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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Aug 06. 2020

오래동안 만만했던 너에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이 주제를 보자마자 딱 한 글자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안돼.
반사적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 글자는 – 그 단어는 피해야 해.


더 유니크하고, 세련되고, 혹은 조금은 괴이해도 좋으니 다른 단어는 없을까. 예컨대 스카이다이빙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긴다든가, 이십 년 째 로드무비를 좋아한다든가, 아무도 모르는 인디밴드를 조용히 덕질하고 있다든가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건 내가 아니다. 아무리 흔하고 뻔하고 혹은 지루해보인다 하더라도 나를 나답게 해주는 건 역시 하나 뿐이다. 그 뻔한 단어에 등을 돌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좋든 싫든 나는 결국에는 책, 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된다.     



책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나에겐 왜 어려웠을까. 대학교 때 한창 사랑이 고파졌을 시점, 솔로 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친구와 3:3 미팅을 갔을 때도 그랬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나는 상대측을 꽤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다. 외모나 목소리나 말투 매너 같은 걸 보고 아, 오늘 이 남자들이랑 놀면 재밌겠다고 초반부터 들떴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친구가 먼저 옆에서 초를 쳤다.


“이 친구는 책을 정말 좋아하는 애에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던 걸로 기억한다. 오늘은 망했구나 – 하고 직감했다. 그때 나는 어렸고 집에서 혼자서 조용히 책 읽는 데에만 익숙했다. 트위터나 블로그, 인스타그램으로 책 리뷰를 올리던 때도 아니었다. 독서는 어디에 티 내지 않는 은밀한 취미 같은 거였다. 그런데 딱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책 좋아하는 애’ 라는 첫인상 꼬리표가 딱 하고 나에게 붙어버린 거다.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 ‘독서’의 연관 검색어는 ‘모범생’, ‘착한 애’, ‘조용한 애’, ‘지루한 애’ 같은 단어들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그런 심심한 애가 되어버렸고, 나와 함께 온 친구들은 여행을 좋아하고 영화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잘 노는 애들이 되었다. 그런, 기분이었다. 자기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모른 채 옆에서 태연하게 웃는 친구가 나는 원망스러웠다.      


그날 미팅이 파하고 나는 애프터를 받지 못했다. 나는 내가 처음부터 ‘문학 소녀’ 이미지로 찍히지 않았다면 다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철도 없고 적당히 찌질한 스물 한 살이었다.     



그 후 십 년도 더 지났어도 여전히 나는 책 읽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남편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실 주말에 남편과 함께 TV로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나는 방 한구석에 혼자 틀어박혀 책 읽는 걸 더 좋아한다.      




사실 책을 읽는다는 건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의 취향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독서 라는 단어에 얼마나 다른 제각각의 열망이 내포되어 있는지를 간과한 채 세상의 모든 ‘책 좋아하는 애’를 한 가지의 성격으로만 묶어둘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자기계발서만 읽는 학교 선배를 한 명 알고 있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사람은 여럿 봤어도 그걸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을 본 적이 몇 없는데 선배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내가 서른 살 넘어 알게 된 언니 한 명은 에세이를 즐겨 읽는데,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선배와 언니에게 MBTI 결과를 물어본다면 둘은 분명 같은 알파벳을 단 한 개도 공유하지 않는 극과극의 결과가 나올 것 같다.     


나는 읽는 동안만이라도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지는 자기계발서도 좋아하고, 어깨를 도닥여주는 듯한 다정한 에세이도 좋아하지만, 역시 나에게 독서는 짜릿하고 피부에 소름이 돋고 입이 쩍 벌어지는 경험으로써 가장 소중하다. 매일 같은 방에 가만히 앉아서 흰 종이에 검정색으로 인쇄된 글자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인데, 나는 자주 심장이 덜컹하고 머리가 쨍할 정도로 놀라운 느낌을 받는다.     


이를테면, 우주는 10차원 공간과 1차원의 시간이 결합된 11차원의 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M-이론을 접할 때: 나는 이런 말도 안되는 말이 인공 지능으로 바둑에서 이세돌을 이기고 핸드폰 카메라로 쉽게 꽃과 나무 이름을 인식하는 현대 세계에서 실제 논의가 되고 있다는 과학 이론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운전 면허를 따려고 도로주행을 할 때 시속 60km가 너무 빠르게 느껴져서 마음 졸였던 기억을 떠올리면 (합격은 했으나 그 후로 실제 운전을 한 적은 없다) 시속 6억7천만 마일이라는 빛의 속도가 감도 잡도 잡히지 않아 얼떨떨하다. 이런 숫자를 과학자들은 어떻게 도출해냈는지 나는 무척 궁금하다. 우주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내가 아는 세계가 뒤집어지는 느낌이 든다.     


우주만큼 스케일이 크지 않아도, 아주아주 일상적인 통찰들로 나의 일상을 뒤흔들어놓은 저자도 있다.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장애가 있다. 죽을 운명이고, 시력이 나쁘며, 무릎이 약하고, 등과 목이 안좋고, 건망증이 있는 등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다수(또는 가장 강력한 집단)가 이러한 장애를 갖고 있을 때 사회는 여기에 맞춰서 적응한다. (...)
정상성이라는 허구는 너무 자주 다음과 같은 점을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계단, 시각 신호 체계, 전화와 같은 제도가 결코 필연적이나 자연적이지 않으며, 이런 제도들이 휠체어를 타거나 시각과 청각 등을 소실한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p556)


이때부터 나는 내게 익숙하지만 당연하지는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BF가 Best Friend말고 Barrier Free의 약자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시 우주로 돌아와서, 요새는 평행 우주 이론도 과학계에서 주목을 받는다고 하던데, 나는 책을 읽음으로써 여러 개의 우주를 마음 내키는대로 넘나드는 기분이 든다. 내 삶은 마포 집과 여의도 회사 밖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사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머그컵에 커피를 따라 마시면서도 빅뱅 이전의 세계를 궁금해 하다가 중세 프랑스의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갑자기 코로나 이후의 경제를 예측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독서는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우주적 스케일의 여행이라 말할 수도 있을테다. 여행이란 단어가 나온 김에 고백하는 건데, 남편과 결혼하고 함께 10박 11일 스페인도 가고 12박 13일 미국 서부도 여행했지만, 역시 내 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결혼 전 친구와 푸켓에 가서 3박 4일 하루종일 바닷가 선베드에 누워 책만 읽고 돌아온 일정이었다.

 


스물 한 살의 나는 책 읽는 것 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건 나를 내가 아닌 어떤 이미지로 꾸며내기 위해 나를 속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책을 빼면 나에게 뭐가 남을까. 나처럼 질문하기 좋아하는 사람, 별 게 다 궁금한 사람, 한 쪽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쪽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 알고 싶은 게 많은 사람, 하루종일 집에 있어도 심심하지 않는 사람의 뿌리에는 결국 책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많이 늙고 몸이 쇠하더라도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할 거란 걱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 혹시 나와 저녁 약속을 잡았는데 당일 취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하더라도 나에게 너무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 고백 아닌 고백 하나. 사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이라는 주제에서 ‘책’이라는 소재를 피하고 싶었던 이유는 책을 좋아하는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문학소녀 라는 이미지를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다고 치부했던 건 십 년도 전의 일이다.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지금은 대놓고 좋아한다. 그러나 책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여전히 있다. 브런치에 책 리뷰를 올릴 때 바로 그런 생각이 드는데, 회사 이야기 남편 이야기는 종종 높은 네다섯 자리 조회수를 찍기도 하는 반면 글에서 책을 다룰 때마다 무슨 공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조회수가 늘 두 자리수에 머물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스물 한 살 미팅 때 애프터를 못 받은 건 세 명 중 나의 인연이 없어서였을 뿐이고, 브런치에서 아직 책을 주제로 쓴 글이 인기글이 되지 못한 건 그만큼 내 실력이 아직 부족했을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책이 너무 좋고 익숙하니까 조금 만만하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잘못이 없다. 미팅에서 만난 남자 세 명 합친 것보다 천만배 더 잘생긴 내 남편은 책을 읽는 나를 사랑한다.


서른 다섯의 나는 조금 더 크게 책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 이 글은 남편이 아닌 책을 위해 헌정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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