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홀로 눈길을 헤치며 나아간다는 것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눈밭에다 텐트를 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텐트를 치기 전에 일단 자리부터 다지기로 하고 눈을 꾹꾹 밟았다. 폭신한 눈이 제법 많이 쌓여있어서 위에다 그대로 텐트를 펼치면 내 발이 지나간 자리만 움푹움푹 가라앉았다. 그래서 텐트 칠 자리를 전체적으로 밟아 한꺼풀 가라앉힌 뒤 그 위에다 텐트를 펼친 것이다.
눈밭 위에 텐트를 쳤는데도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역시 추위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온이고 기온보다 더 강력한 것은 겨울의 칼바람인 것이다.
기온이 포근하고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9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처음 종주를 시작할 때는 여름같은 초가을이었다. 그때는 일출시간이 6시쯤이어서 나도 항상 6시쯤 눈을 떴었다. 그런데 일출시간과 함께 나의 기상시간도 점점 늦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8시가 넘어야 겨우 눈을 뜨고, 어떤 날은 9시까지 세상 모르고 잔다. 추위와 싸우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고,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출즈음 잠이 깨어도 날이 너무 춥다거나 아직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다시 침낭속으로 파고들게 되는 것이었다.
매일 늦잠을 잤다고 스스로를 책망하곤 했는데 그러지 말아야겠다. 지금은 겨울이다. 칼바람이 불고 눈이 쌓인 겨울이다. 사람도 동물인 즉,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적당한 시간에 일어난 것이다.
텐트 밖으로 기어나와 여느때처럼 텐트와 침낭부터 배낭에 싸놓고 국밥을 끓였다. 그런데 버너의 화력이 너무 약하다. 평소처럼 밥이 끓지 않는다.
아무 생각없이
눈바닥에 가스통을 놓아두고
불을 붙인 것이다.
추운 계절이면 가스통을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냥 흙바닥도 아닌 눈밭 위에 가스통을 바로 놓고 사용했으니 가스도 얼어서 화력이 나지 않는 것인데, 가스가 다 되었나? 새로 산 버너가 이상한가? 하는 생각만 했다.
나중에 나중에 알게 된 상식에 의하면 추운 계절에는 가스통에 워머를 씌워줘야 하며, 워머만으로도 화력이 나오지 않으면 가스통 아래 핫팩을 놓아두고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학교공부를 무시한 덕에 산에서 이토록 고생만 하고 있었다. 사실은 학교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들 이론을 일상에 접목할 창의력도 부족했다.
결국은 미지근하게 끓다 만 밥을 먹고 종주를 이어간다. 그래도 뭐라도 먹었으면 다행인 것이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눈이 하나도 내리지 않았는데 밥을 다 먹고 종주를 이어가려니 눈발이 하나 둘 날리기 시작했다.
꺄아~!!
눈이다!!!
나는 지난번의 고생을 잊고 눈이 내리자 그저 좋아서 폴짝거렸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건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건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단순하고 바보같았다. 순수한건지 멍청한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나란 사람.
지난번 종주와 마찬가지로 소백의 능선은 여전히 빽빽한 나무숲에 가려진 길이었다. 겨우 겨우 보이는 앞쪽 능선은 손바닥 한뼘 정도가 전부였다. 아마도 주봉인 비로봉에 닿기까지는 계속 이런 길만 이어질 것 같았다.
산에서 며칠째 시야가 막혀버리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하루 온종일만 막혀도 미칠 것 같은데 며칠째 이런 길만 이어진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렇게 꽉 막한 곳을 걸어야 한다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나의 기분을 달래주는 것이
나풀나풀 날리는 눈이었다.
내리는 눈을 벗 삼아 길을 이어간다.
암릉이 제법 나타났다. 소백산에 들어선 이후로 암릉이 수시로 나타났지만, 그때마다 나는 선행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길을 잃지 않고 별로 힘든지도 모르고 대간을 이어갔다.
앞선 사람의 발자국은
이렇듯 소중하고 위대하고
때로는 뒤따르는 자들의
목숨을 보전하기도 한다.
산에서도 삶에서도.
보드랍게 쌓인 갓 내린 눈이 바위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게 나를 잡아주었다. 어제는 햇볕이 너무 쨍쨍해서 쌓인 눈이 모두 녹아버릴까봐 조마조마 했었다. 제발 해가 가리우고 눈이 내리길 기도했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부니... 선행자들의 발자국이 지워진 곳이 많았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그나마 암릉주위는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어 발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 바위에 남아있는 발자국 덕분에 나는 길을 잃지 않고 대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런 날씨에 이렇게나 높게 쌓인 눈밭에서 길을 잃고 다른 곳을 한참이나 헤매게 된다면... 아아...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온통 겨울나무 뿐인 소백산.
낮게 날리는 눈발이 연무가 낀 듯 아련했다. 아무도 없는 눈 산을 홀로 나아가는 것도 힘들었고, 점점 마음이 울적해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낮게 깔린 날이면 나는 언제나 울적했다.
눈이 잔뜩 쌓인 비탈에서는 나무를 껴안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럴때면 나는 이 나무가 사람인냥 착각하게 된다. 가끔은 그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눈은 점점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갈수록 발자국이 지워진 구간이 많아졌다. 방금 내린 눈이 벌써 이만큼이나 쌓여서 발이 푹푹 빠졌다.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걷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길,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홀로 헤치며 걷는 것, 등산용어로 '러셀(russell)' 이라고 하는 그것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체력을 앗아갔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암릉이 일반 등산로보다 더 힘든 구간인데, 이렇게나 눈이 내리는 날씨에는 발디딜 공간이 선명히 보이는 암릉이 오히려 발자국 없는 평지보다 걷기가 수월했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순백의 눈밭을 지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더불어 쓸쓸하고 고독한 일이었다. 나는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오후 1시 30분. 연화동삼거리에 도착했다. 여전히 나무들로 인해 시야는 가려졌지만, 이 때부터 눈이 그치고 가끔씩 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퍼져버렸다.
체력이 바닥 난 것이다.
눈이 그치고 해가 났지만, 오전 내내 쌓인 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선행자들의 발자국은 모두 지워지고 스스로 눈을 헤치며 나아가야 하는 길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하아...
겨울산을 홀로 지난다는 것은
이토록 힘든 일이구나...
앉아 있을 힘도 없어 눈밭에 누워버렸다. 살짝 내려놓은 등산스틱은 눈에 폭 파묻혀 손잡이만 겨우 보였다. 나도 저렇게 파묻혀 영영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율무차로 몸을 녹였다. 보온병을 챙겨 와 얼마나 다행인지. 지난번 첫눈이 내린 대간길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 이번에는 보온병을 챙겨왔다. 춥고 바람이 불면 따뜻한 것을 먹어 몸을 녹여야 하는데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면 가스를 켤 수 없었다. 율무차로 온기와 당을 채우고 다시 길을 이어간다. 자! 힘 내자, 힘을 내야지!
발은 점점 깊게 빠진다. 종아리까지 빠지던 눈밭이 이젠 무릎까지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바람이 눈밭에 그려놓은 물결은 아름다웠다. 저 아름다운 물결이 선행자들의 발자국을 모두 지우고 나에게는 고통을 주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감히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의 아름다움이
나에게는 너무나 잔인하다.
'늦은맥이재' 에 도착했다. 내가 지금까지 지나온 동쪽의 소백산은 대간 타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고, 보통의 등산객들은 이곳 늦은맥이재로 올라오면 서쪽능선으로 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이제부터가 진짜인 것이다.
'진짜 아름다운 소백산' 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국망봉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만, 여기서 체력 뿐 아니라 나의 모든 정신력까지 바닥나고 말았다. 늦은맥이재에 도착한 것이 오후 4시 35분. 아침에 출발하며 국망봉에 도착하리라 생각했던 시간보다 35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그런데 국망봉은 아직도 2.1km나 남았단다.
연화동삼거리에서 여기까지가 3km 남짓. 나는 정확히 3시간만에 도착했다. 한시간에 겨우 1km씩 이동한 것이다. 하아... 너무 힘들다... 지쳐 죽을 것 같다... 나는 울먹이며 발길을 옮긴다.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고 참아가며.
늦은맥이재를 지나고도 빽빽한 나무 숲은 여전하다. 아니, 더 심하게 빽빽해진 나무 숲이 나타난다. 나는 왠지 화가 날 것 같았다.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목적지까지 한참이나 남았는데 햇님은 날 버려두고 혼자만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모든 것에 배신감이 느껴졌다.
나를 버려두고 혼자 떠나려는 태양에. 탁 트인 조망지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소백산에. 예쁜 모습을 하고는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붙들어 매는 눈 쌓인 등산로에. 그렇게나 그리워하게 만들어놓고 막상 다시 찾아오니 처절하도록 괴롭히는 백두대간에.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2구간
진행 구간 : 고치령 1.9km 비박(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마당치-연화동 삼거리-늦은맥이재(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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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