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시간이 늦었는데 매봉의 철쭉이 너무 아름다워서 더욱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무리 빨리 걸으려 해도 이미 철쭉에 빼앗긴 마음은 좀 처럼 앞을 보지 못한다. 몇 걸음 가다 돌아보고 몇 걸음 가다 돌아보고. 봉화산 정상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완만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상에는 산 아래를 조망할 수 있는 멋들어진 전망대 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끝내주는 야영지다. 하지만 4시부터 조금씩 불던 바람이 6시가 넘어서자 더욱 거세지더니 전망대에 올라서자 사방에서 나를 공격한다. 이렇게 좋은 야영지를 오늘도 또 포기해야 하다니. 봄날의 날씨와 남쪽의 대간길은 뭔가 사람을 괴롭히는 구석이 있다.
정상에서의 야영을 포기하고 지척의 헬기장으로 이동했다. 경사진 능선과 평평한 헬기장이 만나는 구석에 낮게 자란 나무들이 있었다. 나무 아래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가까스로 텐트를 펼친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텐트를 치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찌저찌 텐트를 설치하고 안으로 들어가 입구를 닫아버렸다. 그리고 5분도 안되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비에 옷이 다 젖을 뻔 했다.
다행히 자고 일어나니 비바람은 멎어 있었다. 아침을 먹는 동안 헬기장의 너른 볕에다 침낭과 텐트를 널어 말렸다. 다시 종주를 이어가기 위해 봉화산 정상으로 나왔더니 전망대 데크에 조폭같이 생긴 아저씨 한분이 있었다. 인상도 험악하고 덩치도 우람하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저씨는 배낭 대신 등에 지는 아이스박스를 가지고 있었다. 산 정상의 아이스크림 장수였던 것이다. ㅎㅎㅎ 아저씨는 '봉화산 철쭉제' 를 맞아 관광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팔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알고보니 봉화산 정상 저편으로 산의 정상부까지 올라오는 임도가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올라왔다고 한다.
아저씨는 전국의 축제 현장을 찾아다니며 아이스크림을 판다고 했다. 이것이 주업인지 취미 삼아 주말에만 하는 부업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저씨 말씀으로는 꽃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축제가 끝난 직후' 라고 한다. 그 곳이 어디든 축제가 끝나고 난 직후의 평일에 찾아가면 최고로 만개한 꽃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나는 아저씨에게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 본격적으로 오늘의 대간을 시작한다.
봉화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은 낮은 풀 사이를 지나는 편안한 능선길이다. 공원을 산책하듯 평탄하고 수월하다. 산 정상까지 올라오는 임도와 정자가 있는 '봉화산 쉼터'를 지나 한시간 쯤 더 걷다보면 끝내주는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넓은 전망바위 아래로 함양의 산세와 마을이 촤라락 펼쳐 보인다. 누워서 낮잠을 자거나 점심을 먹으며 쉬어간다면 신선놀음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다. 하지만 나는 출발한지 한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쉬어가기도 애매하고 점심을 먹기엔 더욱 이른 시간. 기분 좋은 느낌만 간직한 채 계속 길을 이어간다.
공원같은 초지가 끝나고 어느덧 숲이다. 좁은 등산로가 아래로 아래로 이어진다. 봄의 기운을 가득 뽐내는 여릿한 나무들 사이를 걷는 기분이 일품이다. 월경산 갈림길에서 우루루 지나가는 산악회 회원들을 만나고, 중재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또 한 팀의 산악회 회원들이 우루루 내려온다. 일요일은 일요일이구나.
'중재(중치)' 라고 하는 곳은 동쪽의 전남 장수와 서쪽의 경남 함양으로 모두 임도가 이어진 곳이다. 보통 이곳을 기점으로 백두대간을 마무리하고 마을로 탈출하는 경우가 많다. 점심을 먹으려고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산악회 회원들이 하나둘 내려오더니 내가 앉은 평상에 같이 앉아 쉰다.
"식사 하고 가세요~"
라고 했더니, 아저씨 아줌마들은 이곳에서 마을로 하산할 거라고 한다. 하산하면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거라고 한다. 오랫동안 산에서 지내면서 염치도 없어지고 낯짝도 두꺼워진 내가
"하산하실 거면 남은 음식 좀 주고 가세요~"
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건 뭐 칼만 안 들었지 강도행세나 다름 없다. ㅎㅎㅎ 그러자 여기저기서 구호물품이 날아들었다. 포도 한 주먹, 초코바 4개, 미니초코바 한 봉지, 떡 두 주먹, 물 한 병. 그러면서 아줌마 아저씨들은 당일 산행이라 더 이상 줄 게 없다며 아쉬워 하신다. 아니, 이렇게나 많이 나눠주시고 줄게 없다니? 산행 인심이란 이렇게 넉넉하다. 주고도 더 나누지 못해 미안해 한다.
아줌마 아저씨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그분들은 임도를 따라 하산하셨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중치' 에서 '중고개재' 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그런데 중고개재에서 '백운산' 정상까지는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된비알도 이런 된비알이 없다. 주변의 경치를 바라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발 끝만 보고 걸어야 한다.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는 순간 뒤로 벌렁 넘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정도로 경사가 심하다.
나 홀로 백두대간 7일차. 홀로 산행을 일주일째 이어가다 보니 심심하고 외롭고 우울하기 짝이 없다. 초봄의 산은 아직까지 아름다운 풍경보다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아서 풍경 덕분에 기분이 상쾌해지고 얼굴 한 가득 미소가 퍼지는 일은 하루 온종일 세 번을 넘기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친구 하나 없이 땅만 보며 걸음을 이어가자니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하는 번민이 수시로 찾아온다.
체력이 받쳐준다면 이십여 일 쯤 대간을 쭉 이어가고 싶었는데,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받쳐주지 않아서 중도에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백운산' 정상. 드디어 된비알 오르막이 끝났다. 헬기장을 겸한 넓은 정상부에 당도하자 갑자기 날이 흐려지더니 바람이 불면서 사방이 어두워진다. 나는 덜컥 무서워져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걸음을 서두른다.
오늘은 백운산을 지나 영취산까지 간다. 백운산부터 영취산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산죽나무길이다. 아주 좁은 등산로 양 옆으로 어깨 높이까지 자란 산죽이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다. 종아리 높이로 자란 산죽은 신록이 들어차지 않은 산길에 초록 생명을 불어넣는 기분 좋은 길이지만, 어깨 높이로 자란 산죽길은 어두컴컴하고 기분이 나쁘다.
등산로가 좁아서 산죽이 자꾸 내 몸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든다. 어두컴컴한 산죽 아래서 무언가 손이 툭 튀어나와 나의 발목을 잡을 것만 같다. 이토록 어두운 날씨에 이런 길이라니. 공포로 맥박이 요동치는 소리가 나의 고막에까지 전달된다.
영취산 정상에서 서쪽 아래로 1km 지점에 야영장과 물 표시가 있었다. 야영장이 있으면 가까운 곳에 민박도 있겠지 싶어서 정보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물도 떨어지고 핸드폰 배터리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사람이 그리운 오늘, 나는 꼭 민박을 하고 싶었다.
영취산 정상에서 야영장까지는 정말이지 가까웠다. 하지만 이 길을 다시 올라가려면 식겁할 것 같다. 경사가 장난 아니다. 야영장은 이름만 야영장일 뿐, 그냥 숲속의 공터 수준이었다. 그 곳에 산 고갯마루의 동동주와 파전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등산을 한 것 같지 않은 아저씨들이 드문 드문 앉아 동동주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가게 주인에게 가까운 곳의 민박집 위치를 물으니, 걸어서 가려면 한참 걸린다며 가게의 컨테이너 방에서 자고 가라고 하신다. 가격을 물으니 삼만원 이란다. 내가 호들갑을 떨며 삼 만원은 너무 비싸다, 요즘이 비수기라 제대로 된 민박집을 가도 삼만원에 잘 수 있는데, 이곳은 정식 집도 아닌 컨테이너 아니냐, 이만원에 해달라, 사정을 했다.
"아저씨 이만원에 해주세요. 네에?"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학생도 아니면서 학생이라 돈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주인 아저씨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대신 옆에서 동동주를 마시던 다른 아저씨들이 싸게 해주라고 성화다. 젊은 아가씨 혼자 백두대간 하는게 대견하지 않냐며 좀 깎아주라고 "쫌!" 을 외친다.
주인 아저씨는 마지 못한 듯 그러마 했고,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주인 아주머니는 무엇이 웃긴지 계속 웃고만 있었다.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아저씨가 라면과 사이다를 주문하며 나에게 저녁으로 먹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라면과 사이다 값을 올려놓았다.
"아니에요. 이 정도는 저도 살 수 있어요. 괜찮아요."
사실은 벌써부터 눈이 반쯤 풀릴 정도로 취한 아저씨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일행도 없이 이런 곳에서 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일까? 그런 아저씨의 도움을 받고싶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단 둘이 마주쳤다면 잔뜩 경계했을, 그런 인상의 아저씨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중히 사양하는 나에게 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젊은 시절에
산을 참 좋아했어요.
어른들께 많이 얻어먹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요.
젊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면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들이 도와줘야 해요.
그게 나이 든 사람들의 의무인 거에요.
아저씨의 외모를 보고 편견을 가졌던 나는 머리 한 쪽을 쎄게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아저씨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라면과 사이다를 먹었다.
나를 바라보던 아저씨의 시선이 나의 커다란 배낭으로 옮겨갔다. 한참동안 나의 배낭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먼 곳의 산 능선으로 시선을 옮기며 맥주를 들이켰다. 젊은날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오늘날을 후회하는 것인지, 아저씨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3구간
진행 구간 : 봉화산 비박(전북 남원과 장수의 경계)-중재-중고개재-백운산-영취산-벽계쉼터 민박(전북 장수)
진행 날짜 : 2012년 5월 5일 토요일 ~ 6일 일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