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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Nov 24. 2020

공포회피형,
사르트르처럼 사랑하지 말자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피카부, 설렐 때만 사랑이니까
내 친구 다들 소리쳐 넌 정말 문제야
I'm fine, fine, fine, fine, fine!


레드벨벳의 노래, 피카부의 가사를 참 좋아한다. 공포회피형 애착 유형인 나도 새롭고 설레는 사랑을 재밌어한다. 사랑은 눈을 살금 떴다가 다시 숨어버리는 피카부(aka 까꿍)처럼 느껴진다. <애인> 혹은 <파트너>, <배우자>는 나의 집이고, 나의 베이스캠프,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어야 한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상대이다. 그런데 그걸 "낭만적"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낭만적 사랑은 목적지이다. 그쪽을 향해 언제나 가고 싶고, 새로운 방향성을 얻은 에너지가 나를 새롭게 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온 신경을 연다. 그 사람의 세계를 흡수할 준비가 된다.


낭만적인 사랑을 할 때의 나는 건강하지 않다. 사르트르가 타자론에서 말한 '사랑'처럼, 내가 내 세계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타인의 중심점이 내 세계 위로 겹쳐 오면서 중심점이 두 개가 된다. 내 중심점이 희미해지고 약해진다.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미친 듯이 자라나는데, 나는 영원히 그 사람의 눈을 가질 수 없다. 그가 보는 내 모습을 나로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그 미지의 가능성들이 나를 새벽마다 불안한 꿈에 놀라 깨게 한다. 나는 그게 좋은지 싫은지 결정하지 못한다.


내 세계가 흔들릴 때 나는 나를 미워한다. 내 안에 두 개가 되어 버린 중심점이 서로 유일한 중심을 쟁탈하려는 권력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상대의 기준이 나의 기준을 압도하는 순간들이 있다. 김세희 작가는 소설 «항구의 사랑» 전반에 이런 취약한 상태를 담백하고 솔직하게 묘사했다.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갑자기 주변 모든 사람들이 위협적일 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나는 울고 싶어 진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모두 나의 적이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매력을 알아볼 것만 같아서 나는 애가 탄다. 그들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김세희, «항구의 사랑», 82쪽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면, 상대의 중심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에 그의 취향이 미적 기준이 되고, 그의 행동과 동기가 윤리 기준이 된다. 그 이가 기준이므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인간의 이데아, 세상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나는 그 사람과 닮지 않은 부분만큼 모자라고 하찮은 사람이 된다. 거기에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간절함까지 더해지면, 내 안에는 남이 욕망할 만한 자질이 하나도 없는 듯 보인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다. 낭만적인 감정이 자라나는 초기에는 매번 기대를 품는다. 내 세계와는 다른 저 세계에 흠뻑 잠겨 탐색하고, 여행하고, 더 나은 방식으로 변화하리라. 나의 중심을 지키면서 상대의 중심을 체험하겠다는 야망이다. 그런데 기회가 오면 둘 중 하나다. 자기혐오, 혹은 이른 포기와 체념. 중심을 내어 주는 경험은 무척 아프기 때문에, 겁을 내며 상대의 세계에 한 발만 디딘 채 스며들지 못한다. 그 세계의 어디까지가 안전한지 모르는 것이 싫고, 내 통치권을 벗어난 공간에 내 몸과 마음을 놓는 것이 불안하다. 도망치고 싶다. 더 가까이 가고 싶다. 혼란스럽고, 정합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경험이다. 미숙하고 서툰 나를 끊임없이 발견하기 때문에 괴롭다. 다시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게 된다.


파트너십은 건강하고, 서로의 역량을 드높이며, 지속 가능해야 한다. 그러니 오래 만날 사람을 낭만적으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혹은, 낭만적으로 끌리는 사람과는 오래 만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지속을 꿈꾸지만, 감정이 나를 망치는 걸 속수무책 바라보며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가장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며 아직 깊은 사랑을 틔워 보지도 못한 수개월짜리 관계를 떠난다. 차단을 박는다. 내가 술 취해서 연락하면 안 되니까. 혹시 답장하고 싶어 지면 안 되니까. 극적인 퇴장.


아픈 시간을 견디면 내 중심이 회복되는데, 그 고요함이 금세 지겨워진다. 새로운 세계가 다시 나의 몸과 마음과 가치관과 시각과 인생을 흔들어 주기를 갈망한다. 적당히 새롭고, 적당히 파괴적이고, 적당히 건강한 여행을 이번에야 말로 즐길 수 있다고 확신하며, 이제 그런 사랑을 해 보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무한반복이다.




나는 지금의 내 반려인을 사랑한다. 그는 약간의 불안형 특성을 보이는 안정형 애착 유형이다. 이 맥락에서의 내 사랑은 그가 내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려인이 가진 모든 장점을 더 많이 가지고, 모든 단점을 더 적게 가진 사람이 나타나도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 그가 어떤 삶을 살게 되든 지켜보고 싶다. 앞으로 살아가며 우리가 서서히 다른 사람이 될 테고, 우리 관계의 모습도 변할 텐데, 그 변화가 파괴적이지만 않다면 그냥 계속 함께하고 싶다. 아무리 지혜롭고 다정한 중년 여성을 만나도 내가 갑자기 엄마를 갈아치우지 않을 것이 분명하듯이 그 누구도 내 반려인을 대체할 수 없다. 만에 하나 반려인과 내가 긴밀한 관계를 끊고 각자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랑을 한대도, 우리가 맺었던 관계가 사라진 자리는 채워지지 못하고 영영 빈 채로 남을 것이다.


이쯤 되면 솔직히 사르트르의 타자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아예 딴 얘기를 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타자에 관해 말했고, 나는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타자론에서 제2의 태도로 규정되는 '사랑'이라는 타자 간의 관계가 이론적으로 정말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은 모르겠다. 메를로 퐁티가 이미 해결했을 것 같아 보이는데, 학부 전공자 나부랭이라 아직 공부를 더 해 봐야 알겠다.


그보다도 나는 현실의 사랑이 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싶다. 상대에게 동화되거나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 가운데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동화되기에도 실패하고 굴복시키는 것에도 실패한 뒤 박차고 나와버리는 식의 극단적 사랑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지 않아도 좋은 잔잔한 사랑이 있다는 걸 증언한다. 그런 사랑을 얻기 위한 과정 역시 만만치 않은 감정적 대모험인데(이 모험에 관해서도 곧 쓸 생각이다), 적어도 정체를 알 수 없 달뜬 느낌에 휩쓸리지는 않아도 된다.


사랑을 한없이 갈망하지만 일평생 외롭고 허전다면, 다음에는 잔잔하고 느리게 자라나는 사랑에도 한 번 기회를 줘 보자.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고, 어떤 것도 혼란스럽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오는 사람,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사람인지 알게 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공포회피형과 불안형에게 회피형 연인은 무척 매력적이지만, 그 사람을 허겁지겁 따라다니느라 내 욕구와 마음을 외면해야만 유지 되는 관계는 엄청 매운 음식과 같다. 내가 정말로 건강할 때, 내가 적당히 조절할 수 있을 때만 재밌다. 사랑을 할 때의 내가 아직 건강하지도 않고, 불안하고, 두렵다면, 일단은 내 몸에 좋은 사람을 선택해 보기를 살며시 권하고 싶다.


모두 마음이 충만해지는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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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aleb Wood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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