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아무도 없는 산에서 '나'에 갇혀버렸다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맥주와 동동주를 마시던 손님들이 모두 가고 나자, 주인부부도 가게 문을 닫고 산 아래 마을로 떠나버렸다. 영취산 아래의 '벽계쉼터' 에 나 홀로 남았다. 사람이 그리워 민박을 했는데 이번에도 혼자 남게 되었다.




정식 민박이 아닌 주인집 사람들이 유사시에 사용하는 컨테이너 방이라 샤워장이 따로 없었다. 쉼터 앞 음수대에서 세수하고 발도 씻고, 수건을 적셔 와 방 안에서 몸을 닦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방바닥이 전기판넬이라 뜨끈뜨끈하다는 것이었다. 백두대간 종주 7일만에 처음으로 뜨끈한 곳에 몸을 지지니 뼈마디가 다 늘어나는 기분이다.




조금은 외로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뜨끈한 곳에서

눈치 볼 사람 없이 혼자 뒹굴 수 있으니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잠을 잘 잔 덕분에 5시 30분에 일어났다. 잠시 쉼터 앞으로 나가보았으나 딱히 일출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아침을 끓이고 짐을 챙겼다. 천천히 밥을 먹고 느릿느릿 짐을 챙긴다. 그리고 주인부부가 돌아오기 전에 나는 산장을 떠나 영취산 정상으로 향했다.




쉼터에서 영취산 정상까지는 오름짓으로도 2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단뿐이라서 잠시 쉬지도 못하고 계속 걸어야 했다. 일단 영취산에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완만한 능선에 어제와 비슷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시원한 나무숲이 이어지다 키높이의 산죽길이 이어지다 한다. 나무숲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지만 산죽길은 오늘도 나를 미치게 한다. 햇빛쨍쨍 찌는 듯한 더위에 사람의 키 높이까지 자란 산죽이 얼굴과 어깨를 할퀸다. 젠장! 짜증난다!




드문 드문 전망지가 나타나 그나마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런 전망지라도 없었으면 나는 미쳐버리고 말았을 거야. 혼자 산에 갇힌지 8일째. 산죽이 이토록 애워싸고 있으니 정말이지 갇힌 기분이 든다. 아무때고 탈출할 수 있고, 어디서든 탈출할 수 있고, 탈출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도대체 나는 왜 탈출하지 못하는 것인가.




더위로 인한 불쾌지수와 산에 갇힌 우울감으로 주변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꾸역꾸역 발이 앞으로 나아가니 몸도 따라갈 뿐이다.




그렇게 걷고 걷고 걷다가 기가 막힌 전망바위를 발견했다. 거북이처럼 생겨서 거북바위인줄 알았는데, 지도를 자세히 보니 거북바위가 아니고 그냥 '북바위' 란다. 신라와 백제의 영토싸움에서 이 곳을 차지한 자가 바위에 올라 북을 쳤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SE-603c3ac0-c620-4717-8238-417d170c5c55.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백두대간 ※





과연 바위에 올라 북을 치면 산아래 모든 사람이 다 올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기가 막힌 전망을 자랑한다. 바위 아래로 장수군 대곡리의 저수지와 함께 주변 능선이 거칠 것 없이 펼쳐 보인다. 그 바위 위에 중년의 부부가 앉아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등산복도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맥주와 과일을 늘어놓고 대화도 없이 그저 산 아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낭만을 깨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더위와 우울감으로 낯선 사람과는 말도 섞기 싫어서 그랬는지, 나는 평소와 다르게 인사도 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부부 중 남편이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쪽에서도 인사는 없었다. 전망이 좋은 북바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그대로 길을 이어간다.




내리막 끝에 '민령' 에 도착했다. 드넓은 초원이다. 아! 드디어 숲이 끝나고 초원지대구나! 종아리까지 웃자란 풀들이 사방팔방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 아름드리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때마침 점심시간. 나는 나무 아래 배낭을 내려놓고 점심식사를 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는데도 나는 왠지 멍하다. 더위를 먹은 것인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데도 전혀 즐겁지 않다. 사람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말 없는 나무 말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점심을 먹고 조금 쉬다가 이어지는 '깃대봉' 으로 오른다. 이런 날씨에 이런 기분으로 오르막이라니. 더욱 지친다. 이미 나는 나의 생각에 갇혀버린지 오래다. 백두대간의 풍경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70리터 배낭 가득 오렌지와 맥주만 챙겨들고 경치 좋은 곳에 앉아 하루를 낭비하고 싶다. 북바위에서의 그 부부처럼.




깃대봉 정상을 지나 내리막을 지나다보니 나무그늘에 사람 하나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지리산 만복대에서 만나 정령치에서 함께 맥주를 마셨던 '캔맥주'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점심을 먹고 있었다.




"여어~ 또 만났네!

점심은 먹었어?"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똑같이 8일째 홀로 산길을 걷고있는데 나는 우울증 환자가 되었고 아저씨는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아저씨는 이 날씨가 힘들지 않은가? 대간길이 지겹지도 않은가? 등산이 처음이라고 하시더니, 그저 모든 것이 다 신기하기만 하신 걸까?




"네. 먹었어요..."




나는 잔뜩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저씨 옆에 서서 물을 한모금 마시고 다시 말했다.




" 저 먼저 갈게요."




아저씨는 뭔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는데 나의 분위기에 짓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떠나보낸다. 그토록 사람이 필요했는데, 막상 사람을 만나니 웃고 떠들 기분이 아니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지 못했다.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울고 싶었다. 이 땡볕 아래서 나는 지치도록 울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치만 바라보며 걷고 걷고 걷다가 육십령에 도착했다. 26번 국도와 만나는 곳이다. 육십령의 국도를 지나 다시 산길로 접어들면 거기서부터는 '덕유산' 이 시작된다.




육십령휴게소의 커다란 매점에 들러 이온음료와 초코파이를 샀다. 계산을 하며 혹시 쌀을 구입할 수 있는지 여쭈었다. 사장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들이 먹는 쌀을 가지고 나왔다.




"이 정도 드리면 될까요?"




"아니요, 너무 많아요. 그것 반만 주세요. 배낭이 너무 무거워서 많이 못 들고 다녀요."




"젊은 아가씨가 혼자서 정말 대단하네요. 쌀이 떨어져도 대간 종주를 계속 이어가다니요."




혼자서 산을 타는 대단한 아가씨라서 평소에는 팔지 않던 쌀을 팔아주신 것인가. 영취산 아래 벽계쉼터에서 만났던 술 취한 아저씨가 생각났다. 젊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고자 하면 나이 든 사람들이 도와줘야 한다는 말. 육십령 휴게소의 아저씨도 알게모르게 그런 느낌에 밀려 나에게 쌀을 내어주신 것이리라.





다시 힘을 내자!
이토록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깟 날씨가 무슨 대수랴!
다시 힘을 내자!




오후 3시 반. 육십령의 국도를 건너 덕유산권의 첫 번째 봉우리 '할미봉' 으로 향한다. 오르막의 시작은 평범한 숲길이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숲길. 평범한 산길.




20분 쯤 올랐을까? 뭔가 인기척이 느껴져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등산로 한 옆에서 너구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야생동물을 만나 희열에 들떴을 나였는데 그 날은 조금 이상했다. 너구리와 눈이 마주쳐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그 눈동자에 나의 엄마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엄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엄마를 껴안고

나 너무 힘들다고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거냐고

나는 도대체 언제쯤 편해질 수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꾸역꾸역 참고있던 감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울먹이며 엄마를 부르며 한 발을 내 딛는데 너구리가 쏜살같이 도망간다. 눈물이 가득찬 눈을 감았다 떴더니 너구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엄마는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고 한발 한발 내딛어 길을 이어갔다. 다시 10분쯤 걸었을까.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봤더니 이번엔 고라니가 나를 피해 산비탈로 뛰어간다.




엄마!
엄마!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도망치는 고라니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붙박힌듯 자리에 서서 엄마를 외쳐 불렀다. 그렇게 부르면 엄마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 다시 돌아와 나의 종아리에 얼굴을 부빌 줄 알았다. 고라니를 껴안고 그동안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쏟아내고 싶었다. 30년 동안 못 했던 말들을 밤새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너구리도 고라니도 엄마도 없었다.

이 커다란 산에 나 혼자 뿐이었다.




왜 계속 도망가는 거야
왜 계속 나를 버리는 거야
제발 나를 버리지 마...
제발 나를 버리지 마...




나는 울면서 길을 이어간다.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숲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물이 계속 흘러서 숲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SE-149cbe06-faac-4ace-b15a-33c86b95d7f2.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백두대간 ※





할미봉을 이루는 암릉을 오르고 암릉 위에 설치된 로프를 잡고 올라가면서도 나는 계속 울고있었다. 울음이 잦아들었다가도 무언가 하나가 나를 툭 건드리면 다시 울음이 터져나왔다.




숲길이 끝나고 바위가 나타나니 다시 울음이 터졌고 바위를 오르다 로프를 잡아야 하니 다시 울음이 터졌다. 할미봉에서 보여진 아름다운 덕유산의 능선 때문에 다시 울음이 터졌고 암릉 암릉마다 기가막힌 경관을 보여주니 계속해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할미봉을 지나 1km쯤 걸으니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나는 처음부터 이 곳을 예약해 놓았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배낭을 내렸다. 오후 6시. 텐트를 쳐야 할 시간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나무에 기대 잠시 쉬었다. 눈물은 말랐지만 눈물과 함께 감정도 모두 말라버렸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멍하니 장승처럼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 산에 원래부터 있던 돌부리가 된 기분이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3구간

진행 구간 : 벽계쉼터 민박(전북 장수)-영취산-덕운봉 갈림길-북바위-민령-깃대봉-육십령-할미봉-1km이후 비박(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6일 일요일 ~ 7일 월요일

SE-235d5d83-a151-4e47-b14f-29e0ed9a7f5f.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 60 -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주말동안 푹 쉬시고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이전 19화#59. 나이 든 사람의 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