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주목관리소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권유로 오늘은 더이상 백두대간을 이어가지 않기로 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완만한 코스인 '천동'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원래의 계획은 연화봉 3형제를 모두 넘고 죽령에서 하산하는 것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내게 그 몸으로 종주를 이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하셨다.
산은 어디 가지 않아.
사람의 마음이 문제인 거지.
산은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는데
사람들은 산이 곧 도망이라도 갈 듯
당장 목표점을 찍지 않으면
안달이 난단 말이야.
아가씨, 기회는 언제든 있어.
날씨 좋은 날 다시 와도 되고
내년 봄에 다시 와도 돼.
백두대간 종주?
그거 지금 당장 완수하면 누가 상 줘?
그거 지금 멈춘다고 인생이 끝나?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뼈 때리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
아가씨. 거울 좀 봐.
아가씨가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송장이 들어오는 줄 알았어.
얼굴에 핏기라곤 하나도 없고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고.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거야?
집에 가서 몸부터 챙기고
체력 좋을 때 다시 와.
그래도 늦지 않아.
함께 주목관리소를 나와 할아버지 할머니 세 분은 비로봉 정상으로 향하고, 나는 반대방향인 천동으로 향했다. 갈림길에서 헤어지며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조심히 내려가. 힘들면 꼭 쉬고!"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천동으로 향하는 길 역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백두대간이 등산의 전부도 아니었고
인생의 전부도 아니었다.
그렇게 2011년 12월 7일,
소백산 비로봉을 마지막으로 서울로 돌아온 나는 백두대간을 중단하고 집에서 요양했다. 두문불출하고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산이 그리워질 즈음엔 산행 친구들과 함께 겨울풍경이 아름다운 산으로만 다녔다.
그러다가 2월에 감기에 걸렸는데 그 감기가 한달이 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감기때문에 한의원을 방문했다. 나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애독하던 블로그 이웃이 알려주신 한의원이었다.
한의사 선생님은 나의 맥을 짚어 보시더니, 몸의 기가 모두 쇠했다고 말씀하셨다. 기력이 없어서 작은 병도 낫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5일치의 한약을 내어주시며, 감기를 치료함과 동시에 기력을 보전해 주는 약이니 양약보다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한의원에 처음 내방한 나의 진료카드를 보고 선생님이 물으셨다.
"이 동네 분이 아니신데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소개 받고 왔어요. 그러니 잘 좀 해주세요."
"누구 소개로 오신 거에요?"
나는 블로그 이웃의 성함의 기억나지 않아서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어 미리 적어온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한의사 선생님이 빙긋 웃으시며 그 사람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를 물으셨다.
"저... 블로그 이웃이에요."
"그래요? 그 친구가 저의 가장 막역한 친구에요. 한의대 다닐때부터 제일 친했고, 지금도 거의 매일 연락하구요. 어떤 내용의 블로그를 운영하시길래 그 친구와 이웃이에요?"
"등산 블로그요.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었거든요."
"아! 그래요?"
한의사 선생님의 눈빛에 반짝 불이 켜졌다. 본인도 등산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며 나의 블로그 주소를 물으셨다. 이후로 한의사 선생님은 종종 나의 건강상태를 묻고, 우리가 사는 인근 산의 숨은 비경을 담은 등산로를 알려주셨다.
과연 선생님의 한약은 병원에서 한달 동안 잡아내지 못하던 나의 감기를 단번에 잡아주었다. 나는 선생님의 한약으로 몸이 팔팔해지면 그 길로 배낭을 싸서 산으로만 돌아다녔고, 다시 기력이 쇠해서 골골대면 한의원에서 약을 받아왔다.
어느덧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었다.
높고 험한 산에도 눈이 모두 녹고 새싹이 돋아나는 시기가 된 것이다.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국립공원의 산불방지 통제기간이 끝나면 다시 백두대간을 이어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이번엔
경로를 달리해서 진행하고 싶었다.
지난해 가을, 강원도 고성의 진부령에서 남진으로 백두대간을 진행한 이유는 그때가 '가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을 단풍은 추운 북쪽에서 먼저 시작하여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온다.
나는 단풍을 따라
단풍과 함께
백두대간을 타고 싶었다.
산행 초보자의 미숙함을 모르고 백두대간이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단풍보다 한참이나 걸음이 느렸던 나는 그만 소백산에서 폭설을 만나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봄' 에 다시 시작하는 백두대간은 봄꽃을 따라 남쪽에서 시작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제일 먼저 꽃을 틔우는 지리산에서 나머지 대간을 시작하여 철쭉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폭설에 주저앉았던 소백산의 봄철쭉 아래서 대간종주를 마무리하면 완벽하겠다 싶었다.
나는 다시 한의원을 찾았다. 그리고는 산불방지 통제기간이 끝나는 4월 30일에 백두대간 종주를 이어 가야하니, 그 때까지 내 몸을 정상적으로 만들어달라고 떼를 썼다. 한의사 선생님은 나의 맥을 짚어 보시고는 웃으셨다. 그리고는 별 말 없이 한약을 지어주셨다.
그때는 아무 말 없으셨던 한의사 선생님은, 내가 대간종주를 모두 마무리하고 다시 한의원을 찾았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기하네요. 그 몸으로 끝까지 종주를 하다니. 기력이 없어도 너무 없었어요. 분명히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올 줄 알았죠. 말린다고 내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고, 산에 갔다가 스스로 느껴봐야 중단하지 싶어서 별 말 안했던 거에요. 일주일도 못 가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 몸으로 끝까지 다닌 거죠?"
선생님은 나에 대해 정확히 간파하고 계셨다.
말려도 기어이 대간을 시작할 것이라는 것
타일러도 고집스레 대간을 이어갈 것이라는 것
말이다.
그렇게 2012년 4월 30일,
지리산 천왕봉을 시작으로
나의 백두대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2012년 봄. 그 해는 유난히도 더웠다. 4월부터 열대야가 시작되어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놓아도 자다가 땀이 날 정도였다. 그 더운 열기는 아침이 되어도 식지 않아서, 나는 6시반에 집을 나서면서도 한여름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지리산엔
비가 오고 있네.
이런 염병할.
산불방지기간이 끝났음을 알리듯 하루종일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비의 양보다는 바람의 양이 더욱 문제였다. 적당히 내리는 부슬비에 비해 바람은 사람을 잡아먹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듯 미친듯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중산리에서 로타리대피소를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데, 나의 판초우의는 로타리대피소에 닿기도 전에 앞섶이 북 찢어져버렸고, 대피소에서 식빵으로 끼니를 때운 나의 위장은 천왕봉에 닿기도 전에 쪼그라들어 버렸다.
미친 바람은 천왕봉에서 정점을 이루어 정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날려버릴 기세로 휘몰아쳤다. 등산을 시작하고 지리산에 온 것만 벌써 몇번째인데 이런 지랄맞은 날씨는 처음이었다. 우중등산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백두대간을 다시 시작한 첫날부터 내내 욕을 뱉으며 걸어야했다.
아오 c바!
이게 봄이야 겨울이야?!
비박을 위해 챙겨왔던 두꺼운 겨울 우모복을 허겁지겁 걸쳐 입었는데도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게다가 백두대간을 쉬면서 해발 600m 정도의 낮은 산만 사부작거리며 다녔더니, 시작부터 1915m까지 치고 올라가는 천왕봉엔 도저히 제 시간에 오를 수 없는 것이다.
그토록 애정하던 지리산에서 4.5km를 4시간 30분만에 겨우 주파하는 위용을 자랑했다. 한 시간에 정확하게 1km씩 이동한 것이다. 미친바람 때문에 몸뚱이가 제멋대로 기우뚱거리면서도 '정상석은 밟아야해! 천왕봉이 시작점이란 말이야!' 라는 생각에 꾸역꾸역 암봉에 올랐더니 체력은 더욱 곤두박질을 쳤다.
나는 봄새싹이 파릇파릇한 지리산을 오르며 세상구경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신록과 야생화들을 둘러보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산객이 되어 천천히 지리산을 오르며 낭만을 즐기고 싶었다. 그리고나서 모든 산객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천왕봉 아래 숨은 안부에서 연둣빛 새싹에 둘러쌓여 비박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것도 모자라
이런 미친 바람이라니!
비박을 했다간 텐트채로 날려갈 기세다. 몸을 납짝 엎드려 장터목대피소까지 기어갔다. 꼿꼿이 세운 몸으로는 이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모든 산객들이 지나가길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모든 산객들이 다 지나가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 겨우 겨우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두대간을 다시 시작한 첫 날.
그 첫 날부터 나는 퍼져버렸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구간
진행 구간 : 중산리(경상남도 산청)-로타리 대피소-지리산 천왕봉-장터목 대피소(경남 함양과 산청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2월 7일 수요일 / 2012년 4월 30일 월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