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당신의 발자국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다음코스인 '도래기재' 방향으로 이어진 길을 걷는다. 동쪽으로 난 능선은 오전의 햇빛을 받아 눈이 거의 녹아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산의 봉우리를 올려다보면 눈 덮힌 하얀 능선이 쨍하게 파란 하늘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어제는 눈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세상이 오늘은 이렇게나 선명히 보인다. 파란 하늘과 함께.
그리고 어제보다 더욱 선명한 눈 위의 동물 발자국.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기 전 덕유산에 갔을 때, 구천동 탐방안내센터에서 동물발자국 스탬프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국립공원 엽서세트를 사서 뒷면에다 동물발자국을 콩콩 찍어왔었는데, 스탬프의 발자국과 비교해보니 이것은 아마도 청설모인 모양이었다.
다람쥐는 겨울잠을 자지만 청설모는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다.
꺄아아~~~
눈밭을 달리는 청솔모라니!
너무 귀엽잖아!! 꺄아아아~~~
녀석, 발이 시리진 않았을까? 어떻게 그 작은 몸뚱이로 겨울잠도 자지 않고 이 혹한기를 버텨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동물의 발자국이 나타날 때 마다 엽서를 꺼내어 발자국을 비교해 보았다. 하지만 나의 엽서에는 없는 발자국이 눈 밭에 많이도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산에는 이렇게나 다양한 동물들이 있는 것이다.
서쪽으로 난 등산로는 눈이 전혀 녹지 않았다. 춥기는 해도 오늘은 날씨가 참 좋은 날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저 멀리의 산 능선까지 모두 또렷하게 보였다. 탁 트인 전망지가 나타난다면 정말이지 끝내줄 것 같다.
능선의 칼등을 걸으면 해가 있는 동쪽으로는 눈이 하나도 없고, 해가 없는 서쪽으로는 눈이 그대로 있었다. 그 경계를 걸어가는 느낌은 또 새로운 것이었다. 세상의 경계를 걷는 기분이다.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정확히 가운데를 걷는다.
쌓인 눈 위로 참으로 다양한 동물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크기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신기한건 동물들도 등산로가 편한 것인지 등산로를 따라 꽤 많은 거리를 이동하기도 했다. 오늘 하루 백두대간에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누구의 발자국일까?' 였다. 누구인지 궁금했고 직접 만나보고 싶었고 친구삼고 싶었다.
88번 지방도와 만나는 '도래기재' 에 닿았다. 도래기재에는 터널도 아닌, 야생동물 이동로 같은 것이 짧게 있었는데 거기에 '경상북도' 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강원도를 벗어나
경상북도에 진입했다는 것이
다시 한번 떠올려지면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여기에서 물을 채워야 했는데 아무리 지도를 들여다봐도 물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어떤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와 임도의 '출입통제' 울타리를 열고 산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길 건너의 아저씨를 목청껏 불렀다.
"아저씨이~~~ 여기~~~ 물 뜨는데~~ 어디에요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
"풀등? 여기 산이 다 풀등이지 뭐."
"아니, 아니요오~~ 물 뜨는데요~~~"
"그러니까 여기가 다 풀등이라니까! 추운데 풀등엔 왜 가려고?"
"아니, 아저씨. 물이요! 물! 물!!!"
나는 거의 화내듯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제야 아저씨는
"아~ 물! 여기 도로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팔각정이 나와. 그 옆에 물이 있어." 하신다.
나는 또 화내듯이 고함을 질러 "감사합니다~!" 라고 고래고래 인사를 했다. ㅋㅋㅋ
아저씨의 설명대로 도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내려갔다. 8분쯤 걸으니 팔각정과 함께 소풍을 즐길만한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물은? 아무리 둘러봐도 약수터나 음수대가 없었다. 하다못해 짧은 호스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물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백두대간으로 돌아간다. 이어지는 박달령에도 물 표시는 있었으니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백두대간을 따라 옥돌봉으로 오르다보니 이번엔 동물이 아닌 사람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누군가 나를 앞서 이 길을 지난 것이다. 발자국을 보니 그 사람도 나처럼 백두대간을 타는 모양이다. 발 크기도 나와 비슷하고 나처럼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았다.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니 갑자기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그 사람도 여자일까? 아니면 발이 작은 남자일까? 언제쯤 지나갔을까? 빨리 걸으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몇날 며칠 홀로 걸은 백두대간. 오늘쯤 친구 하나를 만나고 싶었다.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한 이후로 나는 발자국만 보며 걸었다. 주변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 사람의 발자국과 동물의 발자국이 나란히 함께 걸은 자국도 나타났다. 둘 중 누가 먼저 지나갔을까? 분명 사람과 동물이 함께 걷지는 않았을텐데 눈밭의 발자국은 나란히 함께 걸은 것 처럼 보였다. 그런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보폭을 보니 나와 키도 비슷한 것 같다. 그는 아마도 여자인 모양이다. 어느 평평한 길에서는 무심코 걸어도 그의 발자국에 나의 발걸음이 정확히 일치한다. 지금껏 대간을 걸으며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그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진다. 발목을 넘어 종아리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다. '옥돌봉' 직전에 '550년 된 철쭉' 안내판이 있었다. 무려 산림청에서 직접 제작한 안내판이었다. 비록 철쭉은 없지만 철쭉만큼 예쁜 눈 덕분에 아쉬움이 없는 오늘의 산행.
그러다가 나는, 앞서 간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발자국이 한번 녹았다가 다시 얼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지나간 지 꽤 오래 된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이곳을 지나간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새벽산행으로 지나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 갑자기 슬퍼졌다.
외롭고 쓸쓸한 겨울 산에
그의 발자국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걸었다.
그런데 그 희망이 꺾여버린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와 발크기가 똑같은, 보폭마저 똑같은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어쩌면 나는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홀로 걷는 사람이 나와 발크기가 똑같을 수 있을까? 어떻게 보폭마저 똑같을 수 있을까? 아! 엄마다! 엄마가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나봐!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걷다보면 저 앞 눈이 쌓인 나무벤치에 나와 나이가 똑같은 나의 젊은 엄마가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나를 보고 "안녕? 드디어 만났네."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줄 것만 같았다. 그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쉬지 않고 걸었다. 엄마를 만나고 싶어서.
아... 갑자기 사무치게 슬퍼졌다.
엄마는 어디로 가 버렸을까?
왜 내게는 단 한번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꿈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엄마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옥돌봉' 에 닿았다. 나무가 빽빽해서 별다른 조망은 없었지만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에 반짝이는 저수지의 수면이 보였다. 벌써 오후 3시. 기울어 가는 햇빛을 받아 저수지가 거울처럼 빛난다. 저 거울에 나의 얼굴을 비추어 보고 싶다. 나의 얼굴을 비추면 분명 엄마의 얼굴이 보이리라.
옥돌봉을 지나 이번엔 '박달령'으로 향한다. 박달령에서는 반드시 물을 구해야 한다! 어디에선가 만난 벤치에는 고드름이 얼었고, 또 어디선가부터는 하나 뿐이던 사람의 발자국이 무수히 많아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간 것인지 발자국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나타나 내 앞으로만 지나간 거지? 임도도 만나지 않은 등산로에서 갑자기 사람 발자국이 늘어난 것이다. 이 근처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샛길 등산로 있는 것일까?
얼마 안 가 박달령에 도착했다. 오후 4시. 임도와 만나는 박달령에는 주차장처럼 엄청 넓은 공터에 나무테이블과 벤치도 있고, 어제 내가 잠잔 곳과 비슷한 팔각정과 신을 모시는 산신각도 있었다. 아마도 무수한 발자국의 주인들은 이곳에서 올라와 근처만 돌아보다가 다시 내려가버린 모양이었다. 쌓인 눈 위로 자동차 바퀴와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나는 일단 물을 찾아야 했다. 물이 100ml도 남지 않았다. 친절하게도 '박달령 옹달샘' 방향으로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박달령의 옹달샘은 무척이나 깊은 안부에 있어서 이정표가 없었다면 절대로 찾지 못했을 것이다. 옹달샘의 배수관이 얼어버린 것인지 흘러나오는 물은 전혀 없었다. 대신 아래 웅덩이에 담겨있는 물이 있어서 그 물을 물병에 담았다. 웅덩이에 고여있는 물이었지만 투명한 물병에 담으니 맑고 깨끗했다.
다시 박달령의 임도로 올라왔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여기다 여장을 풀기로 했다. 테이블이 있던 팔각정에 텐트를 칠까 하다가, 어젯밤의 추위가 다시 떠오르며 두려움이 몰려왔다. 오늘도 어제처럼 지구를 멸망시킬 것 같은 바람이 불어닥치면 어떡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사방에 벽이 있고 지붕도 있는 산신각에서 자기로 마음을 굳혔다. 약간 무서웠고 이런 곳에서 자도 되는지 걱정도 되었지만, 어제의 추위를 한번 더 겪느니 차라리 귀신한테 혼구녕이 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4~13구간
진행구간 : 팔각정자(경상북도 봉화)-도래기재-옥돌봉-박달령 비박(경상북도 봉화)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4일 목요일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 46 -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