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눈 밭에 엎드려 울면 바람에 영혼이 날려가고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드디어 비로봉의 하얀 능선이 코 앞에 나타났다. 마지막울타리 목책만 지나면 소백산의 통제구간이 끝난다. 드디어 개방구간이 시작되고 평일 산행에 나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빨리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고

울든 웃든

마지막 감정을 털어내고 싶었다.




이 울타리만 지나면 되는데

이 울타리만 지나면 되는데...




여기서 그만...

남은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고 말았다.









바람이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이 곳. 눈이 허벅지까지 빠진다. 한발을 빼서 앞으로 이동하는 것이 죽을 힘을 다해 삶에 매달려 있는 것보다 더욱 힘들었다. 울타리 로프가 없었다면 과연 이 곳을 지날 수 있었을까?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세 발짝도 이동하지 못하고 곧장 아래로 곤두박질 쳤으리라.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나는 눈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




지치지 않고 부는 소백의 겨울바람이

나의 미끄러진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리겠지.




저 아래 누군가 사람이 죽어있다 한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눈에 갇혀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겨울의 바람소리만 무성하겠지...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저 아래가 나를 집어삼키려고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왠지... 자꾸 졸렸다. 힘이 없었다. 로프를 잡고 있는 손의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더미에 발을 깊에 박아넣고 잠시 쉰다. 기합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뱉으며 뒤에 있는 발을 눈더미에서 빼낸다. 빼낸 발을 앞으로 옮겨 다시 깊은 눈더미에 박아넣는다. 울타리에 매달려 울면서 숨을 고른다. 울음이 잦아들면 다시 죽을 힘을 다 해 뒤에 있는 발을 빼낸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력이 쑥쑥 빠져나갔다.




울타리에 매달려 숨을 내 쉴 때마다

영혼도 함께 빠져나가고 있었다.




바람 때문이었다. 쉬지 않고 부는 소백의 겨울 바람때문에 나의 영혼도 산산이 흩어지고, 이 바람 때문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영혼도 없는 빈껍데기 몸뚱이가 로프에 기대어 울음을 울고 있었다. 눈을 한번 감으면 다시 뜨기까지 점점 시간이 오래걸렸다. 아아... 자고싶다...




나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맞을까...?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로프에 기대어 얼굴을 파묻고 숨 고르기를 반복하며

한발 한발 한손 한손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드디어!

통제구간을 다 벗어났다!




비로봉 정상을 400m 앞둔 시점에서 통제구간이 끝났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길이 끝나고 사람들의 발자국이 즐비한 데크길을 만난 것이다.




하아... 하아...
살았다...
살았... 다...




개방구간에 당도하자 눈 앞에 펼쳐진 소백산의 풍경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설산을 밑그림으로 한 아늑한 아름다움이 저 멀리까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미 다리는 제 구실을 못하고 힘이 풀릴대로 풀려버렸지만, 죽을때 죽더라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죽고 싶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비로봉 정상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쌓인 눈이라곤 거의 없는 데크길. 그 편안한 길을 걷는데 눈물이 났다.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내 앞을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무심한 걸음이
저를 살렸어요...









비로봉 정상에는 사람들이 대여섯 있었다. 그들이 있거나 말거나 배낭을 던져버리고 눈밭에 누워버렸다. 죽을 것 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로 죽을 힘을 다해 여기까지 왔다. 나에게 이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고 이틀동안 쌓인 눈을 홀로 개척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일까.




비로봉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능선들이 아련하고 슬퍼보였다. 내 눈에 눈물이 고여 산의 능선도 흐려보이는 것이겠지. 비로봉에 닿으면, 사람들을 만나면, 누구든 지나는 산객을 붙잡고 '따뜻한 물 한모금을 얻어마셔야지' 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나는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밭에 벌렁 누워있는데도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렇게나 큰 나의 배낭을 보고도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저 사람들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나는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닐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아무도 나의 말을 듣지 못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나는 다시 힘을 그러모아 주목관리소로 향했다. 비로봉 정상에서 서쪽으로 300m쯤에 대피소처럼 쉬어갈 수 있는 건물이 있었다. '대피소' 아닌 '주목관리소' 라고 이름 붙여진 그 건물은 벽과 천장만 있고 안이 텅 비어있는데, 누구든 들어가 쉬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쉬어도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쉬고 싶었다. 소백산 어디나 바람이 휘몰아쳤고 비로봉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워있는데도 바람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바람에 날려갈 일은 없겠지만, 잠깐 누워있는데도 눈밭의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주목군락지를 지난다. 온통 눈을 뒤집어 쓴 주목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크리스마스 동화에 나오는 트리들은 모두 이 주목인지도 모른다. 산타 할아버지가 나타날 것 같은 동화의 세상에 들어선 듯 하다.




주목관리소에 도착했다. 원래는 주목관리소에서 야영을 하려고 했었다. 원래는 어제 국망봉과 비로봉을 모두 넘어 이곳에서 잠을 자려고 했었고, 원래는 오늘 아침 눈을 뜨면 이곳에서 제1연화봉과 제2연화봉 제3연화봉을 모두 지나 죽령에서 하산하려고 했었다. 어젯밤에 도착했어야 할 곳에 오늘 오후 1시에 도착했다. 내가 과연 연화봉 삼형제를 넘어갈 수 있을까? 나에게 과연 그정도의 체력이 남아있을까?




주목관리소의 문을 열자 소백산을 찾은 사람들이 여기에 다 모인 듯 사람들이 빽빽했다. 비로봉 정상에는 대여섯 밖에 없던 사람들이 관리소 안에는 스무명 가까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오후 1시. 점심을 먹는 사람들 틈에 앉아 곧 죽을 사람처럼 눈을 끔뻑이며 얼어버린 양갱을 입 안에 밀어넣었다.




따뜻한 것

따뜻한 것 한 모금만

딱 한 모금만 있었으면...




옆에서 식사를 하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세 분이 나를 흘끔 쳐다보셨다. 몇 번이고 나를 쳐다보던 할머니가




"밥 안 가져 왔어요?" 물으셨다.

아! 다행이다. 할머니 눈에는 내가 보이는 모양이다.

다행히 내가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네에... 가스가 떨어져서요..."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의 말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눈물이 흑- 쏟아질 것만 같았는데 어르신들 앞에서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억지로 억지로 참아냈다.




된장국에 밥을 말아드시던 그분들은

"이 추운데 밥도 못 먹고 돌아다니면 큰일 나지!"

하시며, 락앤락 반찬통에 된장국밥을 조금 덜어 나눠주셨다.




"아가씨. 이것 좀 먹어봐요."

반 공기 정도밖에 안되는 적은 양이었지만 너무나 감사해서 몸둘바를 몰랐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감사합니다..." 는 내가 들어도 무척이나 메마르고 건조하게 울렸다. 소백산의 겨울바람이 나의 음성과 말투, 그리고 표정까지도 얼려버린 것 같았다.




위장 속으로 따뜻한 것이 들어간다

나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에

온기가 전달되는 느낌




아아...
울고싶다...




나는 되도록 천천히 국밥을 먹었다. 밥알을 씹을 힘도 목구멍으로 넘길 힘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국밥이 줄어드는게 두려웠다. 천천히 천천히 환자가 영양식을 삼키듯 천천히 밥을 먹고 물티슈로 그릇을 깨끗히 닦아 할머니께 돌려드렸다. 그러자 이번엔 뜨거운 물을 한잔 주셨다.




"마셔봐요. 약초 넣어 끓인 물이야.

이거 마시면 감기도 안 걸려."




할머니는 그 뜨거운 물을 두 잔이나 주셨다. 구수하고 씁쓰레한 그 물은 정말이지 몸을 보전해주는 물 같았다. 뜨거운 물을 천천히 두 잔 마시고 나자, 온 몸을 지배하던 냉기가 걷히고 드디어 나의 혈액에도 온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쪽에서 올라왔어요?"

나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이 그분들 눈에도 보인 것인지, 그제야 질문을 하신다. 사실은 내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할 때 까지 기다려주신 것이었다.




"상월봉에서 왔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 한 분이 고개를 갸우뚱 하시며

"거기는 지금 통제구간일텐데?" 하신다.




말해놓고 보니 할아버지가 입은 자켓에 '국립공원 관리공단' 이라고 써 있는 글자가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절대로 모를 수 없는 국립공원의 황토색 유니폼을 입고 계셨는데, 나는 멍청하게도 국공 직원 앞에서 통제구간을 건너 왔노라 실토한 것이다.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라하자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신은 진짜 국립공원 직원이 아니고 산불방지기간에만 일하는 계약직원이라고. 그러니 그렇게 놀랄 필요 없다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곧 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가씨, 통제구간에는 가지 마.

지금 눈이 이렇게나 많이 쌓여있는데 혼자서 통제구간 지나다 눈밭에 쭉 미끄러지면 사람은 눈 밑에 깔리게 된다구. 한번 눈 밑에 깔리면 혼자 힘으로는 절대 못 일어나. 그러면 거기서 그냥 얼어 죽는거야. 알겠어?

절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마."









단지 나의 상상일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상상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오늘 나는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었구나.

그냥 등산을 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것이었구나!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2구간

진행 구간 : 비로봉 900m 앞(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소백산 비로봉-주목 관리소(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2월 7일 수요일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 51 -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이전 10화#50. 결국 무릎을 꿇게 만든 소백산의 눈꽃 터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