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가 알아야 할
효율적인 거짓말

퇴사 권하는 여자 12

by 호밀밭의 사기꾼

난생 처음 퇴사 이유를 거짓으로 말했다. 사무실 이전으로 너무 멀어서 못다니겠다고.

그렇다. 뻥이다.

나는 이미 지난 4월 편집장 워크샵에 다녀온 직후 폭발했고, 퇴사를 결정했으며, 언제 말하면 좋을지 타이밍을 살피는 중이었다. 귀찮은 상황에 직면하기 싫어 어떤 구라를 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사무실 이전 계획이 발표됐다. 내가 평소에 그토록 싫다고 노래를 부르던 파주였다. 회사가 파주로 이사가면 당장 퇴사할 거라고, 농담처럼 말해왔기 때문에 멀어서 못다니겠다는 말에 누구 하나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퇴사할 때 퇴사 사유를 뭐라고 말해야 할까.

회사가 좆같아서요? 니가 좆같아서요? 물론 대부분 그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상대를 화나게 만들며 퇴사해서 좋을 게 전혀 없다. 더 좋은 이직처를 찾았다고 말할까? 대학원에 간다고 할까? 직종을 바꾸겠다고 할까? 힘들어서 쉬고 싶다고 할까? 건강이 안 좋다고 할까?


어쨌거나 어떤 이유를 말하건 가장 좋은 상황은 상대가 나를 '붙잡지 않는 것'이다. 설득이 시작되면 그것만한 고통도 없다. 퇴사를 결심한 사람을 설득한다고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모르는 상사는 별로 없지만 그들은 일단 퇴사 의사를 밝힌 이를 설득한다. 뭐 이렇든 저렇든 나가겠다는 사람 안 막는다는 자세라면 문제될 게 없다. 좀 서글프긴 하겠지만 고달프진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퇴사자의 업무가 자신에게 전가되는 게 싫어서거나 퇴사자의 미래와 가능성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거나 등등) 퇴사하려는 사람을 붙잡게 되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그러니 퇴사자를 붙잡을 경우에 대비해보자. 전자는 어차피 대비가 필요하지 않으니.


쉽게 놔주지 않을 것 같을 때, 단박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빼도박도 못하는 완전한 이유를 만드는 게 좋다.

건강이 안 좋다고 하면 한두 달 병가를 줄 테니 쉬었다 다시 나오라고 할 수도 있다. 대학원에 갈 거라고 하면 거기 가서 뭘 공부할 거냐, 그거 공부해서 뭐할 거냐, 대학원 졸업하고 결국 다시 재취업할 거 아니냐, 경력만 단절되는데 거길 왜 가냐, 정 공부가 하고 싶으면 야간대학원을 가라고 할 수도 있다. 힘들어서 쉬고 싶다고 하면 직장생활이 원래 힘든 거다, 원래 회사 다니다보면 몇 년 주기로 슬럼프가 온다, 쫌만 더 참고 견디면 할 만해질 것이라는 지극히 퇴사 희망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일반론 따위를 듣게 될 것이다.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고 하면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를 배신하냐고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 현재보다 더 나은, 이직할 회사보다 더 좋은 오퍼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로 꼬시려고 할 것이다. 심하게는 이직하겠다는 회사 욕을 하면서 니가 그곳으로 가는 것이 너의 경력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추접스럽고 저열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직종을 바꾸겠다고 하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업계로 가기엔 너무 늦었다, 새 업계로 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연봉도 낮아질 것이라는 둥의, 마치 상대의 미래를 굉장히 걱정해주는 듯한, 마치 상대가 그런 약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을 한 것이라는 듯이 고나리질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귀찮은 상황에 빠지기 싫다면 상사의 성향과 회사의 상태, 자신의 조건 등을 다각도로 고려하여 퇴사 사유를 만들어두는 게 좋다. 사직서는 그저 '일신상의 이유'라는 간편한 한 줄로 끝나지만, 그 사직서를 제출하기 전에 제일 먼저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퇴사의 변이 당신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가운데 입밖으로 낼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 입밖으로 내야 하는 것과 그래서는 안 되는 것들을 분류하자.

어떤 퇴사 사유를 말했을 때 상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리 시뮬레이션해보자. 가장 좋은 방법은 앞서 퇴사한 사람의 퇴사 과정을 미리 파악해두는 것이다. "대학원 간다고 했더니 니가 무슨 대학원이냐고 존나 비웃었어!!"라는 말을 전 퇴사자에게 들었다면 당신의 상사는 대학원, 전직, 이직 등의 이유는 씨알도 안 먹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니 전략을 바꿔야 한다.


"ㅇㅇㅇ의 이유로 퇴사하겠습니다."

"응.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 얼마나 빠르고 간단한가. 평화로운 퇴사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효율적인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 정 공식적으로 밝힐 이유를 만들지 못했다면 연봉을 40% 이상 올려주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하라. (뭐 미친놈 취급 좀 받겠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선전포고를 받아들이면 땡큐지만 대부분 택도 없는 소리다.


헐. 그렇게는 못해주는데?

그럼 난 퇴사 빠이짜이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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