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지리산 삼도봉에서 진행방향인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반야봉 갈림길' 이 나온다. 직진을 하면 백두대간을 따라 지리산 노고단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꺾으면 반야봉이 나타나는데 반야봉은 대간길에 포함된 곳은 아니었다.
지리산을 몇 번이나 오고도 반야봉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는 그 무거운 박배낭을 메고 백두대간을 이탈하여 반야봉으로 향했다. 반야봉 갈림길까지만 해도 체력이 짱짱해서 내 자신을 과신한 것이다. 반야봉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토록 체력이 방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갈림길에서 반야봉까지 고작 1.3km 만에 나는 또다시 방전되고 말았다.
체력은 둘째치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가 안개가 자욱한 오늘같은 날씨에 대간을 이탈하는 것이 아니었다. 운해가 기가막히다는 반야봉에 기를 쓰고 올랐건만, 안개가 너무 짙어서 발 아래 있는 것이 운해인지 운동장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지리산은 크고도 넓다. 내가 등산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지리산 덕분이었고, 종주가 아닌 짧은 등산까지 모두 합치면 등산을 시작한 9개월 동안 지리산을 7번이나 찾았다. 9개월 중 2개월은 백두대간 종주 중에 있었으니, 나머지 7개월 동안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지리산을 찾은 것이다.
7번의 지리산 등산 중 주능선을 종주한 것은 이번을 포함하여 세번째인데 올 때마다 비가 내렸다.
그리하여
일출이 유명한 천왕봉에서는 정상석 외에 본 것이 없고
평전이 유명한 세석에서는 대피소 외에 본 것이 없고
운해가 유명한 반야봉에서는 소나무 외에 본 것이 없다.
오늘도 반야봉에서 점심을 먹으며 한 시간을 기다렸건만 끝내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나는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어도 체력이 충전되지 않았다. 아마도 점심으로 빵쪼가리를 먹어서 그런 모양이다. 지리산만 벗어나면 점심 때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지, 이렇게 가다간 배낭에 식량을 잔뜩 짊어지고도 허기로 쓰러지고 말겠다.
반야봉을 내려와 다시 주능선인 백두대간에 합류한다. 주능선을 다시 만나는 노루목에서부터 임걸령을 지나 노고단 정상에 도착하기 까지, 힘들 것 하나 없는 완만한 코스에서 나는 10년은 늙어버린 듯 기진맥진 했다. 체력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는 것일까?
노루목에 도착할 즈음부터 안개는 차츰 옅어지더니 노고단에 도착하자 구름마저 걷히고 섬진강을 품은 전남 구례의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지리산에 도착한 시점부터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더니, 2박3일만에 주능선을 다 벗어나자 날씨가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이 마음 넓은 '어머니의 산' 이라더니, 엄마는 내가 올 때마다 서글퍼서 이토록 울기만 하는 것일까? 노고단 정상에서 어머니의 산이 보여주는 풍경을 품에 안고 곧 이어 노고단대피소로 향했다. 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연하천에서 노고단까지 장장 9시간이 걸렸다. 여유롭게 걸어 5시간이면 도착한다는 곳에 9시간만에 도착한 것이다.
와!
느리게 걷기 대회가 있다면
1등은 따논 당상이겠다. 아하하
덕분에 오늘도 대피소 숙박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지리산 종주 내내 비박 한번 없이 모두 대피소숙박을 이용했다. 이럴거면 뭐하러 그 무거운 비박장비를 다 짊어지고 산을 탄 것일까. 고통스러운 어깨와 허리만큼 마음도 씁쓸했다.
노고단대피소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날은 무척이나 날씨가 좋았다. 아침을 먹고 8시에 대간을 이어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더니 벌써부터 해가 쨍 하게 떴다. 오랜만에 햇님 얼굴을 보니 그저 반가울 뿐. 지리산 주능종주는 조금 아쉬웠지만 오늘부터는 제대로 된 날씨에서 멋진 종주를 이어갈 수 있을거야!
룰루랄라~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노고단대피소에서 성삼재휴게소 방향으로는 무척이나 잘 닦인 등산로로 시종일관 내리막이다. '성삼재' 는 지리산에 있는 해발 1,100m의 높은 고개인데도 무려 시내버스가 올라오는 곳이다.
성삼재휴게소는 '휴게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속도로 휴게소 뺨치는 규모를 자랑한다. 편의점과 커피숍과 식당은 물론이고 유명브랜드의 등산용품 전문매장도 있을 정도다. 주유소만 빼고 다 있다. 백두대간의 여느 휴게소들이 평일 영업을 거의 안하는 것에 반해, 이곳 성삼재휴게소는 연중 무휴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만큼 일년내내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지리산이 우리나라의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유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크고 신식인 성삼재휴게소의 화장실에서 깨끗하게 씻고 서북능선으로 향했다.
성삼재에서 만복대와 정령치, 북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 은 지리산의 주능선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 걷기 편한 등산로가 오르락 내리락 적당히 이어져서 지루하지 않고, 만복대나 고리봉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여 답답하던 마음도 뻥 뚫린다. 지리산은 그립지만 사람이 너무 많은 등산로는 피하고 싶을 때, 그럴때는 지리산의 서북능선을 타면 된다.
남고리봉에서 탁 트인 경치를 내려다보며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고 만복대로 향하던 중간 쯤,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앗! 아까 남고리봉에서 쉬면서 스틱을 놓고 온 것이다! 봉우리 정상에서 내리막을 내려오는 동안은 스틱의 부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르려니 그제서야 스틱이 없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일반 등산이었다면 다시 가지러 가기 귀찮아서 스틱을 버리고 길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용하는 장비야 죄다 싸구려니 다시 사도 아까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두대간 종주 중.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장기종주였다. 스틱이 없으면 박배낭을 메고 오르막 등산로를 올라갈 수 없다. 나는 스틱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길을 되돌아 가는데 좁은 등산로로 아주머니들이 한분 두분 세분 네분... 아니 도대체 몇 명이야? 산악회의 아줌마 회원들이 끝도 없이 나타난다. 신기하게도 남자 회원은 한 명도 없이 모두 아주머니들 뿐이다. 그 분들 중 한분이 나의 스틱을 들고오고 계셨다.
"스틱이 예쁘게 세워져 있길래
분명 다시 가지러 올 줄 알고 챙겨가고 있었지~"
아주머니들과 함께 앞뒤로 나란히 걸어간다. 등산로가 좁아서 그들이 다 지나가길 기다리다간 이 행렬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아주머니들은 만복대 직전의 바위지대에서 식사를 하시고 나는 계속 길을 이어간다. 아주머니들이 나눠주신 샌드위치를 손에 꼭 쥐고서.
서북능선엔 비박을 하기에 좋은 공터도 많았다. 어제 노고단대피소와 성삼재휴게소를 지나 서북능선에 들어서서 비박을 할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그러기엔 지리산의 주능선에서 체력을 너무 많이 빼앗겨 버렸다. 그토록 힘이 없었던 어제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서북능선에서 가장 높은 '만복대' 에 도착했다. 보통 산의 높은 봉우리는 'ㅇㅇ봉' 이라고 이름 붙여지기 마련인데, 이곳은 '봉' 이 아니라 특이하게 '대' 이다. '臺(대)' 라는 한자는 '넓고 평평한 곳' 이라는 뜻으로, 만복대는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한 넓은 곳이라는 뜻이다. 과연 이름답게 삐죽 솟은 봉우리가 넓고도 넓다.
만복대에 올라서자 사방 거칠것이 없이 확 트인 세상이 내려다보인다. 남쪽으로는 어제 지나온 노고단의 돌탑이 선명하게 보이고, 동쪽으로는 나의 체력을 다 잡아먹은 반야봉과 남원시로 흘러내리는 지리산의 능선들이 겹겹이 펼쳐져 있다. 산 아래 옹기종기 모인 마을들도 무척이나 선명하게 내려다 보인다. 비 개인 다음날, 시야가 무척이나 선명한 날이다.
이런 선명함을 지리산의 주능선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천왕봉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면! 등산은 날씨가 가장 중요하다. 같은 장소를 같은 계절에 가게 되더라도 그 날의 날씨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인생 최고의 산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볼 것 하나 없는' 그저 그런 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복대에서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하고 이번엔 '정령치' 로 향한다. 조금 걷다보니 바위 옆을 돌아가는 공터가 나타났고, 거기에 왠 아저씨 한분이 앉아 박배낭을 내려놓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등산로에서는 거의 항상 내가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했는데 이번엔 한발 늦었다. 아저씨가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네온 것이다. 아저씨는 내게 인사를 건네며 좀 쉬다 가라고 권하신다. 마침 나도 점심을 먹어야 했기에 아저씨 옆에 배낭을 내리고 아까 받은 샌드위치를 꺼냈다.
그런데 왠지
이 아저씨, 누군지 알 것 같다.
아저씨는 나의 커다란 배낭을 보며 이것 저것 등산과 종주에 관한 것을 물으셨다. 내가 월요일부터 중산리를 시작으로 지리산을 타기 시작했다고 했더니, 자신도 월요일에 중산리에서 올라왔다며 깜짝 놀라신다.
"아저씨 혹시 연하천에서 주무시지 않으셨어요?"
그제서야 아저씨는
"아~ 그때 내 옆에서 라면 먹던 아가씨구나!"
라며 나를 기억해낸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자리가 없어 취사장에 있을 때, 아저씨도 내 옆에서 저녁을 드시고 계셨던 것이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구간
진행 구간 : 삼도봉(경남 산청, 전남 구례, 전북 남원의 경계)-반야봉 갈림길-반야봉-노루목-임걸령-노고단 고개-노고단 대피소(1박)-성삼재 휴게소-남고리봉-만복대(전남 구례, 전북 남원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2일 수요일 ~ 3일 목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