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버스에 오르기 전, 터미널에서 커피를 마신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날이 추워서 몸을 녹일 요량으로 커피를 마셨는데, 나는 커피 대신 버스 안에서의 잠을 택했어야 했다. 3시간 20분 동안 창 밖 풍경도 없는 버스 안에서 눈을 말똥말똥 굴리고 있는 것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잠은 안 오는데
뭔가 피곤하다.
나... 산행할 수 있을까?
태백 터미널에 도착하고도 나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다른 승객이 모두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버스기사님과 함께 '경기고속' 의 차고지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차고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겁도 없었다. 어두운 밤 여자 혼자 돌아다니다 나쁜 일이 생기는 뉴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오는 세상에, 나는 어째서 길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캄캄한 새벽에 낯선 남자어른을 따라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이상하게 백두대간에서는 사소한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차고지에는 택시 대신 에쿠스 차량이 한대 있었다.
"어? 택시 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이것도 돈 내고 타는 택시야."
버스아저씨는 반말로 요즘의 회사 근황을 물어보고, 에쿠스아저씨는 존댓말로 질문에 답을 한다. 둘의 관계가 심히 궁금했지만 꼬치꼬치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 얘기를 주고받는 것 보면 같은 회사 소속인 것 같긴 한데. 에쿠스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그런것까지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웠다.
에쿠스택시는 두문동재 터널로 지나갔다가 유턴하여 다시 두문동재 윗길로 들어섰다. 태백 터미널에서는 제법 괜찮은 날씨였는데 두문동재에 도착하자 미친바람이 분다.
"아가씨,
이렇게나 어두운데 괜찮겠어?
너무 위험하지 않아?
버스기사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듯 물어보셨다.
"아이고. 바람도 너무 많이 부는데...
진짜 괜찮겠어?"
"괜찮아요. 야간산행이 다 그렇죠 뭐."
아저씨는 걱정을 하면서도 친히 내 배낭을 내려주신다. 그리고는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에쿠스택시는 떠나지 않고 내가 등산로에 진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새벽 2시 35분.
이번주의 종주가 시작되었다.
조금 걷다가 헤드랜턴의 빛 만으로는 어두운 것 같아서 손전등도 함께 사용하려고 했는데, 제길! 손전등이 켜지지 않는다. 배터리가 다 된 건가? 그럴리가 없는데. 설마 배터리가 얼어버린 건가?
좀 어둡긴 했지만 등산로를 식별할 정도는 되니 그냥 가기로 했다. 그나마 이정표가 자주 나타나서 안심이었다. 땅만 보며 걸으니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등산리본은 찾을 엄두도 안 났다. 그런데도 길 한번 잃지 않고 잘 간다. 등산로가 매우 선명한 모양이다.
첫번째 목적지인 '은대봉' 은 금방 나타났다. 바람은 미친듯이 쳐부는데 하늘의 별은 무척이나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사방이 캄캄했지만 뭔가 탁 트인곳이 많은 듯 태백의 야경도 심심찮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배가 고팠다. 배도 고프고 몸도 으슬으슬하고 커다란 배낭이 바람을 정통으로 맞아 계속 몸이 기우뚱거렸다. 공터를 피해 어느 나무틈에서 김밥 몇덩이와 슈크림빵을 먹었다. 슈크림이 차가워서 이가 시리기는 또 처음이구나... 아하하...
그 미친바람 틈바구니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도 고행이라 나는 대충 우물거리고 다시 길을 이어갔다.
아... 그런데...
정말이지 너무 힘들다...
쓰러질 것 같다...
바람을 얼마나 맞았는지 이마가 아파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어지럽고 심장이 옥죄어 온다. 이대로 가서는 큰일 날 것 같다. 공터가 나타나자마자 나는 배낭을 내리고 텐트를 쳤다. 새벽 4시. 종주를 시작한지 1시간 반이 지난 시간이었다.
텐트고 나발이고 그냥 매트와 침낭만 펼쳐서 빨리 들어가 눕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이 미쳐날뛰듯 불어닥쳤고 한 시간을 쉬더라도 제대로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텐트를 쳤다. 그런데... 아하하하하하... 땅이 얼어서 텐트핀이 안 들어간다... 아하하하하하 울고싶다 아하하하하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친바람이 텐트 안으로 들이쳐서 핀으로 고정하지 않았는데도 텐트가 형제를 갖추고 제대로 서 있었다. 바람때문에 종주를 중단했지만 바람덕분에 텐트 안에 매트와 침낭을 펼치기는 수월했다.
물병의 물이 조금씩 얼어있었다. 오늘의 최저기온이 -7℃ 라는게 정신 번쩍들도록 실감났다. 다운패딩과 다운팬츠를 상하의로 다 걸치고 침낭에 누웠는데도 이가 덜덜 떨렸다. 나는 비비쌕 안에서 꿈틀거려 내복 위에다가 핫팩을 붙였다. 20분쯤 지나니 핫팩의 열기가 몸에 전해졌다. 핫팩이 없었다면 잠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한 두시간만 자고 일어나려고 했다. 아침해가 뜸과 동시에 종주를 이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두시간에 한번씩 눈을 뜰 때마다 여전히 미쳐날뛰는 바람소리가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침낭 밖으로 코만 쏙 내밀어도 추위가 장난아니다. 낯짝이 얼어버릴 것 같아서 침낭에 고개를 파묻고 잔뜩 웅크린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나는
정오까지
쳐 자버렸다.
이러려면 도대체 새벽산행은 왜 한 것일까? 그냥 아침 첫차로 태백에 왔어도 이 시간쯤 도착하지 않았을까? 한숨이 나왔지만 텐트를 펼치지 않고 억지로 종주를 감행했다면 나는 걷다가 기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오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미친바람이 분다. 바람이 멎을 때까지 텐트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일어났으니 한 두시간이라도, 조금이라도 걸어보자. 텐트를 개고 짐을 싸서 다시 대간길에 오른다.
추위와 바람이 무서워서 옷을 너무 껴입었더니 배낭의 허리벨트가 숨막히게 조여왔다. 나는 허리벨트를 조절하기 위해 출발하고 10분도 안 되어 다시 멈췄다. 등산로에 서서 고개만 숙인채 배낭끈을 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장갑을 낀 손으로 하려니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배낭 허리벨트와 씨름하고 있는데 앞쪽에서 사부작거리는 느낌과 함께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났다. 맞은편에서 등산객이 오는 것인 줄 알고 가까이 오면 인사나 해야겠다 생각하며,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배낭끈 조절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드디어 배낭끈을 조절하고 고개를 들었더니
저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었다.
아니, 저게 뭐야?
뭐지?
등산로를 벗어난 능선에서 하얗고 토실토실한 엉덩이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땅에 코를 쳐박고 조금씩 이동하며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당최 면상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삵인가?
그런데 삵이 왜 저렇게 뚱뚱하지?
산에서 뭘 얼마나 잘 먹고 사는 거야?
아냐!
삵이 저렇게 크다는 건 말이 안돼.
그럼 뭐지? 곰인가? 백곰이라면...
헉! 북극곰?!!!
할렐루야~!
대한민국 남한에서 북극곰을 만나다니!!
에헤라 디야~~~
그런데 자세히 보니 곰이 아닌 것 같다. 그래. 대한민국 남한에 북극곰이 있다는 건 말이 안돼지. 꼼짝 않고 서서 녀석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한 녀석이 얼굴을 보여주었는데
꺄아아아~~!!!!
멧돼지다 멧돼지이~~~!!!
꺄아아아아~~~ 드디어 내가 너를 만났구나!!!
뽀송뽀송 귀여운 아기 멧돼지들이, 하나도 아니고 예닐곱이 모여서, 먹을 것을 찾느라 고개를 땅에 쳐박고, 지척에 인간이 있는지도 모르고 예쁜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꺄아아아~~~!!!
너무 예쁘잖아~~~~
꺄아아아~~~ 어쩜 좋아~~~~!!!
공포심으로 심장이 쿵쾅거리면서도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려움과 희열이 동시에 느껴져 심장이 쫄깃쫄깃 했다.
나는 녀석들을 좀 더 자세히 보고싶었다. 녀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살짝 살짝 걸음을 옮겼다.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녀석들의 본연을 보고싶었다.
고작 세 발짝을 움직였을 뿐인데 녀석들은 나의 움직임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무니빠지게 도망쳤다. 역시 아가들이라 겁이 많았다. 아가들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 주위에 모여 이쪽을 흘끔거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은 그러나 아직 다 자란 성체는 아닌 것 같았다. 털 색이 아이보리와 잿빛이 섞여 얼룩덜룩 했다. 엄마와 아빠는 어딜 간 것인지 형아가 아가들을 인솔하는 모양이었다.
형아 멧돼지는 아가들을 인솔해서 저쪽 산능선으로 후퇴한 뒤, 안정적 거리를 확보했다 생각한 자리에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형아멧돼지는 아가멧돼지들을 데리고
오른쪽 산능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아! 아까워라!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면 녀석들이 먹이를 찾으러 더 아래로 내려왔을까? 혹시 오늘의 종주를 포기하고 계속 텐트에 누워 있었다면 녀석들이 먹이를 찾아 나의 텐트까지 다가왔을까? 아! 아깝다! 녀석들을 바로 코 앞에서 보고 싶었는데!
다음번에 또 야생동물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절대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지. 녀석들이 다가와 나의 종아리에 얼굴을 부빌때까지 절대 꿈쩍도 말아야지.
그렇게나 고대하던 야생동물을 먼 발치에서나마 보게 되어 정말정말 기쁘고 행복했다. 덩달아 멧돼지도 아가들은 하얀털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역시, 짐승이든 사람이든 아가들은 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거다.
아!
새벽산행 오길 잘했구나!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5구간
진행 구간 : 두문동재(강원도 정선과 태백의 경계)-은대봉-2km쯤 걷다가-(새벽4시부터 정오까지 자다가)-다시 종주 시작(강원도 정선과 태백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