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소백의 능선은 험하지 않았지만 오르막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는 닷세 동안 추위와 너무 심하게 싸워야 했고, 누룽지와 양갱과 초코바 만으로 버텼더니 체력이 한계에 도달한 듯 기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갈곶산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마구령'까지 절반쯤 갔을 즈음 헬기장이 나타났다. 나는 또 드러누워 버렸다. 이번엔 낭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체력이 바닥나서 였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헬기장을 지나자 이번엔 끝도 없이 내리막만 나타났다. 마구령은 임도와 만나는 곳이라서, 아까 지치도록 올라온 만큼 이번에는 지치도록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역시 국립공원은 다르구나. 덩어리부터가 다르다. 어제 그제 발목까지 빠지던 눈밭은, 소백산에 접어들자 종아리까지 빠지는 길로 바뀌었다. 앞서 간 그 사람은 등산로의 가운데가 아닌 나무 뿌리와 인접한 갓길로 조심스레 내려갔다. 그도 나처럼 스패츠가 없는 모양이다.
소백산권에 들어서니 드문드문 바위도 나타났다. 암릉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길에서는 등산로가 어디인지 몰라 잠시 헤매야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발자국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눈 위에 찍혀있었다.
그가 디딘 곳만 정확히 밟으면 나는 길을 잃을 염려도, 미끄러질 염려도 없었다. 암릉 위에서도 그는 발걸음이 정확하다. 헤매거나 두어번씩 움직인 흔적도 없다. 그는 어떻게 이다지도 정확히 길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산신령인 것일까?
해가 들지 않는 능선 아래로는 그늘이 어둠을 만들고, 깊게 쌓인 눈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얀 눈과 푸른 어둠 위로 태양을 받은 여린 가지들이 동화속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길
정말이지 지친다.
지겹도록 지친다.
나무가 빽빽하여 사방이 차단되니 갑갑하고 미치겠다. 탁 트인 곳에서 주변 능선을 둘러보고 싶은데 그런 곳이 나타나지 않는다. 가도 가도 빽빽한 나무숲 뿐이다.
하지만 이제 거의 다 왔다. 이젠 진짜 마지막이다. 500m도 안 남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 체력이 바닥나서 똑바로 걸을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 비척대며 갈지자로 걸어야 했다.
드디어!
드디어 마구령이다!!
으아아아~~~ 다 왔다~!!!!!
임도를 건너 다시 산길을 이어가면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 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그쪽도 통제이긴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나는 여기까지다. 더이상은 길을 이어갈 힘이 없다. 나는 임도를 따라 경북 영주시의 남대리로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단 한 대의 자동차를 발견하고 애타게 손을 흔들었다. 저 차를 잡지 못하면 여기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손을 흔들었다. 온 몸으로 손을 흔들었다. 예술가의 느낌을 풍기는 아버지와 중학생 딸이 탄 트럭이었다.
그들은 나를 버스정류장에 내려주고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 알고보니 그들의 집은 산자락 입구에 있었는데 죽을듯이 사정하는 나를 불쌍히 여겨 마을로 한참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었던 것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했다.
시골의 버스정류장에서는 한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히치하이킹으로 버스가 자주 오는 곳 까지 가고 싶었지만, 그 한시간 동안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아아... 춥고... 배고프고... 힘들다...
경북 영주에서 탄 시골버스는 나를 충북 단양에 내려주었다. 하지만 단양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이미 서울로 가는 막차가 끊겨 버렸고, 그래서 나는 단양에서 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제천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다.
아아... 죽도록 힘들다.
좀비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시체처럼 뻗어버렸고, 그렇게 또 열흘을 쉬어 버렸다. 쉰 건지 앓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 삼 일은 앓듯이 누워있었고
그 다음 삼 일은 조용히 쉬었는데
마지막 삼 일은
다시 산이 그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 나 왜 이래...
정말로 미친건가?
그렇게 고생을 해놓고
왜 또 대간이 그리운거야.
그리하여 열흘째가 되는 날
나는 다시 소백으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경북 영주의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여기서 부석사까지 얼마에요? 아니 아니, 마구령까지요."
다시 대간을 이어가야 하는 소백산의 마구령은 무량수전이 있는 그 유명한 '영주 부석사' 를 지나야 나타난다.
"마구령은 못 가요. 눈이 많이 내려서."
"갈 수 있어요! 거기는 출퇴근 차량이 많아서 제설작업이 다 되어 있어요."
이것은 열흘 전, 그곳에서 하산하며 히치하이킹을 했을 때 알게 된 정보였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차량은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내가 가는 방향으로는 차가 지나가지 않았다. 한참만에 나타난 단 한대의 차를 얻어타고 마을로 내려오며 들은 정보에 의하면, 영주에 살면서 단양으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마구령을 넘어서 다닌다고 했다.
"아저씨, 여기서 부석사까지 가면 얼마나 나와요?"
"이만 오천원? 이만 칠천원? 그정도 나올 겁니다."
"그러면 아저씨, 마구령까지 삼만원에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뭐 그러죠. 그렇게 합시다."
"네! 감사합니다~"
택시에 앉아 드라이브 하듯 편하게 마구령까지 갔다. 부석사를 지나고도 한참이나 더 들어가야 마구령이 나타났다. 택시 기사님께 금액을 협상하지 않고 미터기를 켜고 갔다면 3만5천원이나 어쩌면 4만원까지 나왔을 거리였다.
택시에서 내려 등산을 시작하기 전, 월동장비인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했다. 아이젠은 등산화 바닥에 뾰족한 쇠를 장착해서 눈 밭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도구이고, 스패츠는 등산화와 등산바지 위로 방수 토시 같은 것을 착용해서 깊게 쌓인 눈 밭을 걸어도 눈이 발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도구이다.
열흘 전 등산에서는 갓 내린 눈이었기에 아이젠이 없어도 미끄러지지 않았고 스패츠가 없어도 바지와 양말에 묻은 눈이 금방 털어졌지만 이번엔 아닐 것이다.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한 눈은 아이젠 없이 한 발짝도 이동할 수 없다.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한 눈이 바지와 양말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리 털어내도 털어내지지 않는다.
'산불방지기간 입산금지' 현수막을 넘어 소백산의 '고치령' 으로 향한다. 현수막을 넘어서니 발자국들이 무수하게 찍혀 있었다. 주말동안 산악회 무리들이 지나간 모양이다. 초입부터 등산로가 선명하게 다져져 있으니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열흘 전 하산했을 때 보다 눈이 한뼘이나 더 쌓여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떠난 이후로도 계속 눈이 내린 것이다.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선행자들의 발자국이 더욱 깊게 파여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이나 좋다. 햇볕이 강렬해 눈이 내릴 것 같지 않은 날씨다. 하지만 이곳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시야는 계속 답답했다. 탁 트인 조망구간이 전혀 없이 나뭇가지로 빽빽한 길만 이어진다.
소백산의 동쪽 코스는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한 길이다.
그러니 산불방지 기간이면 서쪽코스만 개방하고 동쪽코스는 모두 통제를 하는 것이다. 백두대간이 아니면 이 쪽으로는 사람들이 지나다닐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백산은 봄 철쭉과 함께 겨울 눈꽃으로 유명한 곳이라, 서쪽코스로는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온다.
눈이 높이 쌓인 곳은 발자국이 하나로 줄었다가 눈이 낮게 쌓인 곳은 발자국이 여럿으로 늘었다가 한다. 아마도 발이 푹푹 빠지는 곳은 모두 선두의 발자국을 정확히 따라가며 산행 한 모양이다. 나도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해야 눈 밭에 발이 덜 빠진다.
땅을 보며 걷다보니 낙엽화석이 보였다. 얼은 눈덩이에 겨울낙엽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이 직사각형으로 분리되어 전시라도 하듯 오롯이 서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 조망할 것이 전혀 없는 등산로가 나에게 이런 소소한 기쁨을 안겨준다.
한 낮의 햇빛을 받아 눈이 녹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을 많이 받은 등산로는 눈이 다 녹아 선명한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길이 선명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는 녹아내리는 눈을 붙잡고 싶었다. 좀 더 깊은 눈의 낭만을 느끼고 싶었다.
또 다시 임도와 만나는 길. '고치령' 에 도착했다. 이 곳에도 산신각이 있어서 오늘은 여기서 쉬어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고치령의 산신각은 너무 좁았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재단이 놓인 장소가 전부였다. 나의 침낭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
아직 해도 떠 있으니
조금 더 이동하자.
걷다보니 어느덧, 석양의 붉은 띠가 지구에 허리띠를 둘렀다. 그리고 조금 더 걷다보니 어둠까지 몰려왔다. 반쯤 가리워진 달님은 오늘따라 더욱 기품있는 빛을 내뿜는다. 그동안 대간길에서 본 달님 중 오늘의 달님이 가장 고혹적이다. 나의 입김이 달님의 볼에 닿을 것 같다.
날은 계속 어두워지는데 나는 계속 좁은 등산로를 걷고 있었다. 눈이 이렇게나 많이 쌓여있으니 헬기장이 아니고서야 공터가 나타나도 공터인 줄 구분이 안간다.
그러다가 고치령에서부터 1.9km 이정표를 지나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쪽 능선을 바라보았는데, 그 쪽 둔덕에 왠지 평평한 땅이 형성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등산로를 이탈하여 능선 위로 올라갔다.
눈 쌓인 둔덕은 온전하게 평평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텐트를 치기에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지체없이 배낭을 내리고 비박모드에 들어섰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3구간
진행 구간 : 마구령(경상북도 영주)-미내치-고치령-고치령에서 1.9km 비박(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12월 5일 월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