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첫 눈의 한가운데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태백산의 주 능선에서 상고대가 피어 올린 눈꽃에 취해 있는데, 안개가 걷히더니 바로 앞 봉우리에 또 제단같은 것이 보였다. 어라? 여기에도 천제단이 있다. 천제단이 두 개 인가?




안내표지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태백산의 천제단은 합이 3군데라 한다. 아까 넝마할아버지가 있던 곳이 '장군단' 이요, 가장 정상부에 있는 곳이 '천왕단' 이요, 조금 더 내려가 아래에 있는 곳은 '하단' 이라 한다. 이 세군데의 제단을 합하여 '천제단' 이라 칭한다고 한다.




SE-7de8571c-d03d-4390-b70c-c9ba70c99142.jpg?type=w1





두 번째로 만난 천왕단에는 여러사람이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능선 아래 천왕단 저편으로 스님이 한 분 서 계신 것이 보였다. 이 추위에, 이 바람에, 고개를 숙이지도 몸을 서성이지도 않고 천왕단을 향해 올곧게 서 계신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스님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것이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자태만으로도 스님의 경지가 어느정도일지 느껴진다. 어느 절의 스님일까?




태백산 정상에 오르면 점심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왠지 이곳에선 함부로 취사를 해서도 안될 것 같고, 함부로 음식을 먹어도 안될 것 같고, 함부로 텐트를 치거나 큰소리로 떠들어도 안될 것 같다.




간절한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는 곳이고 그 기도가 하늘에 닿는 곳이다. 저들의 간절함을 나의 사사로운 행동으로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곳에서 기도를 드리면 산을 비롯한 세상 모든 만물들이 기도를 귀담아 듣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도울 것만 같다.




나의 인생을 통틀어 딱 하나

단 하나의 소원이 생긴다면

이 곳 천왕단에서 빌어보고 싶었다.




천왕단은 나의 기도를 어떤 방식으로 도와줄까? 이 곳에서 올린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생각에서 배제되어 버렸다.





SE-857a9ee2-2b39-4dfe-8e95-e69cacfbff22.jpg?type=w1





겨울바람이 너울거리며 다시 안개가 짙어졌다. 나는 다시 대간을 이어간다. 천제단의 마지막 단인 '하단' 에 도착했다. 하단은 제단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그저 유적으로만 남아있다고 한다. 제단으로서의 기능은 잃었다고하나 생각없이 함부로 단에 텐트를 쳤다가는 급살맞아 죽을 것 같다.




조상님들이 귀히 여기신 곳은

우리도 귀히 여겨야 한다.




천제단과 눈부신 상고대 능선을 남겨두고 까맣고 앙상한 가지뿐인 대간길로 접어 들려니 못내 서운했다. 왜 아름다운 곳에서는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일까?




사람도 그렇다.

아름다운 사람은

지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내 엄마처럼.




정상에서 벗어났는데도 드문드문 상고대가 나타났다. 캬! 반갑다! 기분이 좋다. 한참 걷다보니 갑자기 데크길이 나타났다. 데크 위로 갈색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곧이어 '깃대배기봉' 정상석이 나타났다. 인근의 데크길은 '깃대배기 자연관찰로' 라고 한다. 텐트를 펼치기 딱 좋은 데크도 있었지만 아직 4시 10분.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밝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걷기로 한다.




이어지는 대간길에는 데크와 전망대와 나무벤치가 수시로 나타났다. 그때마다 멈추고 싶은 생각이 강렬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갈수록 아침 기온이 떨어져 종주를 시작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그러니 걸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 했다.




조금만 더 가자.

해가 질 때 당도하는 곳에도

분명 좋은 공간이 나타날 거야.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안개가 짙어 태양이 보이지 않으니 붉어야 할 산능선이 그저 푸른 빛을 띄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사방이 캄캄해진 후에 '차돌베기' 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나무벤치가 있었다.




캬하하!

오늘의 비박지로 딱이구나!

게다가 나무벤치가 다섯 개나 된다!




나는 드디어 배낭을 내리고 텐트를 쳤다. 오늘밤과 내일 아침 이곳에는 비 예보가 있었다. 하지만 왠지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비 대신 눈이 내릴 것 같은 기분!




태백산 천제단에서 나는 그런 계시를 받았다. 비가 아닌 눈이 오리라는 자연의 속삭임을 들었다. 그래서 텐트 위에 우비를 활용한 타프를 치려다가 그만두었다. 만약 눈이 내린다면 올 겨울의 첫눈인데, 그 아름다운 세상을 가리기 싫었다.




버너를 연결해 저녁밥을 지으며 오늘 걸은 길을 지도로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뭔가 낯선 글자가 보인다. 경상북도. 경상북도? 꺄아~!! 태백산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강원도가 끝나고 나는 경상북도로 진입한 것이다!




꺄아아~~~!!!

드디어 길고 길던 강원도가 끝났다!!!

이게 얼마 만이야?




26일 만이었다. 강원도 고성의 진부령에서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지 26일만에 드디어 강원도 구간을 끝내고 경상북도에 들어선 것이다.




기분이 좋았다. 백두대간은 아직도 지나온 길 보다 가야할 길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었지만, 대간길 중에서도 가장 길고 긴 '강원도' 구간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것이다!




흥얼거리며 저녁을 먹고 이 기분을 자축하기 위해 음악을 듣다가 이제 그만 자야지, 하고 이어폰을 뺏을 때 '사라락' 하는 가냘픈 움직임이 내 텐트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앗!
벌써?
설마!




텐트를 빼꼼 열어보았더니

2011년 겨울의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올 들어 처음으로 내리는 눈이

오늘의 내 기분을

함께 축하해주고 있었다.






SE-7db61c8e-c13e-4cfc-8d4c-31d9188f2d64.jpg?type=w1





나는 다음날도 여전히 늦잠을 잤다. 갈수록 날이 너무 추워졌다. 아! 그래도! 어젯밤엔 눈이 내렸잖아! 나는 정신이 들기도 전에 후다닥 텐트를 열었다.





우와아아아아!!





눈은 밤사이 그치지 않고 아침까지 계속 내린 모양이었다. 나의 비비쌕 텐트 위로도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눈이 10cm만 더 왔으면 나의 텐트가 주저앉았거나 눈덩이에 텐트가 파묻혔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 같다. 다행히 지금은 눈이 그쳐 있었다.




텐트에서 등산화를 꺼내 곱게 쌓인 눈 밭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이 사소한 움직임도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아름다운 눈의 세상을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아! 설렌다~!




텐트에서 나와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 어제 저녁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아! 깊은 산 한가운데서 첫눈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게다가 첫눈이 이렇게나 함박눈일 줄이야!




나는 행복감에 젖어 평소에는 하지 않던 주변 산책까지 했다. 텐트 주변으로 평탄한 등산로와 평탄하지 않은 등산로 밖까지 살풋 살풋 걸으며 동화적 상상에 빠져들었다.





SE-abfa9edb-0a7d-42a1-9e6f-a24c0512968e.jpg?type=w1





사실, 내가 원한 종주는 이런 것이었다.




아침이면 천천히 눈을 뜨고

텐트에 누워 아침공기를 들이마시다가

일어나면 가볍게 산책부터 하고




밤동안 정체되었던 몸의 세포들이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제야 천천히 아침밥을 끓이고




밥을 먹고나면 또 기지개 한번 켜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도 한 잔 마시고




나무 한번 보고 짐 하나 싸고

하늘 한번 보고 짐 두개 싸고

햇님 한번 보고 짐 세개 싸고

그렇게 여유자작 배낭을 챙겨




대간길을 걷다가 계곡이 나타나면

발도 담그고, 대간길을 걷다가

너럭바위가 나타나면 낮잠도 자고,

커다란 나무가 나타나면 등을 기대고 앉아

친구들에게 엽서도 쓰고...




산에서만큼은

대간길에서만큼은

시간의 흐름을 알아채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나는 여유를 즐기기는 커녕 빨리빨리 종주를 이어가기만 바빴다. 왜 그랬을까? 왜 대간길에만 서면 다음코스로 이동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오늘만큼은, 그래 적어도 오늘만큼은, 내가 원했던 대간길에서의 여유를 마음껏 누려보자! 최대한 누려보자! 오늘은 첫눈이 내려 소복이 쌓인 축복받은 날이니까!




주변을 산책하며 바라보니 나의 텐트는 더욱 작고 낮게 보였다. 바로 옆의 벤치와 높이가 거의 비슷하다. 정말로 멧돼지가 바위인줄 알고 밟고 지나가려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오늘 나의 비비쌕은 흰 눈에 포옥 안겨 더욱 앙증맞고 귀여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이번에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을 만나면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이 곳은 눈사람을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바닥에 쌓인 눈을 뭉쳐 만들면 눈보다 흙과 먼지들이 더 많은 더러운 눈사람이 만들어지는데, 벤치나 나무탁자 위에 쌓인 눈으로 만들면 하얗고 깨끗한 눈사람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비박을 한 '차돌베기'에는 벤치가 무려 5개나 있었다. 하하하!





SE-f2ce80ed-34cc-40e7-9d32-ed83392c922d.jpg?type=w1





아빠 눈사람, 엄마 눈사람, 아가 둘 눈사람, 4인 가족 눈사람을 만들며 얼마나 행복했던지! 바닥의 얇은 나뭇가지를 주워 웃는 눈과 웃는 입도 만들어주었다.




눈사람을 다 만들고 났더니 어느새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텐트를 탈탈 털어놨는데 다시 보드라운 눈이 쌓였다. 나는 눈사람가족 옆에 앉아 아침 식사를 끓였다. 오늘은 아침식사가 꽤 늦었지만 지나가는 산객이 없어서 불편함도 불안함도 없었다.




눈사람가족과 함께 식사도 하고 율무차도 마셨다. 항상 혼자서 외로운 식사를 하다가 오늘은 친구들이 있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4구간

진행 구간 : 태백산 장군봉(강원도 태백)-깃대배기봉-차돌베기 비박-다음날 아침(경상북도 봉화)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2일 화요일 ~23일 수요일

SE-a8d38394-e698-404f-a725-63f79433b9d1.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 44 -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이전 03화#43. 태백산에 피어난 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