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닷세만에 시작된 진짜 백두대간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남원의 고기리 마을에서 다음코스인 노치샘과 수정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방도의 아스팔트와 시멘트 마을길을 따라 2km 이상 걸어야 한다. 차도를 건너는 수준이 아닌 아예 따라가는 수준인 것이다. 이게 무슨 백두대간이야... 속상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먹고살기 힘들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두대간 트래킹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등산로를 정비하기 이전부터 이 곳에 마을과 도로가 있었겠거니, 생각한다. 이미 있던 마을과 도로를 다시 산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다음 코스인 수정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 '노치샘' 이라는 우물같은 샘이 있다. 노치샘에서 물을 채우려고 하는데 이 곳 마을회관과 동네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왜지? 왜 이렇게 익숙하지? 곰곰 생각해봤더니, 아하! 작년에 처음으로 지리산에 왔을 때 이 마을을 지나갔던 기억이 났다.




서른 두 살에 가출을 하고 한 달만에 집으로 돌아와 매일 매일을 술과 눈물에 빠져 지낼 때, 그런 일상을 끊어내고 싶어서 오빠의 낡은 코펠을 빌려 지리산 종주를 감행했었다. 처음 오르는 산이었지만 최대한 오래 머무르고 싶어서 지리산 주능종주 5일, 지리산 둘레길종주 5일, 그렇게 10일을 계획하고 이 곳으로 내려왔었다.




이 곳 남원시 주천면 노치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1코스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노치마을의 '노치샘' 은 지리산 둘레길과 백두대간 등산로가 정확하게 교차하는 지점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그 것이 첫 여정이었다면 생에 두 번 없을 진귀한 경험이었겠지만, 이미 지리산의 주능을 구석구석 밟은 후 둘러봤을 땐 기대에 비해 실망이 컸다. 야트막한 지리산의 낮은 능선과 시원하고 청명한 계곡을 끼고 걷는 길도 많지만, 마을과 시멘트길 아스팔트길을 끼고 걷는 길도 제법 많아서 순수 등산에 비해 감동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노치샘에서 물을 채운다. 작년에도 이 곳에서 물을 채웠던 기억이 난다. 작년에도 올해도 나의 생명을 이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드디어!

드디어!

수정봉으로 향하는 산길에 들어섰다.




민박집에서 출발한지 35분 만이다.




5월 초의 날씨가 무에 이리 더운지, 오전 8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햇빛 쨍쨍이다. 그나마 선선한 바람이 있어서 그늘도 없는 아스팔트 길을 걸어오는 것이 그닥 힘들지는 않았다.




노치마을에서 수정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시작은 가파르지만 온통 소나무밭이라 자연그늘이 형성되어 기분이 좋았다. 산의 능선을 따라 비탈진 곳에 소나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산의 사면에 계단식 밭을 일궈 소나무를 일정하게 심어놓은 것 같았다. 아! 이 곳에서 비박을 했어야 했는데! 바로 아래 샘이 있는 평평한 소나무 숲이라니!





SE-023eea8d-94b6-414d-8bcd-085344e3d8b2.png?type=w1





동네 아저씨들 몇 분이 아침부터 소나무 아래 앉아 산림욕을 하고 있었다. 산림욕인지 명상인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나중에 이 곳 마을에 터를 잡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

매일 아침 산림욕과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

소나무 아래라 한겨울 눈이 내려도

여전히 푸른 곳.




지리산이 귀촌 1번지인 이유를 알겠다. 여느 시골과 다르게 지리산 자락의 마을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천혜의 환경을 가진 곳이니 사람들이 모여들 수 밖에 없겠지.




수정봉 정상에 오를 때까지 소나무밭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늘 하나없는 아스팔트길을 걷다가 싱그러운 소나무숲을 걸으니 기분이 참으로 좋다. 오늘같이 햇볕이 심한 날은 모름지기 그늘이 많은 산에 있어야 한다.




작년에 지리산에 오르기 전 '혼자서 국토대장정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더랬다. 그러지 않고 등산을 하길 정말 잘했다. 땡볕이 심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 날이라면 더위 먹기 딱 좋은 것이 국토대장정인 것이다. 게다가 산길 흙길이 아닌 시멘트길 아스팔트길을 하루 종일 걸으면 무릎과 발목의 관절에 얼마나 큰 무리가 갈 것인가.




나는 내 아이들이 자라도 국토대장정은 보낼 생각이 없다. 국토대장정을 할 기회로 백두대간을 타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시 이런것도 다 직접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는 점심으로 빵이 아닌 라면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민박집에서 축축해져버린 침낭과 우모복을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넓은 공터가 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싶었다. 수정봉 정상에서 한 시간 반을 더 이동한 곳에 딱 내 마음에 드는 공간이 나타났다. 등산로에 나무그늘이 가득한 넓은 공터가 있고, 대간길에서 삐죽 벗어난 곳에는 그늘 없이 햇볕만 가득한 공터가 따로 있었다. 햇볕 아래로 가보았더니 누군가의 묘소가 두 동 있다.




나는 묘소의 주인 어르신께 양해를 구하고 그 곳에 나의 침낭이며 옷가지를 널었다. 볕이 무척이나 좋다. 습기도 마르고 살균도 되겠다. 그리고 다시 나무그늘로 돌아와 버너와 코펠을 연결해 라면을 끓였다. 랄라~




이거지, 이거야!

그래 이거야!

다시 대간을 시작한지 닷세만에

드디어 내가 원한 진짜 대간다움을 만끽한다.




점심을 먹고 다이어리도 정리하고 대간 종주기도 쓰고, 그렇게 나무그늘 아래 앉아서 두 시간 정도를 여유롭게 보냈다. 아! 이런 것이 진정한 행복이구나. 내가 원한 종주는 이런 것이었다.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시간에 쫓겨 급하게 이동하는 것은 하고싶지 않았다. 적어도 산에서 만큼은.




중간에 한번 뒤집어 놓은 침낭과 우모복은 두 시간 동안 무척이나 뽀송하게 잘 말라있었다. 햇볕을 가득 담은 침낭에 얼굴을 부볐더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엄마 품에 안긴 것 같은 기분이다. 다시 배낭을 싸서 길을 이어간다. 이번엔 내리막 길이다. 국도와 만나는 '여원재'로 향한다.





SE-5c24485b-1b51-4313-b9f7-66a0812122c5.png?type=w1





수정봉을 지나면서부터 낮은 산에 드문드문 철쭉이 나타났다. 이름을 모르겠는 작은 봄꽃들도 제법 눈에 보였다. 지리산에 있을 땐 아직도 봄이 오려면 한참 멀은 것 같더니, 낮은 산에 오니 천지가 봄이다.




이거지, 이거야!

그래 이거야!

이런 봄꽃의 환대를 받으려고

부랴부랴 집을 떠나왔다.




다시 대간을 시작한지 닷세만에
드디어 내가 원했던
진짜 대간이 시작되었다.




'여원재' 에 당도하니 대간길 바로 옆에 시원한 막걸리를 파는 민박집이 있었다. 아저씨 두어명이 배낭을 내려놓고 평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어제 정령치 휴게소에서 맥주 한 캔을 먹었더니 이후 등산이 너무 힘들었었다. 그래서 오늘은 술이 있는 환경을 모른척 지나쳤다. 그리고 오후 내내 땅을 치고 후회했다.




막걸리가 싫으면 다른 시원한 음료수가 있는지라도 물어볼 걸... 캔음료는 없어도 미숫가루나... 아니면 냉커피라도 한 잔 마실 수 있지 않았을까? 오후 내내 땡볕 작렬이었다. 더이상 시원한 바람도 불지 않는다. 5월 4일의 날씨가 이렇게까지 더울 일인가? 너무 더워서 계속 물을 마시며 걸었는데 미지근한 물로는 도저히 갈증이 해결되지 않았다.




여원재를 지나 고남산 정상에 오르자 왠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알고보니 그 곳에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할아버지 두 분이 함께 근무를 서고 계신 것이었다. 산불방지기간은 끝났는데 그래도 초소를 지키는 임무는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등산로에서 나와 산불감시초소 앞으로 나아가자




우와아아아아~!!!

주변의 사방팔방이 다 내려다보였다.

와아아아아아~!!! 끝내준다아!!!





SE-40058d8c-fb2b-4d6c-a189-e67686c824dd.png





남쪽으로는 바래봉부터 만복대까지 지리산의 주능과 서북능선이 펼쳐 보였고, 북쪽으로는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대간길이 거침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리산 만복대에서 내려다 본 세상도 좋았지만 이 곳 고남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 훨씬 더 좋았다. 해발 1500m 가 넘는 지리산엔 아직 봄이 오지 않았지만, 해발 800m 아래의 풍경에는 봄이 가득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분명 퇴근시간이 지난 듯 보이는데 나를 흘끔거리며 퇴근할 생각을 안 하시는 할아버지들. 나의 커다란 배낭 때문에 퇴근시간을 늦추시는 것 같았다. 이 곳에 배낭을 내리고 텐트를 치면 "이 놈!" 하고 호통을 치실 것만 같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길을 이어간다. 그리고 또 땅을 치고 후회한다.




고남산의 정상석이 있는 곳과 거기서 5분 거리인 헬기장이 얼마나 평평하고 좋았는지 모른다. 부드러운 연한 풀들이 낮게 자라 텐트를 치면 흙도 안 묻을 최고의 야영지를 뒤로 한채 돌아서야 했던 것이다. 쭉쭉 이어진 내리막을 내려가려니 속이 미어진다.




나는 어제 고기리 마을로 하산하지 말고 지리산 서북능선의 마지막인 북고리봉에서 비박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은 할아버지들이 퇴근한 이후에 이 곳에 도착해서 고남산 정상에서 비박을 했어야 했다.




어제부터 잠자리가 틀어지니

그것이 오늘까지도 이어진다.

아... 아까워...




고남산 정상에서 한 시간 반쯤 내려오니 텐트 한 동이 들어갈만한 공터가 나타났다. 오후 6시 45분. 아직도 날이 밝다. 배낭을 내리고 텐트를 펼쳤다. 다시 대간을 시작하고 첫번째 비박이다.





SE-5a257a5c-c7b2-4854-8e57-378bec692b29.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백두대간 ※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구간

진행 구간 : 고기리 마을(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수정봉-여원재-고남산-2.4km이후 비박(전북 남원과 장수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4일 금요일

episode57.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 57 -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이전 16화#56. 길이 편하다고 방심하지 말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