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태백산에 피어난 눈꽃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어둠 속을 한참이나 걸었다. 계속해서 좁은 샛길같은 등산로만 이어졌다. 일인용 텐트 하나 펼칠 작은 공간도 없었고,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수리봉'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비박을 하고 싶었지만, 정상석이 있는 곳에도 텐트 하나 펼칠 공간은 안 나온다. 또 한참을 가다가 널찍한 공터가 나와서




"오오~ 좋은데?"




하고 둘러봤더니 무덤가다. 으으~ 빨리 지나가자. 어느덧 자동차 오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화방재에 가까워진 것이다. 만항재에서 수리봉을 거쳐 화방재까지는 정말이지 좁다란 샛길 등산로 뿐이라서 쉬지 않고 걷기만 해야 했다. 한시간 반 동안 걸었는데 손바닥만한 공터 하나 나오지 않았다.




국도에 당도하면 비박지를 찾기는 더욱 힘들 것 같아서 어떻게든 화방재에 도착하기 전에 여장을 풀고 싶었다. 그런데 오오! 화방재 도착 직전에 소나무가 울창한 공터가 나타난 것이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오늘도 제게 좋은 잠자리를 주시는 군요!




나는 다짜고짜 배낭을 내리고 텐트를 펼치기 시작했다. 텐트를 치고 저녁을 먹는 동안 화방재휴게소에는 제법 많은 자동차들이 오갔다. 그것이 다 보일정도로 정말이지 지척이었다. 지금은 어두운 밤이니 국도에서 소나무숲에 있는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날이 밝으면 국도의 휴게소에서도 나의 오렌지색 텐트가 보일지 모를 일이었다.




밥을 끓이려고 코펠에 물을 부었는데, 물이 코펠에 닿자마자 얼음으로 변해버렸다. 오오! 신기해! 이런건 또 처음본다. 도대체 날이 얼마나 추우면 이럴 수 있는 거지? 얼음 결정이 넘 예뻐서 사진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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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밥만 먹고 텐트에 기어들어가 누웠다. 물티슈가 얼어서 다 먹고 난 코펠을 닦지도 못했고 물티슈 세수도 못했다. 물티슈를 침낭 안에 품고 자면 내일 아침에는 말랑하게 녹아 있을거야.




오늘 새벽 태백에 도착해 정오까지 그렇게 잤는데도 누우니 또 잠이 왔다. 정말로 힘든 하루였다.




화방재의 휴게소 근처에 민가가 있는지 개 짖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시골의 개들은 도대체 왜 쉬지 않고 짖어대는 것일까? 개 짖는 소리가 선명한데도 나는 곧 곯아 떨어졌다.




그리곤 밤 사이 푹 잤다.

늦게까지 잘 잤다.




오전 7시쯤 눈을 떴다가 너무 춥길래 다시 자고, 또 8시쯤 눈을 떴다가 여전히 춥길래 다시 눈을 감고, 계속 밍기적대다가 8시 45분에 텐트를 박차고 나왔다. 겨울산행이 점점 짧아지는 이유는 일출이 늦어서가 아니다. 아침의 추위를 견딜 수 없어서다.




물병의 물은 어제보다 더욱 얼어 있었다. 내일이면 아주 꽁꽁 얼 기세다. 나는 눈 앞에 보이는 화방재 휴게소에서 아침밥을 사 먹기로 하고, 물티슈 세안도 생략한 채 텐트를 개고 배낭을 쌌다.




하지만 빈 속으로 짐을 싸려니 평소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하고 배낭만 쌌는데도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 더 걸린 것 같았다. 날이 추워질수록 일단 먹고 시작해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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낑낑대며 배낭을 싸고 있는데 화방재에서 어떤 아저씨가 올라오셨다. 무릎 꿇고 앉아 짐을 챙기는 나를 보고




"아, 난 또.

앉아서 계속 뭘 하길래

식물 채취라도 하는 줄 알았네."




라는 말씀만 남기고 다시 내려가셨다. 산불방지 단속반 아저씨였는데, 산불방지 기간에 비박을 했다고 나를 야단치지는 않았다.




짐을 다 싸고 화방재휴게소 쪽으로 내려와보니, 비박지 아래 양쪽으로 민가가 한 채씩 있었다. 그래서 개 짖는 소리가 그토록 크게 들렸던 거구나. 내가 잠을 이룬 곳은 평소라면 절대적으로 피했던 민가 바로 근처였던 것이다. 밤의 어둠이 모든 것을 가려주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화방재 휴게소에서는 아침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헉헉대며 휴게소를 찾았는데 식당은 딱 한 군데, 나머지는 커피숍과 매점이었다. 화방재 휴게소에서 아침밥도 먹고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려고 했는데 모든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밥을 먹지 못한 나는 너무 힘이 없어서 세수도 못하고 다시 대간길에 올랐다.




화방재에서 등산로로 들어선지 10분도 안되어 '사길령' 이 나타났다. 그리고 곧 이어 '태백산 군립공원 매표소' 도 나타났다. 드디어 그 유명한 '태백산' 에 들어선 것이다.




매표소 앞 벤치에 배낭을 내리고 버너와 코펠을 꺼내 밥을 끓였다. 아사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겨울에 배가 고파 쓰러지면 그것은 아사인가 동사인가.




보글보글 밥도 끓여먹고, 따뜻하고 달달한 율무차도 한 잔 마시고, 물티슈로 세수도 하고 기초화장도 다 끝냈는데 여전히 매표소의 직원은 출근하지 않았다.




하긴, 주말도 아닌 평일의 이런 날씨에 매표소를 지키고 있어봤자 매표수입보다 인건비가 더 들어갈 판이다. 덕분에 나는 무료로 군립공원에 진입할 수 있었다.




태백산에 들어서자 시작부터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 나타나서 힘들었다. 등산로는 넓고 걷기 편한 육산이었지만 경사가 가파른데다 나의 체력이 평소같지 않았기에 더욱 힘들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몸이 평소같지 않았다.




오르막 급경사가 끝나자 그 끝에 산신각이 나타났다. 아저씨 세 분이 산신각을 보수하고 있었다. 페인트로 산신각을 새로 칠하느라 정신 없이 바빠 보인다. 너무나도 몰입해 일하시기에 인사없이 그냥 지나쳤다.




이후의 등산로는 완만하고 평탄했다. 겨울의 산풍경이라 별 달리 볼 것도 없었지만, 등산로 양 옆으로 산죽이 자라고 있어서 이 겨울에 초록풀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그저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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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사' 에 들러 식수보충을 하고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과 천제단으로 향했다.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잘 정비된 등산로의 느낌이다.




정상부로 오르자 바위가 조금씩 나타나고 얼음이 언 곳은 더욱 많이 나타났다. 얼음이 너무 고와서 꼭 눈이 내린 것 같았다.




돌계단이 끝나자 이번엔 매우 완만한 흙길 등산로가 이어진다. 산을 오르는 묘미가 느껴지는 태백의 등산로가 좋았다.




이 곳 태백산도 주목으로 유명하다. 걷는 내내 침엽수 주목이 초록잎을 보여주었다. 나무는 수명이 다 한 듯 속이 텅 비었는데 가지 끝에는 여전히 푸른잎이 무성하다. 주목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길을 이어간다.




태백산은 처음에만 오르막이 힘들 뿐, 정상부에 다가가면 갈수록 더욱 길이 완만해졌다. 무척이나 신기한 산이다. 완만하다 못해 거의 평지로 느껴지는 곳도 많았다. 산 정상이 이렇게나 넓을수도 있구나.




한참 나무숲길을 걷다가 탁 트인 조망지에 도착했는데 안개가 낀 것인지 시야가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천제단. 별로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정상이었다. 벌써 해발 1,500m 가 넘는다. 신기하다.




태백산은 이런 곳이다. 등산로 초입에서만 조금 고생하면 언젠가부터 가파른 곳 하나 없이 숨 한번 몰아쉬지 않고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지리산이 마음 넓은 어머니의 산이라는데 태백산이 사람을 품는 마음은 그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다. 만물을 아우르는 태백의 온정이 내 마음에도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태백산의 정상에는
'천제단' 이 있는 모양이다.





신께 제사를 올리는 '제단' '하늘 천' 자를 써서 '천제단' 이다. 이곳에서 모시는 신은 부처님이 아니라 놀랍게도 '단군' 이다. 이 나라를 건국하신 단군 할아버지께 제사를 지내는 곳인 것이다.




무척이나 신성한 곳이라서 감히 올라가 볼 엄두를 못 냈는데 의외로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이었다.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한 평상시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이 너무 심한 날이라면 나같은 등산객들이 바람을 피해 천제단으로 숨어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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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올라갈 수 있지만 마음대로 올라갈 수 없는 이유는,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항상' 줄을 서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도 희끗희끗 백발에 넝마를 입은 할아버지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언가를 읊어대고 있었다.




이런 궂은 날씨에도 기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태백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다. 어떤 중요한 기도가 있기에 태백산까지 오르는 것일까?




천제단을 사진에 담고 길을 이어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 때 태백산 정상을 넘나드는 바람이 안개를 걷어갔는데... 아!... 나도 모르게 감탄이 뱉어져 나왔다.




태백산 정상에
눈 꽃이 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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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눈꽃이구나.

진짜 눈이 내린 것이 아니라 수증기가 얼어 가지마다 하얀꽃을 피웠다. 그러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눈꽃' 이 아니라 '상고대' 다. 몇몇의 선택받은 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상고대. 들이 쉬는 감탄이 끊어질 줄 모르고 계속 이어져 나는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태백산의 능선에 죄다 눈꽃이 피었다. 안개까지 더해져 내가 대간길에 있는것인지 꿈길에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눈도 내리지 않은 곳에 이토록 선명한 흰 꽃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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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5~14구간

진행 구간 : 수리봉(강원도 태백)-화방재 비박-태백산 유일사-태백산 천제단(강원도 태백)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2일 화요일

SE-b11ae41c-ad06-4d6f-9fc5-38a5a09e389b.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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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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