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서북능선에서 만난 아저씨는, 자신도 일시종주로 백두대간을 시작했으며 총 45일을 예상하고 대간종주를 이어 가신다고 했다. 백두대간의 24코스 700km를 45일로 나누어 하루에 15km~17km 정도씩 걷는다고 했다.
백두대간을 45일 만에 완주하는데
매일 15km 내외로만 걸으면 된다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지난 가을, 백두대간의 북쪽 끝인 진부령에서 소백산까지, 백두대간 전체 코스의 절반이 약간 안되는 구간을 걸으며 나는 32일의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서울로 돌아가 쉰 기간까지 합치면 2달이었지만, 오로지 산에서만 보낸 시간은 32일 이었다.
진부령에서 소백산 비로봉까지를 320km 정도라고 가정했을때 32일이 걸렸으니, 그럼 나는 하루에 고작 10km를 걸은 것인가? 아니었다. 나는 최소 8시간 이상 등산을 했었다. 아무리 못해도 하루에 15km는 이동한 것이다.
아저씨는 중간중간 가족과 친구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지원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종주를 완주 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한다. 대간길에서 물품을 지원받으며 쭉 이어가는 것과, 물품 지원을 받지 못해 중간중간 탈출과 재진입을 겸하는 것이 이렇게나 큰 차이를 불러 일으킨다니!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아가씨는 몇 일 만에 종주할 계획이야?"
계획?
나에게 그런 게 있었던가?
"하하하. 저는 그런거 없어요. 계획도 없고 완주 목표도 없어요. 그냥 체력 되는데 까지만 걸어요. 주변에 아름다운 관광지가 있으면 대간 이탈해서 거기도 살짝 들르구요. 저에게는 속도나 완주가 중요한 게 아니라서요.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자연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어요. 천천히 걸으면서 백두대간에 있는 이것저것을 다 구경하는 게 목표라면 목표죠. 작년 가을에 백두대간 남진으로 진부령에서 소백산까지는 진행을 했구요, 이번 봄에는 북진으로 지리산에서 소백산 까지만 가면 돼요."
말해 놓고도 멋쩍다.
계획도 없고 목표도 없는 것을
미사여구로 포장하려니
쓸데없이 웃음소리만 높아진다.
"벌써 백두대간 반을 진행한 거야? 와, 나보다 한참 선배님 이시네. 나는 등산은 처음이거든. 어쩌다가 백두대간에 꽂혀서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어. 더 나이 들면 영영 못하게 될까봐 급하게 출발했지. 그래서 걸음도 느릴거고 등산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 앞으로도 모르는 게 생기면 아가씨한테 종종 물어볼게."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아저씨, 어제는 어디서 주무셨어요?
노고단 대피소에서는 아저씨를 본 기억이 없는데요?"
"어제는 성삼재까지 걷고
성삼재 휴게소에서 택시 타고 구례로 내려가서
모텔에서 자고 올라왔지."
우와아아아~!!!
이런 백두대간 플렉스라니!
택시 타고 내려가서 모텔 숙박이 왠말인가!!
전문직 중년의 백두대간은 지지리도 가난하고 궁상맞은 백수의 그것과 클래스가 달랐다. 회계사라던가?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아저씨의 직업은 무슨'사' 인 데다가 자신의 회사를 직접 운영중이라고 했다.
"우와!
그럼 CEO 네요?"
"CEO는 무슨.
그냥 구멍가게지."
아저씨는 멋쩍은 듯 웃었지만 CEO라는 말이 듣기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작년부터 백수생활 유지중인데다 돈이 떨어져 가고 있어서 대간길에서 음료수 사 먹는 것도 손이 떨린다고 했더니,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눈빛이 '경탄' 에서 '불쌍함'으로 바뀌는 게 느껴진다. 아저씨는 저녁에 고기도 사주고 민박도 잡아줄테니 연락하라고 하셨다.
"하하하.
우연히 같은 곳에서 박을 하게 되면
그때 고기 사주세요.
나는 아저씨의 연락처를 정중히 사양했다. 이후로도 아저씨와 나는 대간길에서 자주 만났는데, 비박이나 숙박 장소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나는 거의 대부분 비박을 했고 아저씨는 거의 대부분 국도와 만나는 대간길에서 택시를 타고 나가 숙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령치까지 함께 걷다가 정령치 휴게소에서 맥주 한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등산이 처음이라던 아저씨는 "나 먼저 갈게." 라고 하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정령치에서 북고리봉에 올라 탁 트인 시원한 경치를 감상하고 나면, 여기서부터 지리산의 능선과 백두대간 길이 갈린다. 지리산의 능선을 그대로 따라 가면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세동치와 바래봉이 나타나고, 백두대간 길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남원시 주천면의 고기리 마을을 만나게 된다. 철쭉은 커녕 해발 높은 곳엔 새싹 하나 올라온 것이 없는 지금,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바래봉 능선을 버리고 대간길로 방향을 튼다.
그런데 이 길
으악!!
비탈의 경사가 장난 아니다!
분명 아직 지리산권인데도 등산로 정비가 거의 되지 않았다. 등산로인지 아닌지도 구분가지 않는 샛길 경사로를 엉거주춤 기어서 내려가야 한다. 등산로 주변으로 커다란 나무도 없고 울타리 목책이나 로프도 없다. 이 가파른 길에서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북고리봉에서 고기리 마을까지 거리가 3km인데 처음 500m가 장난아니고 미친듯이 가파르다. 만약 눈이 쌓인 겨울이라면 절대 지나가지 말아야 할 길이었다. 미친듯이 가파른 길을 내려오느라 발이 앞으로 쏠려서 발가락과 발바닥이 너무 너무 아팠다.
지도를 보면 마을에 도착하기 직전에 '활공장' 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서의 활공장은 화살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패러글라이딩을 할 때 '활공' 을 시작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보통 활공장은 해발 높은 곳에 넓고 평평한 땅이 조성된 곳이기에, 나는 오늘의 비박지로 그곳을 점 찍어 출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가도 활공장은 나타나지 않고, 더이상 내려갔다간 활공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이놈의 급경사 내리막은 끝날줄을 모르고 무식하게 계속 이어진다.
계속 계속 지도를 확인하며
계속 계속 이어진 길에 의심을 품으며 걸었는데
어느덧 마을이 나타나고...
어느덧
나는 자동차가 지나 다니는
지방도 위에 서 있게 되었다.
으으으... 젠장!
보통의 백두대간 길은 지방도나 국도와 만났을 때 차도만 건너면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차도나 마을을 만나게 되더라도 바로 다음코스로 진입하면 나무가 모든 것을 가려주는 산에서의 비박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 고기리는 달랐다. 지방도를 따라 2km 넘게 걷는 것이 바로 '백두대간 길' 이다. 마을을 끼고 2km를 더 걸어야 다시 산으로 진입하는 입구가 나타나는 것이다.
보통 때라면 2km 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르락 내리락 경사가 있는 등산로도 아니고 그저 찻길의 평지였다. 30분만 걸으면 되는 그 길을 이 때는 한발짝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오느라 발바닥에 불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발가락 마디 마디가 죄다 꺾여버린 것인지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고통이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하는 수 없이 민박을 잡았다. 방값이 3만원이라고 한다. 깎아달라고 사정 사정했다. 사장님은 요즘 기름값이 비싸서 안된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기름보일러 안 틀어도 되니 2만원에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흔쾌히 그러마 하신다.
방값을 계산하고 배낭을 던져 넣었다. 그리곤 방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누워있는데 금세 후회가 밀려왔다. 서울의 아파트는 열대야로 연일 더웠는데 시골의 민박은 방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기와 더불어 방 안에 축축한 습기까지 가득 베어 있다. 아아... 이러면 침낭이랑 옷들이 물을 먹을텐데... 아아... 이러면 자고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지 않을텐데...
오늘의 등산은 매우 편했는데 마지막 3km에 씹어 먹혀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쯤 비박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쯤 종주를 마무리하고도 정상적인 몸 상태로 저녁식사를 맞이할 수 있을까? 우울하고 서글펐다.
춥고 축축한 민박이었지만 의외로 무척이나 깊고 달게 잘 잤다. 자는 동안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만큼 피로가 쌓인 것도 있었지만, 아직도 혹한기 동계용 침낭을 챙겨다녔더니 주변 환경이 어떻든 침낭 안에만 들어가면 무척이나 아늑하고 포근하게 잘 잘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잠을 잘 자서 발의 피로도 풀리고 몸도 개운했다. 아침을 챙겨먹고 민박집을 나서니 오전 7시반,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종주를 시작한 오늘! 이래서 종종 민박을 이용해줘야 하는구나.
하지만 후회도 있었다. 지리산 등산 내내 대피소를 이용하고 마을로 내려와 또 다시 민박을 이용할 줄 알았다면, 대간을 시작하기 전에 이곳 민박집을 먼저 찾아와 무거운 비박장비를 맡겨두고 가벼운 몸으로 지리산을 통과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장 쓰지도 못 할 장비를 짊어지고 다니느라 사흘내내 고생이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껏 살아온 나의 인생이
지난 사흘간의 지리 종주 같았다.
아무리 무계획이 즐거운 게 여행이라도, 적어도 나는 출발하기 전에 지리산의 날씨 정도는 체크하고 출발했어야 했다. 자주 왔던 곳이라고 날씨도 체크하지 않고, 나의 체력도 파악하지 않은 채, 모든 짐을 이고 지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올랐다.
매일 똑같은 하루라고
아무런 계획도 목표도 없이
앞 날을 예상하지도 않고
지난 날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과거의 모든 고통을 이고 지고
그렇게 삶의 무게를 늘려간 것은 아니었는지.
남원시 고기리의 민박집에서 노치샘과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백두대간 종주를 산길이 아닌 아스팔스를 걸어야 하는 씁쓸함 만큼, 내가 살아온 지난 날도 씁쓸하게 느껴졌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구간
진행 구간 : 만복대(전남 구례, 전북 남원의 경계)-정령치-북고리봉-고기리 민박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진행 날짜 : 2012년 5월 3일 목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