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글도 잘 쓸까?
'독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지닌 오랜 신념에 확답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책을 읽는다면 그는 '이미' 작가라는 것.
- 염승숙 소설가의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추천사 중에서
조금 이상한 약국이 있다. 분명 어엿한 약국이고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처방전을 내밀면 약을 처방해준다. 계산대에는 텐텐이나 비타민 캔디 같은 걸 진열하고 온장고에는 쌍화탕을 보관하며 공적 마스크는 소분해서 판매하고 사장님은 흰색 가운을 입고 있다. 그런데 약국에 들어가서 왼쪽으로 돌면 한 쪽 면이 온통 책장이다. 이곳은 책을 판다. 오프라인 독립 책방인데 온라인 서점마냥 10%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팔고, 도서 소득공제도 해주며 재고가 없는 책은 따로 주문을 받아 택배도 보내준다. 그뿐인가, 어느날은 김연수 소설가나 이병률 시인, 요조 작가 임경선 작가 같은 분들을 모시고 북토크를 하고, 또 어느날에는 약사님 (=사장님)이 유튜브나 EBS 생방송 라디오에 출연하기도 한다.
저자 친필 사인본을 판매하는 건 기본,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하면 제주감귤이나 호두 정과 같은 걸 굿즈로 주기도 하고 (한 번은 김치를 굿즈로 주겠다고 인스타 스토리에 예고를 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아 취소되었다고 한다) 빙고 게임 이벤트를 열어 3만원 이상 구매자들에게 숫자를 하나씩 선택하게 하기도 한다. 구매자들이 합심하여 빙고를 만들면 그 빙고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책 한권을 무료로 주겠다고 하여 나는 총 9만원치의 책을 한 번에 사버리기도 했다.
이 이상한, 아니 독특한, 아니 특별한 약사님이자 책방 사장님이 어느 날 제3의 직업을 갖겠다며 인스타그램 계정에 선언을 했다.
자 손님 여러분 저는 이제부터 출판사 사장이 되겠습니다.
- 주제는 '우연', '사랑', '죽음'입니다. 1월 31일까지 원고를 보내주세요. 소설 시 에세이 장르는 어떤 것이든 상관 없습니다. 출간 시 저자는 무조건 블라인드 입니다. 기성 작가님들이 참여하셔도 블라인드이고요.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서점 손님들이 써서 투고한 글들이 2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푸른약국 출판사의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 소설편』, 그리고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 에세이, 시』 편으로. 알라딘과 예스24 온라인 서점에서도 판매를 시작했는데, 심지어 알라딘에서는 '베스트셀러' 딱지까지 붙었다. 소설 편의 추천사는 『세계는 읽을 수 없이 아름다워』의 저자 염승숙 소설가,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의 저자 윤고은 소설가로부터, 에세이/시 편은 『책기둥』, 『준최선의 롱런』의 저자 문보영 시인으로부터 받았다.
두 권 중 먼저 출간된 소설편을 읽고 난 소감은 다음의 세 가지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가지 여덟 가지로도 충분히 쓸 수 있지만 이런 건 세 개로 쓰는 게 유행... 같은 거니까)
1. 책이 두 권으로 나뉜다구요? 소설집만 300페이지가 넘는다구요?
- 처음 독자들의 글로 독립출판물을 낸다고 들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글을 보내게 될 지 궁금했다. 고백하자면 나도 이 기회에 나의 글도 한 편 책에 실어보겠다며 원고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나의 글이 '발행 취소'가 허용되지 않은 인쇄물로 찍혀나온다고 생각하니 막상 조금 겁이 났고, 마감일 당일까지 고민을 하다가 글을 제출하지 않았다. 작가로서보다는 독자로서 모여있는 이 약국(이자 서점)의 손님들은 몇 명이나 글을 냈을까? 책이 출간된 후 확인해 보니 소설에만 16명, 시/에세이에는 총 13명이 작가로 참여했다. 그들의 용기가 나는 몹시 부럽다.
장르는 에세이가 대부분일 것으로 예상했다. 전문 작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글을 쓰고 책을 낸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쓰는 것이 가장 쉽지 않을까? 그러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시와 에세이를 합친 것보다 소설의 편수가 더 많았고, 소설집 하나의 페이지수는 306 페이지였다. 돌이켜보면 나도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쓰기 전에 소설 습작부터 시작한 경우였다. 내 이야기를 그대로 꺼내놓기가 어려워, 허구라는 장치를 빌려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내야 했다. 다들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2. 나는 익명의 작가들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을까?
- 이 소설집의 작가는 모두 본명이 아닌 익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누가 어떤 글을 썼는지는 약국(이자 서점이자 출판사의) 사장님과 작가 본인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몇 명은 본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이 이 소설집에 작가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총 16명 중에 5명은 나도 알고 있는 인친(인스타그램 친구)이자 '북스타그래머'다. 나는 그들이 인스타그램에 책 리뷰를 올릴 때 마다 모든 글을 정독하는 독자였다.
그 중 한 명은 인스타그램을 넘어 브런치에서도 '제이크M' 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그가 브런치에 올린 에세이 12편도 모두 정독한 바 있다. 심지어 또 한명의 참여자는 기성 작가인 조영주 소설가로, 제 12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추리소설 이자 에세이 작가이다. 나는 이 분들의 소설 작품을 읽자마자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결과는? 땡이다 땡. 완전 철저하게 땡땡땡.
어제 나는 제이크M님께 인스타그램 메신저로 "소설 잘 읽었습니다. 딱 보니까 어떤 글이 제이크님껀지 알겠던데요?" 라고 큰 소리쳤다.
고백합니다. 사실 저는 누가 어떤 글을 썼는지 단 한개도 찾지 못했습니다.
3.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설도 잘 쓸까?
- 이번 독립출판 프로젝트에 소설가로서 참여한 16명 중에는 앞서 언급한 기성 소설가도 있었고,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작가도 있었으며, 또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형식의 글을 완성한 작가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하나,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질문의 결론은 감히 나 혼자 내릴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오래 동안 소설 읽기를 좋아했고,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소설 수업도 수강해보았고, 수강생들과 1년 넘게 소설 습작 스터디도 진행해보았지만, 결국 단 한편의 글도 제출하지 못한 나의 관점에서,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의 소설들이 '완성된' 형태로 한 권의 독립출판물에 실려있었다는 사실이 감탄스러웠다. 이 16편의 소설은 형태도 분량도 주제도 성격도 분위기도 느낌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떤 소설은 당장 기존 출판사에서 출간되어도 좋을 만큼 성숙하고도 즐거웠고, 또 어떤 소설은 풋풋하지만 독특하고 동화같은 매력이 있었으며, 어떤 소설은 발상이 무척 기발하고 흥미로웠고, 어떤 소설은 짧으면서도 문장 하나 하나가 굵고 힘이 있어 노트에 필사하고만 싶어졌다.
내가 늘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쓰는 세상. 어느 작은 약국이자 아직 독립하지도 않은 책방 한 곳 덕분에, 내가 바라는 세상과 아주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푸른약국' 이자,'아직 독립 못한 책방', 이자 '푸른약국 출판사'의 인스타그램 계정 : @a_dok_b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