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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Feb 14. 2020

제 꿈은 정년 퇴임입니다만

한 회사에서 11년째, 저는 매일 변화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2010년 1월. 입사했을 때 나의 목표는 우리 회사의 CMO(Chief Marketing Officer)가 되는 것이었다.


그때는 막연히 마케팅이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직무로 보였고, 차근차근 회사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그 분야의 최고가 되겠다는 풋풋한 포부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대기업의 CMO라는 목표가 얼마나 큰 꿈이었는지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CMO가 뭐야. 서른다섯, 과장이 된 나는 임원도 팀장도 파트장도 아니고, 심지어 함께 일하는 후배 사원도 없는 조직 내 (거의) 막내급 직원이다.



어느덧 십 년을 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부터 언젠가 이직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늘 이 회사에 뿌리내리겠다는 충성심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도중에 이 팀장과는 도무지 한 달도 더 같이 일할 수 없겠단 마음에 이곳저곳 이력서를 올리고, 몸이 아프다 거짓말하며 면접을 보러 다닌 적도 있었고, 그러다 최종 면접에 합격한 곳도 있었다 (그래 놓고 마지막에 마음을 돌리는 바람에 여전히 이 곳에 남았다). 물론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떠나는 동료들을 보며 부럽다고 생각한 적도 매우 많았다.



여태껏 이직을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가 나름 규모가 큰 대기업이기 때문이다. 아니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대기업-부심이냐 묻는다면 그런 거 진심 1도 없고 (우리 회사를 떠나 외국계나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동료들이 연봉도 훨씬 많이 받고 잘 나간다), 회사가 크니까 부서도 많고 직무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마케팅으로 서류를 지원했지만 입사는 인사팀으로 했다. 이후에 사업 부서로 이동하여 컨텐츠 사업 기획, 사업 개발 직무를 경험하고, 3년 전 지금의 서비스 기획 업무를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대학교 때 가장 희망했던 마케팅 직무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는데, 의외로 그건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 일을 하다 보니 마케팅보다는 사업 개발과 서비스 기획이 더욱 재미있어 보였던 것이다. 나는 매 번 내가 원하는 팀, 희망하는 직무로 업무를 변경해 왔고, 단 한 번도 지루하거나 '여기서는 더 이상 내가 배울 것이 없다'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나의 경우는 스스로의 강점과 약점을 찾는 일이 너무 어려웠기에, 평생 하고 싶은 직무를 찾는 데 10년이라는 직장 생활이 필요했다.




Career Development에 한 가지 정답이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내가 회사 안에서 거쳐온 모든 길들이 가치 있었다고 느낀다. 사원부터 대리까지는 (8년) 하나의 업계에서 다양한 직무를 두루 거치며 경험을 쌓았다. 과장이 되고나서부터는 서비스 기획이라는 업무를 깊숙이 알아가고 있다. 한 회사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이 '시간'은 나의 역량이라든가 능력이라든가 태도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업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업무 이력을 알고 있다든가 (ex. 6년 전에 변경된 서비스 정책에 관한 의사 결정 배경) 관련 부서의 담당자들의 특성과 장단점, 함께 일하는 노하우들을 자연스럽게 알게되는 건 어쩌면 그동안 일해온 시간만이 줄 수 있는 치트키인 셈이다.



나는 곧 죽어도 무조건 이 회사와 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특별히 별 일이 없는 이상, 늘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하며 이 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 그 새로움의 방향이 현재 업무에서의 확장이 될 수도 있고, 조금 더 깊어지는 걸 수도, 아예 새로운 직무의 시작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배우는 자세로 업무에 일한다면 일이 지루해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올해로서 회사에 입사한 지 11년 차가 되었다. 이직도 퇴직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아직도 이 곳에 남아 있지만, 그간의 시간 동안 커리어 고민에 있어 치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안에서 내 나름대로 매 년 변화를 즐겼고 매 년 헤매고 있다.


특별한 충성심이나 애사심 때문이 아니라, 나는 내가 가장 만족스럽게 일을 하기 위해 이 회사와 오래 같이 하고 싶다. 나의 꿈은 정년 퇴임이고, 이건 아주 평범한 직장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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