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다시 첫날, 다시 지옥의 레이스 시작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배낭이 너무 무거운 것이 화근이었다. 지난 가을, 진부령에서 소백산까지 대간을 뛸 때는 집에서 출발할 때의 배낭 무게가 15kg~17kg 정도 였다. 그정도 무게의 배낭으로 출발했다가 식량과 물을 다 소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배낭은 5kg 정도 가벼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배낭의 무게가 22kg 이었다. 지난 가을보다 5kg이 늘어난 것이다. 지난번은 겨울산행이었고 이번은 봄 산행인데 어째서 겨울보다 봄의 배낭이 더욱 무거워졌을까?




일단 텐트를 바꿨다.

무게도 부피도 초소형이던 1인용 비비쌕을 놔두고 2인용 돔텐트를 구입한 것이다. 이젠 나도 텐트 안에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텐트만 있으면 버너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꺄오올~!!




그리고 매트도 바꿨다.

기존에 내가 사용하던 것은 일명 빨래판 매트라고 하는, 요가매트처럼 생긴 것을 둘둘 말아서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부피가 커서 배낭 바깥에 매달고 다녀야 했지만 스펀지를 압축시켜 만든 것이라 무게는 정말이지 가벼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입으로 공기를 주입해서 사용하는 에어매트를 장만해서 가지고 왔다. 바람을 넣으면 높이가 7cm나 되어서 아무데서나 비박을 해도 등허리가 아프지 않는 효자템이다. 공기를 빼고 잘 접으면 크기가 1리터짜리 물통만큼 작아지지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빨래판 매트를 서너개 들고다니는 것과 같은 무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낭을 바꿨다.

작년까지는 50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다니다가, 나의 배낭이 장기산행을 하기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고거래로 70리터짜리 배낭을 구입했다. 용량이 늘어난 배낭에 식량과 옷을 잔뜩 챙겨넣었다.




이번 종주는 작년처럼 월요일에 출발해서 금요일에 돌아오는 산행이 아니었기에. 최소 열흘이상 대간을 이어갈 것이고 중간중간 빨래와 식량수급이 해결된다면 더 오래 대간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번에 지리산에서 대간종주를 시작하면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돈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간종주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통장은 텅 비어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번에 반드시 대간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한번에 마무리 지어야 했다. 지금 대간을 마무리짓지 못하면 언제 다시 종주를 이어가게 될지는 귀신도 모르는 것이다.




집이 서울이다보니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경상남도까지 왔다갔다 하는 차비와 시간도 무시 못했다. 서울까지 왔다갔다할 차비로 식량을 사고, 버스에서 낭비 되어질 시간을 모아 대간길을 조금이라도 더 걷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22kg의 배낭은 살인적이었다.




그때 당시 나의 몸무게가 52kg이었다. 그러니 나의 배낭은 아무리 무거워도 17kg을 초과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더 무거워진 5kg만큼 걸음이 더욱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길 가다가 배낭에 깔려 죽을 것 같은 느낌이 계속해서 나의 뇌를 지배했다.




그런 배낭으로 대한민국 남한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인 '지리산 천왕봉' 을 직행으로 올랐다. 그러니 속도가 나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오르막 내내 미친바람을 정통으로 맞았다. 그러니 더욱 속도가 날 수 없었던 것도 너무나 당연했다.




정상으로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휘몰아치던 미친바람은 '천왕봉' 에 닿았을 때 정점을 이루었다. 그 미친바람 속에서 4.5km의 거리를 4시간 30분만에 올랐다. 그래도 한시간에 1km는 이동한 셈이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천왕봉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4월 마지막 날의 오후 6시는 다행히 아직도 밝았다. 산불방지기간이 끝나고 국립공원의 등산로가 정식으로 개방된 첫 날, 이 미친바람에도 불구하고 천왕봉엔 사람이 제법 있었다.




백두대간의 시작점을 지리산 산 능선 아래가 아닌 '천왕봉' 을 기준으로 하기에 어떻게든 천왕봉에 발도장을 콩콩 찍고 싶었다. 날씨때문에 누군가에게 사진을 요청하는 것도 민폐였다. 비바람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정상석을 카메라에 담고 부랴부랴 암봉을 내려왔다.





SE-66d972c5-a831-4fdf-a81a-2e9af8092323.jpg?type=w1





천왕봉 아래서의 비박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장터목 대피소 방향으로 이동했다. 만약 정상 아래서 비박을 할 수 있는 날씨였다면 나는 무척이나 알맞은 시간에 도착한 것이었는데, 이 날씨에 이 배낭을 메고 다시 1.7km 걸어야 한다 생각하니 끔찍이도 싫었다. 바람이 불지 않고 그저 비만 보슬보슬 내리는 날씨였다면 나는 어떻게든 비박을 했을 것이었다.




천왕봉을 지나도 바람은 여전히 거세었다. 정상 봉우리만 지나면 해발이 낮아질수록 바람도 잦아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서 바람도 더욱 거세지는 것 같았다. 나의 거대한 배낭은 바람 때문에 계속 휘청이고 다리는 이미 풀릴대로 풀려버렸다. 천왕봉에서 함께 인증샷을 찍던 사람들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고 걸음이 느린 나 혼자만 어두운 산길에 버려지듯 남게 되었다.




하아... 죽겠다...

첫 날부터... 정말 죽겠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등산로에서 비바람에 온 몸을 두들겨 맞으며 걷다가, 온 세상에 어둠이 들어차기 직전에 대피소의 불빛을 발견했다. 아아! 살았다! 아아... 울고싶다...




대피소에 들어가 자리를 잡아놓고, 천근같은 몸뚱이를 억지로 끌어당겨 취사장으로 이동했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밥숟가락 들 힘도 없었지만, 먹어야 했다. 무엇이든 먹어야 했고, 제대로 먹어야 했다.




장터목 대피소의 취사장에 앉아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점심으로 빵을 먹었더니 너무 기운이 없었다. 앞으로도 삼사일은 계속 점심으로 빵을 먹어야 했다. 하루 세끼 모두 밥을 먹자니 배낭이 더욱 무거워져서 점심을 빵으로 대체한 것이었는데, 그랬더니 기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었다.




점심을 빵으로 때우자니 기력이 없고, 밥으로 먹고 다니자면 배낭이 더욱 무거워진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나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생각을 비우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코펠의 밥과 국이 피어올리는 수증기 사이로 초점이 흩어지고 있었다.





SE-7bc920f5-38b6-45a4-8216-26fcb8d0045c.jpg?type=w1




그 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 파란운동화님...?"




나는 멍한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내가 대답을 했던가 안했던가. 모르겠다.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나의 생각일 뿐,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지?




"저, 세동치라고 합니다."




아! 블로그에 올리고 있던 나의 백두대간 종주기 애독자 였다. 그때 당시 나의 블로그 닉네임은 '파란동화' 였고, '세동치' 님은 댓글을 자주 달아주시는 이웃님이라 닉네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반가웠는데, 분명 반가웠는데 나의 표정은 반가움을 전혀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나의 표정은 분명 썩어있었으리라. 웃으려고 노력했는데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블로그에 제대로 된 나의 사진을 올린 적이 없는데 그분은 용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4월 30일에 천왕봉에서 대간종주를 시작할 것이라고 미리 포스팅을 올렸던 것이다. 등산로에서 박배낭을 메고 홀로 걸어가는 나를 봤을 때, 그분은 직감적으로 나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왁자지껄한 대피소의 취사장에서 홀로 쓸쓸히 밥을 먹고 있는 내게, 그 분은 물과 이온음료와 초콜렛을 주셨다. 그리고 점점 표정이 일그러지는 나를 보고는 잠시 기다리라 하시더니, 다시 돌아와 멘소래담 로션근육이완제를 주셨다. 아... 눈물 나... 사실은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팠다. 5kg 늘어난 배낭이 나의 허리를 불구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세동치님은 내일 하산해야 한다며 자신의 행동식을 전부 내게 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서 죽을 것 같다며 울면서 사양했다. 얘기를 조금 나누다가 그 분은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밥을 마저 먹었다.




다음날 푹 자고 일어난 맑은 얼굴로 다시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 분은 이미 대피소를 떠나고 없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구간

진행 구간 : 중산리(경상남도 산청)-로타리 대피소-지리산 천왕봉-장터목 대피소(경남 함양과 산청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4월 30일 월요일

SE-d7feedaa-cad4-4751-b9fa-c53ca4bc9d3c.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 53 -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이전 12화#52. 겨울에 놓은 손을 봄에 다시 잡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