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드는 생각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내게 온 우편물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영상통화로 전환해 제주집을 소개했다. 동백나무와 고양이들과 주인집과 함께 쓰는 마당을 스윽 보여줬다. 현관 열고 들어와 주방과 욕실과 침실 겸 거실 겸 서재로 쓰이는 유일한 방도 소개했다.
하얀 커튼으로 감춰둔 수납공간의 쓸모, 당근밭을 향해 난 창 크기의 적당함에 대해서도 말했다.
재잘재잘 온라인 집들이를 마치고 나서야 핸드폰 너머 남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초췌하다. 쌍꺼풀은 반쯤 풀렸고, 귀 옆 흰머리가 유독 선명하게 눈에 와 박힌다. '나는 매일이 축젠데... 안 됐다, 남편.' 그래서 예의상 물었다.
"반찬 안 필요해요? 필요하면 새벽 배송 보낼게."
쓱 던진 형식적인 말을 남편은 반색하며 덥석 낚아챘다.
"필요해, 완전 필요해."
(냉장고가 그새 텅 비었나?)
"어... 냉장고에 나물들 있는데, 먹었어요?"
"벌~~~써 다 먹고 없지. 반찬 필요해."
'이 사람도 나이가 드나' 싶었다.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은 <혼자서도 잘해요>다. (당연한 거지만) 쮸 아기 때 아이와 단 둘이 집에 있어도 아이 밥 때문에 내게 "언제 들어와?" 같은 전화를 한 적이 없다. 물론, 그런 전화를 한다고 "네, 바로 갈게요." 할 나도 아니지만. 장기 출장을 가거나 장기 여행을 떠날 때도 남편의 끼니를 걱정한 적이 없다. 그런 걱정은 늘 주변 사람들의 몫. 이를 테면 우리 친정 엄마의 몫이었다. 그런 남편이 반찬에 저리 반색하다니. 낯설다.
"알았어요. 주문해서 보낼게. 뭐 먹고 싶어요?"
"계란말이 하고..."
'그 정돈 좀 해 먹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제주에 있고, 제주에선 뭘 해도 웃음 나고 관대하니까. 그래, 까짓 거 계란말이 먹고 싶다는데.
"그리고? 더 없어요?"
"그 뭐지? 계란은 아니고 작은 건데... 간장에 담긴..."
"메추리알 장조림?"
"응. 장조림 하고 또..."
다음은 없다는 듯 남편은 먹고 싶은 반찬 목록을 이어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달걀말이와 장조림을 잇는 무언가를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갈 곳, 볼 것, 먹을 것이 줄줄이라 빨리 집을 나서고 싶은 나는 마음이 급했다.
"알았어요. 접수 완료. 계란말이, 장조림... 그리고 몇 가지 더 골라서 보낼게요."
계란말이. 장조림. 멸치볶음. 홍어무침. 김자반. 어묵볶음. 어라? 미역줄기 볶음이 없네. 그거 제일 좋아하는데. 연근조림은 넣을까 말까? 너무 많나? 3일 간격으로 나눠 배송할까? 국물이 없네, 국물이 없어. 우린 슴슴하게 먹는 편인데... 이건 짜다는 후기가 많으니 패스. 이건 알이 탱글 하지 않다고 하니 보류. 이건 조미료 냄새가 너무 강하다고 하니까... 넣었다 뺏다, 뺏다 도로 넣기를 반복하며 장바구니를 채웠다. 그렇게 남편을 위한 반찬 선물세트를 완성했다.
자라면서 나는 밥밥밥 하는 엄마가 싫었다. 식구들 삼시 세 끼가 인생의 전부인 양, 그것에 웃고 그것에 행복해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절대로 저렇게는 안 할 거야'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어서도 안 먹는다는 아이에게 "한입만 한입만" 하지 않았다. 친정 엄마처럼 접시에 토스트와 우유를 받쳐 들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와 "한 입만 먹자" 얼르고 달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남편 반찬을 고르다 보니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엄마의 "밥밥밥"과 "한 입만"을 먹고 자랐구나. 그래서 건강하구나. 잘 울고 성도 잘 내지만 툭툭 잘 털고 일어나고 자고 나면 금세 잊는 건 모두 밥밥밥과 한 입만 덕분이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점점 나도 엄마를 닮아간다.
"점심 먹었어요? 아직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일단 밥부터 먹어요."
"밥은? 왜 여적 밥을 안 먹어. 우유가 무슨 밥이야. 얼른 밥부터."
"누가 뭐래도 배가 든든해야 뭘 하건 힘이 나서 잘 돼. 밥심이 최고야. 그러니까 밥 잘 챙겨 먹어요."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일로 만난 사람들에게도 나는 밥밥밥 밥부터 라는 이야길 자주 한다. 정작 나는 두 끼정도 굶어야 허기를 느낄 정도로 밥에 무심한 사람이지만, 때 맞춰 먹고 기왕이면 잘 챙겨 먹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립다, 엄마의 밥밥밥과 한 입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