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마음은 '나니아 연대기' 현실은 혹한기 칼바람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다시 눈이 그치고 해가 반짝 떴다.

이제 그만 대간을 이어 가야지.




내가 만든 눈사람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대간종주를 이어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녀석들을 남겨두고 가야 하다니... 부디 다른 산객들을 만날 때 까지 녹지 말고 꿋꿋이 버티렴.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하얀 눈길에 조심히 발을 내딛는다. 오늘의 등산로는 아무도 지난 적 없는 새 길이다. 이 길을 처음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바로 나다.




'최초'를 이루는 사람의 기분으로

오늘의 대간을 시작한다.




눈이 내려 등산로가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적당히 내린 눈은 오히려 등산로를 더욱 선명히 부각시켰다. 종주를 이어가는 내내 산악회의 리본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길만 보며 걷는데도 그 걸음에 막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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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쌓인 눈은 이렇게나 먼 곳에서도 저 끝까지 이어지는 길을 그 어느때보다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정확하고 선명하게 보여지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안도감과 희열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도
이렇게 정확하고 선명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나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고

언제나 길이 불투명해서 두려웠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더이상은 한발짝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눈이 내린 등산로처럼

내 인생도 적당했으면 좋겠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적당했으면'.




별 볼일 없던 겨울의 황량한 산길은 첫눈을 맞아 원더랜드로 변해 있었다. 걷다보니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흩날리는 눈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 안개처럼 흐리게 보이는 시야가 더욱 낭만을 높여주었다.




'신선봉' 에 도착했다. 눈을 맞으며 랄라 했더니 힘든지도 모르고 금방 도착했다. 돌아보면 보드랍고 뽀얀 길에 나의 발자국만 선명했다. 분명 외로운 발자국인데 기분은 왜 이렇게 좋은 것일까? '첫 번째' 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설레게 한다.




이번주 종주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젠과 스패츠를 구입했었다. 아이젠은 등산화 바닥에 뾰족한 쇠를 장착해서 눈 밭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도구이고, 스패츠는 등산화와 등산바지 위로 방수 토시 같은 것을 착용해서 눈이나 비가 발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도구이다.




하지만 아직은 눈 철이 아니라고 생각해 배낭에 챙겨오지 않았는데, 나는 그것을 두고두고 후회해야 했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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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넘이재' 에는 2km 아래에 펜션이 있다는 광고판이 있었다. 산에서의 2km는 하산으로 40분, 등산으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그저께부터 어제 오늘이 계속 추워서 민박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시계를 보고 망설이던 마음을 거둬 그대로 백두대간을 이어간다. 아직 오후 2시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나는 오늘의 함박눈이 무척이나 아까웠다. 오늘 이 함박눈을 두고 마을로 하산하면 내일 다시 똑같은 눈을 볼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온통 하얀 길을 따라 걷다가

넓은 공터가 나타나면 배낭을 내려놓고

눈 밭에 누워도 보고




온통 하얀 길을 따라 걷다가

눈이 높이 쌓인 곳이 나타나면

폴짝폴짝 뛰며 발장구도 쳐보고




아무도 없이 눈만 가득한 곳에서

하고싶었던 모든 것들을 다 해보며 걷는 것은

'자유' 그 자체였다.




걷다보면 새의 발자국도 보이고 토끼의 발자국도 보이고, 주인을 모르겠는 동물의 발자국도 보였다. 평소에 친구하고 싶었던 야생동물들이 이렇게나 내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산에 다니면서 전혀 몰랐던 사실을 첫눈이 알려주었다.




사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외롭지 않았다. 나의 아주 가까이에 내가 원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과 내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무척이나 큰 위안과 기쁨이 피어올랐다.




'고직령' 에 닿자 눈살은 더욱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바람과 눈발이 이제는 거의 눈보라가 되어 휘날리고 있었다. 아까 곰넘이재에서 하산했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 나의 뒷통수를 잡아 당겼다.




하지만 앞을 보면

'나니아' 로 가는 눈의 세상이

어서 빨리 들어오라고

연신 손짓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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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계단의 끝에

천국이 있을 것만 같다!




어느덧 눈은 가냘픈 나뭇가지에도 1cm가 넘게 쌓여있었다. 진짜 눈꽃이 핀 것이다. 어제 태백산 정상에서 보았던 서리가 얼어 피어난 상고대가 아니었다. 진짜 눈이 쌓여 얼은 '진짜 눈꽃' 이었다. 가냘픈 가지마다 눈이 쌓이면 추위가 눈을 얼어붙게 하고 바람이 그 위에 결을 만들어 내었다.




어느덧 '구룡산'. 이곳에 도착하면 사방이 확 트여 주변의 하얀능선을 조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눈보라가 너무 심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곳' 이외의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겐 은빛 실크로드가 있으니까. 아무리 가도 가도 지루하지 않다. 첫눈의 향연이란 이런 것이구나! 오늘 하루는,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것 없이 하얀 눈의 좁은 샛길만 있어도 시작부터 끝까지 온통 '설렘' 이었다.




종일 내린 눈으로 등산로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길이 되어버렸다. 윽... 설산 장비를 챙겨왔어야 했어. 아이젠이랑 스패츠를 챙겨왔어야 했어... 스패츠 없이 걷다보니 나의 발목에는 이미 눈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어느덧 데크길이 나타나고 이어진 데크계단을 내려가 보았더니 엄청 널찍한 임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맞은편 대간길 앞에 팔각정이 있었다.




임도는 산의 양쪽으로 뻗어있었다. 양쪽 모두 어딘가 마을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오후 4시 50분. 바람이 미친듯이 쳐분다. 그리고 곧 어두워질 것이다. 민가를 찾아 내려가야 할까? 바람이 너무 부는데 어떡해야 하지?




하지만 민가에 닿기도 전에 해는 질 것이고, 민가에 도착해서도 민박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지상에 도착했는데 민가는 없고 논뙈기 밭뙈기만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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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팔각정에다 텐트를 치기로 했다. 팔각정의 마루바닥에 쌓인 눈을 등산방석으로 모두 쓸어내고 바람이 직통으로 부는 곳에 바람막이 삼아 우비를 설치했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은 수시로 바뀌었고 나는 왜 쓸데없이 우비를 설치했나 한숨을 쉬어야 했다.




텐트를 설치하는 것도 기깔나게 힘들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립형 돔텐트가 아니라서 마루 위에 설치하는게 더욱 힘들었다. 아무리 해도 각이 안 나오고 마루바닥에 핀을 박을 수 없으니 바람에 따라 텐트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빨리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누워버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허겁지겁 준비를 하는데, 헉! 버너가 두 동강이 나서 굴러나온다. 아하하하하핳하하 울고싶다 하할하하핳하




아냐. 괜찮아!

비록 분리된 버너지만 불을 붙일 수 있을거야.

정신차려!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다행히 분리된 버너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니 사용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가스통이 얼어서 화력이 너무 약했고, 어렵게 어렵게 끓인 밥은 어마무시한 바람 덕분에 다 먹기도 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나는 이 곳에 도착해서 팔각정에 터를 잡고 텐트를 펼치면서도 계속 임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임도에서 차가 올라왔으면... 차가 한 대 올라왔으면... 제발 딱 한 대만 올라와라... 제발 나 좀 구조해 가라...




텐트를 날려버릴 것 같은 강풍에, 정말로 구조대를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고민만 한다. 이것이 정말로 생명이 위험한 상황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으므로.




정말이지 지독한 바람이다. 자고 일어나면 바람박이로 설치한 우비는 날려가고 없을 것 같다. 우비만 날려가면 다행이지. 자고 일어나면 나는 전혀 낯선곳에서 아침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바람에 텐트가 날려가서 절벽 위나 나무 위에 매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나는 텐트 밖으로 어떻게 나와야 하지? 텐트 밖으로 기어나옴과 동시에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독한 바람에 지독한 추위까지.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너무너무 추워서 침낭 안에서 새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으으... 내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긴 글렀다. 어쩌면 내일은 시작부터 종주를 포기하고 마을로 하산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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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춥고 무섭고...

울고 싶다...




으으... 너무 춥다 너무 춥다...

c바... 얼어 죽겠다...




밤새도록 내가 되뇌인 말은 '얼어죽겠다' 였다. 장난이 아니었다. 정말로 얼어죽을 것 같았다. 너무 추워서 내가 잠이 든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시종일관 비몽사몽이었다.




당연히




오늘도 늦잠을 잤다. 연이은 날동안 계속 이런 식이라면 이건 늦잠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시간이 이 시간인 것이다. 제기랄.




밤 동안 바람은 멎었지만 바람이 멎은 이후로 추위는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지구가 멸망할 듯 불어닥친 바람에도 적당히 묶어놓았던 우비가 날려가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2단으로 분리 된 버너를 꺼내 아침밥을 끓였다. 추위는 심해도 바람이 불지 않으니 어제처럼 밥이 금방 식어버리지는 않았다.




서둘러 짐을 싸고 서둘러 대간 종주를 이어간다.

점점 종주가 늘어져서 마음이 급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4구간

진행구간 : 차돌베기(경상북도 봉화)-신선봉-곰넘이재-고직령-구룡산-팔각정자 비박(경상북도 봉화)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3일 수요일

SE-e6f809af-1966-4c8d-b219-3a5415a9cd0b.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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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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