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바다 빼고 다 있는 강원도 태백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멧돼지가 사라져 버렸으니 나도 걸음을 옮겨 종주를 이어간다. 태양은 강렬한데 날씨는 너무나도 추웠다. 바람이 너무 분다. 강렬한 태양이 무용지물인 날씨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된다. 등산로의 낙엽에도 서리가 내려 모두 얼어버렸다. 정오의 태양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다.




시야가 확 트인 조망지가 나타났다. 두문동재에서 은대봉을 지나 함백산에 이르기까지 이런 조망지는 수시로 나타났다. 시야가 좋으니 기분도 좋다. 하지만 바람이 너무 분다. 바람을 너무 맞아서 몸이 점점 힘들어졌다.




주위를 가려주는 것이 없으니 바람이 사방에서 나를 공격한다. 확 트인 조망지가 별로 도움되지 않는 날씨였다. 나는 체력이 떨어져 기어가다시피 걸어야 했다.




함백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왼쪽 저 너머로 리프트가 설치된 스키장이 보였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스키장인지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돌무덤도 나타났다. 산의 경사진 사면이 저 위에서부터 저 아래까지 돌로 꽉 차있다. 하지만 등산로의 너덜은 생각보다 짧았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너덜길이 길었다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정상부 근처의 헬기장을 지나

조금만 더 진행하면




드디어 '함백산' 정상이다.

유후~ 도착했다!




함백산 정상에는 첨성대같이 생긴 돌탑이 있었다. 정상석과 돌탑 아래로도 돌을 쌓아 만든 단이 있다. 정성스레 지어진 정상부를 보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정상에서는 나무에 가려진 곳 하나 없이 사방팔방으로 산의 능선이 모두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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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버렸다. 바람을 피해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벌렁 누워버렸다. 아... 힘들다... 진이 다 빠진다... 왜 이렇게 힘든건지 모르겠다. 힘든 구간이란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바람은 피해 가고 햇볕만 몸에 가득 내리쬐길 바랐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햇볕보다 더욱 많은 바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뭔가 먹어 체력을 보충해야 하는데 너무 추워서 뭘 먹고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뭐든 다 차갑고 딱딱하다. 소화도 안 될 것 같고 물도 마시기 싫었다.




별 수 없이 다시 길을 이어간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빨리 이동하고 싶었다.




함백산 정상을 지나 대간길을 이어가다보니 산봉우리 정상에 뭔가 경기장 같은 것이 보였다. 태백선수촌이라는 곳이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고지훈련을 위해 지어진 태릉선수촌의 태백 분소라고 생각하면 된다. 함백산 정상에는 KBS 중계탑도 있고 헬기장도 있고 무려 선수촌도 있다. 이 높은 산 정상에 별게 다 있다.




그래서 이 높은 산 정상까지 차량이 올라올 수 있었다. 임도는 거의 정상부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선수촌 차량이 아닌 일반 차량도 올라올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갈색의 마른 가지 뿐인 지금의 계절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지만, 함백산 일대도 모두 야생화 천지라고 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이곳은 꽃으로 활홀경이라는데 나는 바람을 너무 맞아 저세상을 맛볼 지경이었다.




땅에는 야생화대신 얼음이 우후죽순 올라와 있었다. 얼음이 정말로 죽순처럼 얼어서 땅 위로 올라와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모양으로 얼음이 어는 것인지 신기하고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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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만항재' 에 도착했다. 414번 지방도와 만나는 곳이다. 이 곳까지 내려오니 바람이 좀 잦아들었다. 몸을 기우뚱거리지 않고 똑바로 걸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만항재의 차도 건너편에는 뭔가 예쁜 것들이 잔뜩 설치되어 있었다. '산상의 화원' 이라고 이름지어진 곳에는 뉴욕 핫도그를 파는 간이매점도 있고 사람들이 소풍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과 벤치도 많았고 여기저기에 그림작품과 사진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매점은 폐점 상태고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공간이 너무 예뻐 둘러보았더니, 이곳은 '함백산야생화축제' 가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이 일대가 모두 야생화 천지인 것이다.




태백에는 탄광촌만 있는 줄 알았다. 바다도 없고 딱히 유명한 관광지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무식한 나의 편견일 뿐이었다. 시를 둘러싼 산이 모두 야생화 천지이고, 고랭지 배추밭 위로는 아름다운 풍력발전기가 한 폭의 그림을 선사하고 있으며,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도 있고, 무엇보다 태백시에는 '태백산' 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야외 전시장에는 야생화축제 때의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짙은 소나무 아래로 연둣빛 풀밭과 사이사이 가득한 야생화라니! 이 황량한 곳이 봄이면 이렇게나 아름다워지는 곳이구나! 아... 가고싶다... 사진 속 풍경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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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아닌 황량한 겨울에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

서러울만큼 아쉬웠다.




산책길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더니 만항재 표석이 나타났다. 그리고 간이 건물처럼 보이는 매점이 있었는데




신이시여!

영업을 하고 있다니!!




평일의 대간길에는 매점이나 슈퍼가 있어도 문을 닫은 곳이 훨씬 많아서, 간이 건물처럼 보이는 매점에도 별로 기대를 안했었다. 그런데 영업을 하고 있다니! 감격의 마음을 안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부부로 보이는 사장님 내외가 있었다.




나는 따뜻한 차가 있는지 여쭤보고 인삼차를 주문했다. 너무 추워서 배가 고픈지도 모르겠고 그저 따뜻하게 몸을 녹이고 싶었다. 태백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몸 속에 따뜻한 것이 들어가니 온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사장님 내외와 이런 저런 얘길 나누며, 내가 함백산에서 멧돼지를 봤다고 자랑했더니, 여기는 멧돼지가 많다며 웃으신다.




"그런데 아기 멧돼지 털이

아이보리 색이더라구요!"




멧돼지도 종마다 다른데, 이곳 태백의 멧돼지는 새끼 털이 흰색이 맞다며 사장님 내외분은 또 웃으신다. 내가 너무 도시촌년 티를 낸 것 같았다.




인삼차만 마시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오후 5시. 이제 슬슬 야영지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여기 어디에서 다시 대간길이 이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닫았던 가게문을 다시 열어, 화방재로 가는 등산로 입구가 어디인지 여쭈었다. 사장님은




"저기 아스팔트 깔린

까만 길로 올라가면 돼~"




라고 하셨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인데 오르막 임도에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장님이 가리킨 방향으로 길을 건너 오르막을 걸었다. 서쪽하늘의 노을이 붉디 붉었다.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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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을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군인을 만났다. 나는 시간이 없어서 평소와 다르게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군인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 군인 : 어디로 가세요?



- 나 : 백두대간 타고 화방재로 가요.



- 군인 : 아, 그러세요. 그런데 여기는 막다른 길이거든요. 위로 더 올라가면 저희 부대밖에 없어요.



- 나 : 그래요? 그럼 어디로 가야 되죠?



- 군인 : (당황하며) 그건 저도 모르죠.



- 나 : (더 당황하며) 예? 그럼 어쩌라는 거에요?



- 군인 : 저기 가게 주인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스물 한살이나 두살 쯤 되어보이는 군인이 가리킨 곳은 다름아닌 방금 내가 들렀던 그 가게였다.




- 나 : 그 가게 사장님이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하셨는데요?



- 군인 : 이쪽으로 가면 저희 부대밖에 없어요. 저희 부대가 생기면서 길이 없어졌거든요.



- 나 : 부대가 언제 생겼는데요?



- 군인 : 일 년 반쯤 된 것 같아요.



- 나 : 한 달도 아니고 일 년 이요? 여기로 출발하기 전에 인터넷 검색을 하고 왔어요. 군부대 때문에 백두대간이 끊겼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다들 백두대간 완주했다고 하던걸요.



- 군인 : 그럼 제가 가게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군인은 급하게 뛰어내려가고 나는 천천히 걸어 아스팔트길 입구까지 내려왔다. 마침 가게 문을 닫고 귀가하시던 사장님 내외분이 내 앞에 차를 세우더니




"아가씨, 그 쪽으로 올라가면 돼요~ 쭉 올라가~"




하셨다. 먼저 내려갔던 군인이 가게 사장님께 다가가 자세히 물으니, 부대 철망 옆으로 대간길이 있다고 하신다. 사장님 내외분은 차를 몰고 가버리고 군인은 내게 돌아와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좀 짜증이 났다. 해가 지고 있어서 빨리 야영지를 잡아야 하는데 너무나 친절한 군인동생 덕분에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아스팔트길을 다시 올라가는데 군인동생도 나와 함께 걷고 있었다.




- 나 : 저기요. 볼 일 있어서 아래로 내려가던 거 아니었어요?



- 군인 : 네. 아까 그 가게에서 소주를 사려고 했는데 이모님이 퇴근하셨네요. 하하




처음부터 서로를 모른체 했더라면 군인동생은 간발의 차이로 소주를 살 수 있었을 거고, 나는 캄캄해지기 전에 야영지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조금은 미웠지만 그래도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이었다. 박배낭을 메고 힘겹게 올라가는 내가 헛걸음을 할까봐 말을 건 것이었다.




- 나 : 아! 소주 못 사서 어떡해요?



- 군인 : 어쩔 수 없죠 뭐.




군인동생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군부대는 의외로 금방이었다. 군인동생은 부대 입구를 향하고 나는 백두대간 리본이 팔랑이는 입구의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 군인 : 금방 어두워질 거에요. 조심히 가세요!



- 나 : 네. 고맙습니다. 푹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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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는 몇 명이 근무하는지 건물이 작고 몇 동 되지 않았다. 부대 정면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울타리 철조망 옆으로 샛길 같은 등산로가 이어져 있었고, 울타리 철조망에는 백두대간 리본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군인' 의 나이는 등산에 관심 없을 나이다. 게다가 '군인' 이라는 신분 또한 등산이라면 치가 떨릴지도 모른다. 지금껏 백두대간에서 만난 군인들은 바로 옆에 등산로를 두고도 그것이 등산로인지 몰랐고, 바로 위에 있는 산이 무슨 산인지도 관심 없었다. 그러니 부대 담벼락이 곧 등산로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서쪽하늘에서는 이미 태양이 자취를 감추었고 붉은 노을 위로 쪽빛 밤하늘이 내리고 있었다. 노을조차 없는 동쪽하늘엔 저만치 달이 떠 있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5구간

진행 구간 : 은대봉에서 남쪽으로 2km지점(강원도 정선과 태백의 경계)-중함백-함백산-만항재(강원도 정선,영월,태백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SE-e7ae793d-7d91-43fc-b4f2-75de64fb51a6.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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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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