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미친 바람보다 차라리 귀신이 낫다!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산신각의 문을 열고 이 곳의 '주인 신' 께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하룻밤 신세를 져도 되겠는지 여쭈었다.




답이 없다.




거절의 대답이 없으니 허락한 것으로 알겠다고 말씀드리고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구석에 있던 빗자루로 산신각 나뭇바닥을 깨끗히 쓸었다.




밖에서 보면 그냥 '집' 같아 보이는 산신각은, 막상 안으로 들어가보니 지붕과 벽에 15cm 정도의 틈새가 있었다.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 아니라서 통풍을 위해 지붕과 벽을 띄어 설계한 모양이었다.




바람을 막을 수는 있어도 추위까지는 막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어디랴. 어제와 같은 바람만 피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 없었다.




산신각의 입구가 서향이라서 다행이었다. 산신각의 마룻바닥에 앉아 열린 문으로 깊은 겨울의 낙조를 바라보았다. 낮동안 쨍하게 파랗던 하늘은 저녁이 되자 붉디 붉은 노을을 선사했다. 산신각에 앉아 이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니... 태양의 붉은 기운이 두려움을 조금씩 걷어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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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문을 닫았다. 다행히 안쪽에 잠금쇠가 설치되어 있어서 문을 잠그고 잘 수 있었다. 오밤중에 누군가 찾아 오더라도 함부로 문이 열리진 않겠구나.




문을 걸어 잠그고 저녁을 끓였다. 오늘은 실내취침이라 텐트는 접어두고 침낭만 꺼냈다. 침낭을 몸에 두르고 앉아 두 손을 집어넣고 그저 밥이 끓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 그렇게 편할수가 없었다.




밤새 밖에서는 바람소리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그토록 무서운 바람도 산신각 안으로는 전혀 들이치지 못했다. 천장과 벽 사이에 공간이 있는데도 말이다. 신기했다. 산신각의 '주인 신' 이 나를 지켜준 것일까?




덕분에 나는
아주 달게
잘 잤다.




밤새 곤히 잤다. 중간에 한번도 깨지 않았다. 대간길에서 자는 동안 한번도 깨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산신각의 '주인 신' 은 휘몰아치는 칼바람도 막아주고 내가 푹 잘 수 있도록 자장가도 불러준 모양이다.




아침을 끓이려고 보니 헉! 물병의 물이 꽁꽁 얼어있다. 실내에서 잔다고 너무 안심한 것이 문제였다. 어제 옹달샘에서 채워 온 물통을 모두 꺼내어 쪼로록 세워놓고 잠을 잔 것이다. 실내라서 당연히 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얼어버린 것은

너무 심하잖아? 그래도 실내인데!




생수병에 들어있는 물은 정말이지 완벽하게 얼어버려서 육안으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간밤에 물병의 물이 사라져버린 것인 줄 알았다. 아무리 뒤집어 봐도 물병 속에 움직이는 기포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락앤락물병은 가운데 얼지 않은 물의 기포가 왔다갔다 했다. 꽁꽁 얼어버린 물병과 대면한 순간, 너무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추운 곳에서 달게 잘 잔 것이 기적이구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물 만들기에 돌입했다.




① 젓가락으로 락앤락물병의 입구 얼음을 뚫는다.

② 가운데 얼지 않은 소량의 물을 코펠에 붓는다.

③ 물을 끓인다.

④ 끓인 물을 락앤락물병과 생수병에 조금씩 붓는다.

⑤ 두개의 물병을 마구 흔든다.

⑥ 두개의 물병 속 녹은 물을 코펠에 붓는다.

⑦ 다시 끓인다.

⑧ 3~6번 순서 무한반복...




그렇게 두 개의 물병을 거의 다 녹인 후 드디어 아침밥을 끓일 수 있었다. 아! 아침 한끼 먹기 정말 힘들다.




나중에 나중에 동행을 구해 함께 비박을 다니면서 알게 된 꿀팁은, 이렇게나 추운 계절에는 잠자기 전에 물을 코펠에 부어놓고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은 당연히 밤 사이 얼 것이고, 물병의 물이 꽁꽁 얼어버리면 아무것도 못하지만, 코펠의 물은 얼어버려도 바로 버너에 올려 녹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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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다 먹고 짐도 다 싸고

떠나기 직전에 산신각 주인께

다시 인사를 드렸다.




산신각의 구석에 있던 종이컵을 후후 불어 깨끗이 한 후, 재단 위에 있던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 올렸다. 안주로는 내 배낭에 있던 캬라멜 2개를 까서 드리고 절을 두 번 드렸다.




밤 사이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안히 잘 자고 갑니다.
혹시 다음에도 인연이 되면
그때도 좀 재워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선달산 방향으로 종주를 시작한다. 이번주,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간에 시작하는 등산이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이나 좋다. 햇빛은 쨍쨍 바람은 한 점도 없다. 밤사이 물이 꽁꽁 얼지 않았더라면 기온이 그렇게 내려갔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산신각 안에서 포근하게 잘 잤으니까.




어제와 비슷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눈이 녹은 곳과 전혀 녹지 않은 곳이 번갈아 나타난다. 동물의 발자국도 어제처럼 선명하다. 멧토끼의 발자국을 보고 하하 웃음이 나왔다. 멧토끼의 발자국은 앞발은 옆으로 나란히, 뒷발은 앞뒤로 나란히다. 이 신기한 발의 위치로 깡총깡총 뛰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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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세석대피소에서 봤던 멧토끼는 굉장히 귀여운데 털색은 멧돼지와 같은 잿빛이었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전혀 놀라지 않고 그저 풀 뜯기에 여념이 없던 녀석들. 하하하




눈이 쌓인 곳에서는 어제보다 더욱 푹푹 빠진다. 이제는 3일째, 제법 견딜만 하다. 스패츠도 없이 눈이 발목으로 들어오는데도 신경쓰지 않는다.




넓은 공터가 나오기에 눈밭에 벌렁 누워버렸다.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눈밭에 누워보고 싶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터 눈밭에 굴러보고 싶었는데 그 오랜 소원이 백두대간에서 이뤄진 것이다. 누워서 하늘과 겨울나무를 보다가 일어나보니 내가 누워있던 자국이 웃겼다. 꼭 날개짓 하는 잠자리 같았다. 몰랐는데 내가 팔을 날개처럼 파닥거린 모양이었다. 하하하




어제 그의 발자국은 오늘의 코스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과 나의 발자국이 함께 포개어졌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다. 그의 발자국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어느구간에서는 꽤 오랫동안 발자국이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다시 발자국이 나타난다. 그는 이 구간을 날아서 간 것일까?




'선달산' 에 도착했다. 앞서 가던 발자국의 주인은 정말로 신기한 존재다. 어제 처음 만난 도래기재에서 여기까지, 나는 1박2일이 걸렸는데 그는 잠시 쉬어간 흔적도 없었다. 배낭을 내린 흔적도 없고 쉬어가느라 발자국이 난잡하게 찍힌 흔적도 없었다. 심지어 뒤돌아보거나 머뭇거린 흔적도 없다.




눈이 많이 쌓인 곳과 바위가 있는 곳은 길이 헷갈릴 법도 한데 그는 알바(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를 한 흔적도 전혀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어제부터 나는 그의 발자국만 바라보며 걸었다. 덕분에 애써 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쉬지도 않고 이 거리를 한번에 쭉 내달린 것일까? 새벽에 시작해서 어두운 저녁까지 계속 걸은 것일까? 잠시도 쉬지 않고?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이 먼 거리를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이어서 걸을 수 있는 것일까? 정말로 사람이 맞긴 한 걸까? 나는 또 엄마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 쌓인 산에서 길을 잃지 말라고 엄마가 미리 표시를 해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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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달산 정상에는 헬기장처럼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나무가 많아서 탁 트인 조망지는 없었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딱 한뼘의 능선이 보일 뿐이었다. 오늘의 등산로는 그저 나무를 보며 걷는 길이다. 가슴까지 탁 트이는 조망지는 없다.




선달산 정상에서 점심을 끓여먹고 막 출발하려고 할때 반대편에서 산악회 사람들이 대여섯 올라왔다. 밥을 다 먹고났을 때 그들이 와서 다행이었다. 혼자서 밥 먹다가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면 얼마나 민망할지. 하하하




그들 덕분에 이어지는 등산로에는 발자국이 많았다. 이제는 눈 쌓인 등산로를 처음 걷는 낭만도, 앞서 간 그와 발자국을 포개어 걷는 낭만도 없다. 이제 엄마 생각은 그만하고 나의 갈 길을 가자.




낮은 곳에서는 바람 한 점 없다가 해발이 높아지면 조금씩 바람이 불었다. 햇볕은 강렬하지만 날은 제법 쌀쌀하다. 등산로의 내리막을 내려오고 내려오고 내려와서 도착한 늦은목이에는 '소백산 국립공원' 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소백산인 것이다.




원래 이번주의 계획은 소백산을 다 넘어 반대편 끝자락인 '죽령' 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강추위 덕분에 매일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서 계획된 코스를 다 밟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 '늦은목이' 를 지나 '마구령' 까지만 가고 거기서 하산하여 서울로 돌아가야겠다.




늦은목이에서 갈곶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소백산 국립공원의 구역이면서 동시에 '산불방지 통제구간' 이었다. 평소에는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곳이지만 대기에 습기가 없고 바람이 많은 '산불방지기간' 에는 혹시 모를 산불을 대비하여 통제를 하는 것이다.




갈곶산 방향으로 '입산금지' 현수막이 버젓이 걸려있는데 나는 기어이 선을 넘어버렸다. 선을 넘고 나니, 나는 다시 그의 발자국과 단 둘이 하게 되었다. 소백산의 첫번째 꼭지점인 갈곶산.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3구간

진행 구간 : 박달령(경상북도 봉화)-선달산-늦은목이(경상북도 영주)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episode47.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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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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