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어찌나 피곤했던지 사람 많은 대피소에서 한번도 깨지 않고 곤히 잘 잤다.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 반까지 단 한번도 깨지 않았다. 전날 이웃님께 받은 멘소래담을 바르고 잤더니 허리도 괜찮았다. 장기산행을 다니면서도 나는 이런거 하나 챙겨다닐 생각을 못했다.
배낭이 무겁고 하루종일 걸으면 어딘가 아픈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버티기만 했던 것이다. 대일밴드나 챙겨다녔지 고통을 덜어주는 다른 의약품을 챙길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대피소에서 잠들었던 사람들은 이미 절반 이상이 떠나고 없었다. 산에서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나만 빼고. 밖으로 나와보니 비는 그쳤지만 안개가 너무 짙었다. 그 짙은 안개에 옷이 축축하게 젖는 날이었다.
취사장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으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어제 만났던 이웃님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떠난 모양이었다.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너무나 힘든 등산으로 인해 멍한 표정과 썩은 미소밖에 드린 게 없었다. 나는 이렇게나 잔뜩 받아놓고.
오늘은 지리산 주능선을 타고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간다. 백두대간은 지리산의 주능선을 그대로 따라가는 길이다. 그래서 길도 편하고 대피소도 많았다. 안개는 자욱하지만 비가 오지 않으니 어쩌면 오늘은 비박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허리와 어깨를 이토록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비박장비를 빨리 사용하고 싶었다. 사용할 기회라도 있으면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사용하지도 못할 장비를 짊어지고 다니느라 몸이 상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억울한 일이다.
지리산은 대한민국 남한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이다. 제주의 한라산이 1950m로 가장 높고 지리산은 1915m로 두번째로 높다. 그러니 멀리 떨어진 섬은 제쳐두고 육지만 놓고 본다면 우리가 갈 수 있는 산 중 가장 높은 곳은 이곳 지리산의 천왕봉인 것이다. 바위가 많은 설악산이 가장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의외로 설악산 대청봉은 1708m 밖에 되지 않는다. 지리산 보다 200m나 낮은 것이다. 높이로 200m 차이라면 아파트 65층의 차이와 맞먹는다.
오늘은 벌써 5월 1일인데 이토록 높은 산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연둣빛 세상을 걷는 상상을 하고 왔는데 지리산의 주능선엔 소나무 외에 초록이 없었다. 그리고 안개가 짙어도 너무 짙었다. 시야가 꽉 막혀 주변 능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무념무상으로 발치만 보며 걸어야 했다.
연하봉을 지나 촛대봉에 닿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때 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가 싶더니... 시야가 걷히면서 산능선 아래로 낮게 드리운 하얀 구름과 눈 앞의 푸른 소나무가 선명한 색의 대비를 보여주었다.
우와아아아!
이거지 이거야!
바로 이거야!
나는 웃으며 감탄을 뱉어냈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이래야 지리산이지! 선선한 바람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 잠깐 동안에도 구름이 싸악 걷혔다가 다시 싸악 들어찼다. 구름보다 더 높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나는 웃으며 길을 이어간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세석대피소까지 딱 2시간이 걸렸다. 지도에 표시된 예상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가파른 오르막 없이 평탄한 주능선이라 걷기가 수월했다. 하루 지났다고 이 무거운 박배낭에 적응이 된 것인지, 하루 지났다고 식량의 무게만큼 덜어져 가볍게 느껴진 것인지, 어쨌든 장터목에서 세석까지는 무척이나 편하게 잘 왔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세석대피소에서 벽소령대피소까지 가는 것이 너무 너무 힘들었다. 지도에 표시된 예상도착시간과 나의 걸음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도,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무겁고 힘들었다. 그렇게나 잘 자고 일어났는데도 나의 에너지는 2시간만에 방전된 모양인지, 부상당한 다리를 끌고 고향으로 향하는 군인처럼 상체가 하체를 억지로 끌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벽소령에 도착했다. 조금 쉬다가 다시 출발해도 좋을 시간이라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서 배낭을 베고 낮잠을 청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힘들어서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대피소의 마룻바닥에 한시간쯤 누워 있었지만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잠을 이룬 것은 1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한시간 동안 죽은듯이 잠을 이룰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 길을 이어가기 위해 대피소 밖으로 나왔는데 으앙~! 비가 내리고 있다! 아 젠장... 왜 또 비가 오고 지랄이야...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잉잉...
어제는 찢어진 우비를 테이프로 붙여 간신히 버텼는데 오늘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출발하기 전 대피소에서 2천원짜리 비옷을 사서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그래도 대피소에서 쉬는 동안 비가 시작되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역시, 한 숨 자고 일어났더니 걷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 산행 중 힘들면 무조건 쉬어야 한다. 낮잠을 잘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오늘 하루종일 비가 오지 않으면 벽소령 지나 형제봉에서 비박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내리는 비를 보니 오늘도 비박의 꿈은 접어야 할 듯 하다.
내일도 이렇게 비가 온다면 내일도 역시 대피소에서 자야겠지. 비 때문에 비박을 접는 것은 속이 상하지만, 그래도 대피소가 많은 지리산이라서 억지로 비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달리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다행한 일인 것이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연하천대피소까지 2시간 반이 걸렸다. 처음 한시간은 수월하더니 나머지 한시간 반은 죽을 것 같았다. 점심을 빵으로 때우며 걸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고갈된다. 점심도 밥으로 먹어야 할까? 아아... 그러면 배낭이 더욱 무거워질 텐데... 어쩌지...?
산행이 고행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제기랄! 산에서까지 이렇게
고민을 싸안고 다녀야 하다니... 젠장!
그렇게 죽을똥 살똥 피똥을 싸면서 연하천에 도착했더니, 단체로 온 일본아줌마들 때문에 빈 자리가 없다고 한다. 네에?!! 그럼 저보고 어쩌라구요? 이 시간에 이 비를 뚫고 10km 너머에 있는 노고단대피소까지 가라구요?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리 대피소를 예약하지 않고 온 나의 잘못이었다. 하는 수 없다. 대피소에 자리가 없으면 취사장에 매트를 깔고 자는 수 밖에. 더이상은 못 움직인다. 죽을 것 같다.
일단 밥부터 먹고 취사장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대피소 직원이 나를 불렀다. 예약 취소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 살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예약 취소자는 2명 이었다. 나는 2인분의 자리를 혼자 다 차지하고 누워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다음 날. 5시 30분에 눈을 떴다. 오호~ 빨리 일어났군! 그래 산에서라면 적어도 이 정도 시간에 일어나 줘야지. 핫핫핫.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어제는 6시반에 일어나고도 여유롭게 준비해서 8시에 산행을 나섰는데, 오늘은 5시반에 일어나고도 급하게 준비해서 겨우 8시에 나올 수 있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인생은 원래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인 것이다.
아침에 연하천대피소에서 출발할 때 까지만 해도 부슬부슬 비가 내렸는데, 조금 걷다보니 비는 그치고 안개만 자욱하다. 나는 이내 비옷을 벗어버렸다. 비옷 하나만 벗어도 이렇게나 시원하고 걷기가 수월해진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토끼봉과 화개재를 통과하고, 화개재에서 삼도봉까지 연결된 데크계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무식하게 끝없이 이어져 있는데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수월하게 올라왔다.
"오늘 종주는 완전 껌이네~
이러다 노고단 성삼재 지나 고리봉까지 가겠는데?
오올~!"
자고 일어나면 2시간 동안 에너지 풀 충전이다가, 정확히 2시간 후부터 방전되기 시작하는 자신을 잊고, 이렇듯 자만에 빠져 있었더랬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출발하고 2시간 후에, 나는 삼도봉에 도착했다.
지리산 삼도봉.
전라북도의 남원과 전라남도 구례, 그리고 경상남도의 산청군이 만나는 경계이다. 3개의 '도(道)' 가 만나는 지점이라 하여 '삼도봉' 이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같은 지명의 다른 곳이 제법 많다. '경기도 광주' 와 '전라도 광주(광역시)' 처럼 '삼도봉' 역시 전국에 세 곳이나 있다.
1. 지리산 삼도봉/
전북 남원, 전남 구례, 경남 산청
2. 초점산 삼도봉/
전북 무주, 경남 거창, 경북 김천
3. 민주지산 삼도봉/
충북 영동, 전북 무주, 경북 김천
한마디로 3개의 도(道)가 만나는 곳의 봉우리는 죄다 '삼도봉' 인 것이다. 산 너머 사람들끼리 싸우지 말라고 이런 이름을 지은 것인지, 창의력이 부족해서 같은 이름으로 돌려막기를 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신기한 것은 이 세 개의 '삼도봉' 이 모두 '백두대간' 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경상남도부터 전남 전북 경북 충북 그리고 강원도까지, 백두대간의 산맥이 우리나라를 관통한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구간
진행 구간 : 장터목 대피소(경상남도 산청)-촛대봉-세석 대피소-덕평봉-벽소령 대피소-연하천 대피소(1박)-토끼봉-화개재-삼도봉(전북 남원, 전남 구례, 경남 산청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1일 화요일 ~ 2일 수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