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결국 무릎을 꿇게 만든 소백산의 눈꽃 터널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늦은맥이재에서 국망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등산로 위로 유난히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들이 많았다. 봄이면 천상의 화원을 선사하는 철쭉덩굴들이 등산로 위로 둥글게 자라고 있는데,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으니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통과하기 힘들 정도로 낮은 등산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허리를 납작하게 숙이면 지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아... 제기랄!




그렇게 무릎을 꿇고 꿇어 철쭉 터널을 지나고 나니 드디어 왼쪽으로 시야가 트였다. 처음으로 한뼘 아닌 세뼘 이상의 시야가 트인 것이다. 하아... 하아...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내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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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길은 더욱 험난해지고 있었다. 오르막에도 암릉에도 선행자의 발자국은 남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 아래에서는 포복훈련을 하듯 기어서 지나야만 했다.




봄이면 철쭉이 동굴을 이루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소백산은




겨울엔 눈꽃이 동굴을 이루어

지나는 이의 다리를 붙잡고

기어이 무릎을 꿇게 만든다.




몇 번이나 무릎을 꿇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흑-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백두대간인지 나의 인생인지

모르겠다.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울지 않았을까?

아니었다.




나는 매일 술을 마시며 울어야 했다.

도시에서도 산에서도

나는 툭하면 울어야 했다.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세상 어디에도

'살 것' 같은 곳은

없었다.




나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백두대간이 아니라

다른 어떤 환경이 아니라

내 자신 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가을에
나는 쓰러져 우네


다시 겨울은 오는데


저 겨울 산을
무엇으로 혼자 넘나


너와 함께 했어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젖은 눈으로 지켜봐주는
이제 너도 없는데


침묵의 불덩어리를 품고
언 살 터진 겨울 사내로


무엇으로 혼자 넘나
저 겨울산



- [가을에 떠나다] 박노해 -




나는 내내 박노해의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계속 박노해의 '가을에 떠나다' 가 머릿속을 맴 돌았다. 젖은 눈으로 지켜봐주는 사람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나는 그가 필요했다. 너무나도 간절히.




세상이 온통 검게 변하고 나서야 드디어 평평한 곳에 도착했다. 아마 이곳은 산객들에게 각광받는 야영지일지도 모른다. 아주 평평하다. 땅이 고르다. 어쩌면 눈밭이라 그래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망봉까지 0.9km 남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바로 아래였다. 나는 도저히 국망봉까지 갈 여력이 없었다. 여기서 비박을 하기로 하고 텐트를 펴기 위해 땅을 다졌다. 발로 눈을 꾹꾹 밟아 땅을 다졌다.




사실 눈 밭에서 비박을 할 때는 땅을 다져서 될 일이 아니었다. 발로 눈을 꾹꾹 밟을 것이 아니라, 비박할 장소의 눈을 퍼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몰랐고 알았다한들 힘이 없어서 눈을 퍼낼수도 없었다.




텐트를 펴고 텐트 앞에 앉아 밥을 끓였다. 그런데 밥이 다 끓기도 전에 가스가 떨어졌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욕을 할 기운도 없었다. 내일 아침은... 내일 아침엔 어떡하지? 이젠 따뜻한 물도 없고 보온병에 남은 물 200ml는 내일 아침이면 차갑게 식을텐데...




능선 아래로 영주시내의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야경의 밝은 불빛이 나의 눈에 고여 눈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무릎을 펴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침낭 안에 누워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빨리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울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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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에 눈을 떴다. 원래 산에서는 자다가도 몇번씩 깨는 것이 당연지사다. 이번 새벽에는 깰 때마다 우울감이 몰려왔다는 것이 평소와 달랐을 뿐. 구름이 꽉 차서 일출이 없는 날이었다. 어제만큼이나 오늘도 답답한 하루가 될 모양이다.




날이 밝고 보니 내가 비박을 한 곳은 '상월봉' 바로 아래였다. 이정표에 '상월봉' 표시가 없어서 몰랐다. 국립공원이면서 유명한 봉우리를 알려주지도 않는 불친절에 아침부터 불만이 솟구쳤다.




어젯밤 영주시의 야경이 보였던 곳은 아무리 봐도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가 시내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헛 것을 본 것이었을까?




가스가 떨어져 아침도 못먹고 행동식으로 배를 채웠다. 보온병의 물은 미지근하지도 않고 그저 차갑지 않을 뿐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니 자고 일어났는데도 기운이 없었다. 아침부터 기운 없는 몸뚱이로 텐트를 개고 배낭을 들쳐맨다.




마른가지가 빽빽한 철쭉터널을 지나 국망봉으로 향한다. 봄이면 산객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버린다는 철쭉. 나는 하필 이런 때 이 곳을 지나 등산로를 좁게 만드는 철쭉이 밉기만 하였다.




하지만 철쭉터널을 지나자 사방이 확 트인 조망지가 나타났다. 드디어 소백산의 빽빽한 나무숲이 끝난 모양이다. 드디어! 사방이 탁 트이니 나의 기분도 탁 트인다. 어제 그제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씩 털어 진다.




돌아보면 내가 잠을 이뤘던 상월봉의 신기한 바위가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눈 쌓인 능선 위로 마른 가지만 남은 철쭉이 한폭의 수묵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완만한 능선 아래로는 눈의 천국이 펼쳐졌고 그 눈밭 위로 아기 노루가 뛰어다닐 것만 같았다. 투명한 구슬처럼 반짝이는 아기 노루는 눈에 발이 빠지지 않고 위로만 사뿐사뿐, 요정처럼 뛰어다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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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좋긴 좋구나... 배가 고프지만 않았다면 더욱 아름다웠을텐데... 아침을 먹지 못한 나는 이 추운 겨울날 눈밭 한가운데서 아사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백산은...




진심으로 아름다웠다.




키가 작고 가지가 많은 철쭉 위로 눈이 많이도 쌓여있었다. 그 덩굴 아래를 지나야 할 때는 징글징글하던 철쭉이, 멀리서 바라보니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다른 어떤 나무들보다 훨씬 멋진 눈꽃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겨울왕국이 따로 없었다.
이곳이 바로 겨울왕국이고
눈의 천국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간밤에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은 것이 아닐까. 나의 영혼은 몸뚱이가 죽은 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일어나 육신을 버린 채 길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보고있는 풍경은 지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간밤에 죽어서 이승이 아닌 저승에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는 지상이 아닌 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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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망봉에 도착했다. 비박을 한 상월봉에서 40분 걸려 도착했다. 어제의 목적지였으나 오늘 도착한 곳. 어쩌면 사후세계에서 만난 곳인지도 모르는 이 곳.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왕건으로부터 신라를 회복하려다 실패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벌만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이 곳에 올라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여 '국망봉' 이라 한다.




어쩌면 마의태자는 일부러 울고싶어서 이곳에 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엄동설한에 베옷 한벌 이라니. 마의태자는 울고싶었던 것일까 죽고싶었던 것일까. 나라를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비참하니 이도저도 할 수 없어서 이 곳을 오른 것은 아니었을까.




나도 그랬다. 마음껏 울어도 상관없는 환경이 필요해서 백두대간에 올랐다. 나는 울고싶었던 것일까 죽고싶었던 것일까. 뿌리까지 썩어 흔들리는 나의 삶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었다. 이도저도 할 수 없어서 백두대간으로 도망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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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한을 달래기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이다. 소백의 겨울바람이 뺨을 철썩철썩 갈긴다. 주변의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사실은 너무 춥고 힘들어서 우는 것이지만, 이곳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나는 것이라고, 그렇게 변명을 해도 누구든 그 말을 믿어줄 것이다.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 이 건너다보였다. 비로봉 뿐만이 아니다. 국망봉의 바위 위로 올라서자 소백산의 사방팔방이 펼쳐 보였다. 360도의 시선 중 가로막히는 곳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마의태자는 이 아름다운 땅을 빼앗기고 얼마나 서러웠을까. 자신의 땅을 내려다 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눈물이 베옷을 적시고 고드름을 이뤄 산 채로 얼어붙지는 않았을까.




국망봉에서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데크가 깔려 있었다. 드디어 국립공원의 잘 정비된 등산로를 만난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이런 정돈 된 길을 원했다. 하지만 데크길 끝에는 다시 철쭉 군락지가 나타났다. 정말이지 징글징글한 철쭉. 그렇게 화를 내고 욕지거리를 날리는 데도 하염없이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비로봉이 한층 가까워졌다고 느낀 순간

저 멀리, 사람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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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사람이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내가... 내가...

죽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먼 발치에서나마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또 바보처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 저기까지만 가면... 저 사람들만 만나면... 나는 살 수 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2구간

진행 구간 : 늦은맥이재(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상월봉 비박-국망봉-비로봉 코 앞(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 7일 수요일

SE-a6b15a20-d34a-4488-810b-59b85af20d6a.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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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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