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다시 대간을 시작하고 처음 한 비박은 나름 괜찮았다. 소나무숲이라 나무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은 것이 아쉽긴 했지만 피곤해서 바로 곯아 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고 텐트 입구를 열었을 때, 나의 감각으로 일시에 들어오는 새소리와 새벽의 촉촉함이 나를 기분좋게 해주었다.
이거지!
바로 이거야!
이래서 비박을 하는 거지!
날이 무척이나 좋다. 하늘은 깨끗하고 소나무숲은 새벽의 찬 기운을 머금어 더욱 푸르다. 천천히 밥을 끓이고 밥이 끓는 동안 텐트와 침낭을 정리한다. 고남산 정상에서 비박을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이룬 산에서의 비박은 나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며 하는 비박도 좋지만, 이렇게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하는 비박도 좋다. 산에서 하는 비박은 뭐든 다 좋다. 봄이 가득한 낮은 산에서 비박을 하고 일어나니, 문득 지난 겨울 소백산에서의 비박이 떠올랐다. 그것이 불과 4개월 반 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일상에서는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산을 다니고 비박을 해보면 경이롭고 신비한 일로 다가온다.
오전 8시. 오늘의 종주를 시작한다. 한 시간쯤 거리에 지방도와 만나는 유치재를 지나게 되는데, 그곳 매요마을에 '매요휴게소' 가 있다는 표시가 있었다. 대간꾼들에게 요긴한 휴게소라고 했다. 나는 거기서 라면과 행동식과 이온음료를 구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휴게소가 아닌 그냥 시골 점빵. 게다가 문이 잠겨 있다! 아무리 대간길에 있는 작은 가게라해도 오늘이 토요일인데 문이 닫혀있다니, 생각지 못한 반전이었다. 행동식은 둘째치고 물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길을 이어간다.
그런데 이번엔 대간길이 끊겼다!!
산에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등산로를 잘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이 뚝 끊겨버렸다. 산을 깎아 공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런 건 예정에 없던 거잖아... 접근금지 로프 너머를 내려다보니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공사현장이 보이고 저 아래에선 포크레인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게다가 공사장 너머로는 지방도도 국도도 아닌 '88올림픽고속국도' 가 관통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백두대간 지도에는, 여기 공사장 바로 아래에 고속국도를 가로지르는 지하통로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포크레인이 저토록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지하통로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하다.
멘붕이 온다.
이곳 남쪽의 백두대간은
작년에 지나온 북쪽의 백두대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툭하면 마을이 나타나고
툭하면 지방도나 국도를 만나고
심지어 백두대간 등산로 한복판에
공사장이 있다.
지리산을 벗어난 이후로 대간길의 고도도 너무 낮아서, 이것이 백두대간인지 그냥 동네 뒷산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미 끊어져버린 산맥을 억지로 조각조각 이어 맞춘 듯한 느낌이다. 하아... 작년에 북쪽에서 시작하지 않고 이곳 남쪽에서부터 시작했더라면, 나는 백두대간에 별다른 애정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조금 가다가 치워버렸을 지도.
정신을 가다듬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간다. 나가다보니 옆으로 빠지는 등산로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하지만 등산로의 끝은 논밭이었고 등산리본이나 이정표나 하다 못해 손글씨로 적어놓은 임시 팻말도 없었다. 여기서 어디로 어떻게 나가야 저 고속국도를 건널 수 있는 것일까?
밭 너머로 저기 멀리 높은 담장이 쳐져 있고, 그 너머로 알록달록한 간판이 보였다. 뭔가 식품회사의 지방공장 같았다. 나는 그 곳을 바라보며 걸었다. 토요일이지만 지방이라면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저 정도 크기의 공장이라면 적어도 경비아저씨라도 있을 것이다. 저기서 물도 얻고 길도 물어야 겠다.
그런데 그 간판의 정체는 다름아닌 고속국도 휴게소의 주유소 간판이었다!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백두대간 경로에서 1km 동쪽으로 '지리산휴게소' 가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찾은 것이다!
꺄아~~~
이런 횡제라니!!!
뒷걸음 치다 오아시스를 찾았구나!!!
당당히 휴게소로 들어가 행동식도 사고 이온음료도 사고, 식당의 정수기에서 나의 텅 빈 물통들도 채운다. 가을등산보다 봄등산에 배낭이 더욱 무거운 이유는 바로 이놈들 때문이다. 겨울로 깊어지는 가을에는 목이 마르지 않았는데, 여름으로 바짝 다가가는 봄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목이 바짝바짝 탄다. 물의 무게 때문에 백두대간을 종주할 수 없었다는 어느 아저씨의 말이 백배 공감되는 요즘이었다.
화장실에 들러 세수도 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다시 휴게소 매점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 백두대간 종주 중인데요,
여기 고속도로를 건너가야 하는데
어디서 건너야 할까요?"
휴게소 직원은 이런 질문을 많이 받은 것인지 메뉴얼에 적힌대로 설명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면 휴게소의 동쪽 끝으로 뾰족한 기념탑이 나올 것이다, 그 탑 뒤쪽으로 가보면 작은 지하도가 있다, 그 지하도를 통해 건너편의 휴게소로 갈 수 있다, 라고 바쁜 와중에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친절한 직원 덕분에 무사히 고속국도를 건넌다. 고속국도를 건너고 다시 백두대간 산길을 찾으려고 보니 이쪽도 공사중이긴 마찬가지였다. 이 곳 어디쯤에 등산로의 입구가 있을지 매의 눈으로 스캔하며 걷는다. 주변의 나무를 다 베어버린 공사현장에서, 고맙게도 대간리본이 달린 나무는 베지 않고 그대로 살려둔 것이 보였다.
무념무상으로 발치만 보며 걷는 오르막의 끝에서 홀로 쉬고 있는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주말을 이용해 백두대간 구간종주를 하는 아저씨였다. 작고 가벼운 배낭을 메고 있던 아저씨는 박배낭의 나를 보더니 고속도로를 어떻게 건너왔는지 물으신다. 내가 지나온 경로를 알려드리자, 아저씨는 그 길을 못 찾아서 고속국도를 무단횡단 했다고 말씀하신다.
"네에?
차들이 저렇게나 쌩쌩 달리는데요?"
깜짝 놀라 반문했더니 그래서 죽을뻔 했다며 너털웃음을 웃으신다.
"그런데 백두대간이 너무 많이 끊겨 있어요. 그쵸?"
아저씨도 자신이 생각했던 대간과 실제의 대간이 너무 다르다며, 이 대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먼저 자리를 털고 대간을 이어가신다. 그 뒷모습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나의 뒷모습도 저렇겠지? 이 길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이 길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백두대간은
그저 산길의 연속일 뿐인데
그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닌지.
아무 것도 아닌 길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처럼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미 전국의 아름다운 산을 다녀 본 사람이라면 오히려 백두대간에서 실망감만 잔뜩 안게 될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북쪽의 대간길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가득 담았더니 남쪽의 대간길은 시시하고 지루했다. 무념무상으로 길을 걷는다. 기대가 클 수록 실망도 큰 법. 지금껏 쌓아온 기대를 훌훌 털어버려야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으리라.
오후 4시. '복성이재' 에 닿았다. 시골의 좁은 지방도와 만나는 복성이재에는 주차된 차가 상당히 많았다. 길을 건너 봉화산 방면으로 오르자 하나 둘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토요일이었지만 아침부터 지금까지 대간길에서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봉화산 방면에서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 뭐지? 왜 사람들이 이 산에만 모여있는 거지?
한소끔 오르막이 끝나고 탁 트인 전경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봉화산의 매봉에 군락을 이룬 철쭉이 만개한 것이다! 우와아아~!!! 드디어 찾았다! 내가 원했던 봄꽃따라 행진하는 백두대간 코스!
어제 걸은 수정봉 이후의 코스에도 철쭉은 있었지만 여기처럼 군락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두 그루가 아담하게 피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곳 봉화산 매봉은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능선이 전부 다 철쭉이다. 꺄아아아! 이렇게나 아름다운 꽃밭이라니!!
이미 오후 4시 반이 넘은 시간인데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다 보고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 시간에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알고보니 오늘과 내일 주말동안 이곳에서는 '봉화산 철쭉제'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꽃밭에서 비박을 하면 생애 두번 없을 가장 아름다운 밤이 되겠지만, 내일은 축제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 지어 올라 올지도 모른다. 적어도 철쭉밭은 벗어난 곳에서 비박을 해야 옳다. 나는 꽃들을 뒤로 하고 봉화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구간
진행 구간 : 고남산 2.4km 비박(전북 남원과 장수의 경계)-유치재-사치재(88올림픽고속국도/ 지리산휴게소)- 새목이재-복성이재-매봉-봉화산 정상(전북 남원과 장수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5일 토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