해. 부슬비가 내리는 어느 가을 밤에는 한남동 근방의 작은 산에 올라가서 운 적도 있는데, 그게 택시비를 낼 돈이 없으면서 술을 처먹고 막차를 놓쳐 버린, 그런 밤이었어서 그 산의 이름도 위치도 잘 모르겠어.


너와 연애하던 시절의 나는 새싹이었어. 넌 나를 흉없이 젊고 활기 넘치는 사람으로만 알았지만—널 탓하지 않아. 다른 면을 보여 주기를 겁냈던 내가 바보야—나는 땅 속에서 오랫동안 지냈어. 갇혀있다는 사실이 숨 막혀서 매일 울었어. 거기선 아무것도 안 보였어. 발아한 순간 눈이 부셨던 게 그래선가 싶었는데, 땅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처음 본 게 하필 너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너도 기억하겠지만, 내가 너를 제대로 사랑하지는 못했잖아. 하지만 너무너무 좋아했어. 꽉차는 기쁨, 완전한 포용 같은 걸 안겨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는데. 너를 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예뻐하는 일 이상으로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네가 웃을 때 만드는 주름 하나하나가 좋아서 견딜 수 없었어. 그런 감정에 압도된 나머지 사랑하는 걸 깜빡한지도 몰라.


네가 가고 난 뒤에 나는 엉망진창이 됐어. 적당히 좋아하는 법을 배운 적 없었으니까. 널 생각하면서 울 때마다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예언했어. 다짐이 아니라 예언이었어, 분명. 그런 감정이 다시는 오지 않을 걸 알았어. 아직 내 삶이 끝나지 않아서 예언이 적중한지는 아직 모르지만, 맞을 거야. 이제 난 마음을 가로막고 타이를 줄 아는 사람이 됐고, 그러지 않는 법은 까먹은 것 같거든. 이게 "성장"의 증거라고 뿌듯해 한 적도 있는데, 정말 성장일까? 성장은 좋은 걸까? 아무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무너무 무작정 좋아한 사람이 너라서 참 행운이다.


오늘 저녁 홍대 앞 거리가 말도 안 되게 한산해. 이 거리에선 정말 수도 없이 다양한 사람을 만났으니 딱 누구 한 명이 떠오르지는 않아야 하는데다가, 너와는 이 동네의 어디도 걸은 적 없으니 네 생각이 날 이유가 없는데도 이렇게 써 제끼고 있네. 널 만나기도 전에 이곳에서 느꼈던 달뜬 감정들이 어쩐지 너와 연결된 것처럼 느껴져. 우리가 겨울의 마지막 날에 처음 만났는데, 그 겨울은 어쩐지 춥지 않았지. 얇은 폴리에스터 코트를 입고 연말 분위기에 취해 정신없이 이 거리를 돌아다녔던 밤들, 여기서 맞은 새해 첫 순간에 내 옆에 있던 이름도 취미도 취향도 잊혀진 사람의 귀걸이 부드러웠던 눈빛, 그런 것이 떠올라도 널 생각해.


이제 너를 너무너무 좋아하지 않아. 근데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내가 "성장"했으니 사랑을 하는 법을 좀 알아냈을 거야. 다음에, 그러니까 코로나가 없어지면, 너랑 여길 걸어야겠다. 오래 남는 행복과 더없는 환대와 완벽한 안심을 너에게 줄 능력이 여전히 지만, 최선의 사랑을 건네 줄래. 내게 봄을 보여 줘서 고마워. 내가 몇 번씩이나 계절들을 붙잡거나 보내는 걸 곁에서 지켜봐 줘서 더 더 고마워. 은, 세상에 좋은 걸 기대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 사랑하는 은.


2020년 12월 토요일 저녁, 홍대 거리에서

율.




Photo by Mai Rodrigu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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