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펌프의 원리를 파헤쳐보자!

by 짱이아빠


아침에 따뜻한 커피를 담아 온 텀블러가 저녁까지 온기를 유지하는 비결이 뭘까요?

바로 텀블러의 벽과 벽 사이, 텅 비어있는 '진공' 공간 덕분이에요. 열을 전달해 줄 공기 분자가 없으니 온기가 그대로 보존되는 거죠.


이처럼 '비워냄'으로써 특별한 환경을 만드는 진공 기술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진공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한 톨, 공기 분자 하나까지도 용납하지 않는 극한의 상태로 만들면 어떨까요?


바로 그 상상 속 공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만드는 반도체 공장에서 실제로 구현되고 있답니다! 반도체라는 초정밀 예술품은 아주 작은 불순물 하나만으로도 망가질 수 있어서, 우주보다 더 깨끗한 '완벽한 없음(無)'의 상태가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이 완벽한 진공을 만드는 진공 펌프 삼총사를 만나보시죠.




러핑 펌프 (Roughing Pump / 저 진공 펌프)


러핑 펌프는 진공 챔버의 진공을 잡는 첫 번째 단계를 담당하는 펌프예요.

우리가 사는 대기압(760 Torr) 상태에서부터 기체 분자들을 거칠게(Rough) 홱홱 퍼내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러핑 펌프' 또는 '저 진공 펌프'라고 불립니다.


동작 원리


러핑 펌프는 '기체 분자를 가둬서(포획), 압축한 뒤, 밖으로 뻥! 차버리는' 원리로 동작해요.

마치 치약을 아래에서부터 쭉 짜서 밀어내는 것과 비슷하죠.


반도체 공정에서는 오일 오염을 막기 위해 주로 건식 펌프(Dry Pump)를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스크류(Screw) 타입의 동작 원리는 다음과 같아요.


흡입: 펌프 내부에는 암수 나사처럼 생긴 한 쌍의 스크류(회전자)가 서로 맞물려 있어요. 스크류가 회전하면서 챔버 쪽(흡입구)에 연결된 공간이 열리고, 기체 분자들이 그 공간으로 들어옵니다.


이송 및 압축: 스크류가 계속 회전하면, 기체 분자들이 갇힌 공간이 점점 출구 쪽으로 이동해요. 이동하면서 공간의 부피는 점점 좁아지게 되고, 기체 분자들은 자연스럽게 압축됩니다. 쥐어짜는 거죠!


배기: 압축된 기체 덩어리는 최종적으로 배기구(출구)를 통해 펌프 밖(대기)으로 방출됩니다.


반복: 이 과정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반복되면서 챔버 안의 기체 분자들을 지속적으로 밖으로 퍼내게 됩니다.


Roughing3.png?type=w773 < Roughing pump>


Point! : 러핑 펌프는 대기압의 많은 기체 분자를 힘으로 밀어낼 수 있지만, 아주 희박한 상태의 기체 분자까지 제거하진 못해요. 그래서 고진공 펌프(터보, 크라이오 펌프)가 원활하게 동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지원군' 역할을 한답니다. 고진공 펌프의 배기구를 러핑 펌프에 연결해서 고진공 펌프가 퍼낸 기체를 최종적으로 대기 밖으로 버려주는 '뒷처리 담당(Backing Pump)' 역할도 수행해요.


대표적인 제조사


에드워드 (Edwards Vacuum): 영국에 본사를 둔 진공 기술의 선두주자 중 하나로, 특히 반도체용 건식 펌프 분야에서 매우 높은 점유율을 자랑합니다.


파이퍼 베큠 (Pfeiffer Vacuum): 독일에 본사를 둔 1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진공 기술의 명가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러핑 펌프 라인업을 갖추고 있습니다.




터보 분자 펌프 (Turbo Molecular Pump / 고진공 펌프)


터보 펌프(TMP)는 러핑 펌프가 만들어 놓은 저 진공 상태에서부터 초고진공 영역까지 도달하게 해주는 두 번째 단계의 주력 선수예요. 러핑 펌프처럼 기체를 가두는 방식이 아니라, '기체 분자를 야구방망이로 후려쳐서 아래로 내려보내는' 원리로 동작해요.


동작 원리


구조: 펌프 내부에는 여러 층의 얇은 날개(Blade)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요. 비행기 제트 엔진처럼 생긴 이 날개들은 고정된 날개(Stator)와 매우 빠르게 회전하는 날개(Rotor)가 번갈아 가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로터는 무려 분당 수만 번(20,000 ~ 90,000 RPM)이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전해요.


분자 타격: 챔버에서 들어온 기체 분자가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로터 날개에 '탁!'하고 부딪힙니다.


운동량 전달: 날개에 맞은 기체 분자는 아래쪽(배기구 방향)으로 향하는 힘(운동량)을 얻게 되어 아래로 튕겨져 내려갑니다.


연속적인 전달: 아래로 내려간 분자는 다음 층에 있는 고정된 스테이터 날개에 부딪혀 방향이 교정되고, 곧바로 다음 층의 회전하는 로터 날개에 또 맞게 됩니다. 이 과정이 수십 개의 층을 거치며 반복되면서, 기체 분자들은 마치 핀볼 게임의 공처럼 아래로, 아래로 계속 전달됩니다.


배출: 펌프 맨 아래쪽까지 쫓겨 내려온 기체 분자들은 그곳에 연결된 러핑 펌프에 의해 최종적으로 펌프 밖으로 배출됩니다.


TurboPump2.jpg?type=w773 <Turbo molecular pump 내부>


Point! : 터보 펌프는 기체 분자가 희박한 고진공 상태에서 효과적이에요. 분자 하나하나를 '때려서' 보내는 원리이기 때문이죠. 반대로 대기압처럼 기체 분자가 너무 많으면 제대로 때릴 수 없을뿐더러, 고속으로 회전하는 날개에 엄청난 부하가 걸리기 때문에 반드시 러핑 펌프로 어느 정도 진공을 잡은 후에 작동시켜야 합니다.


대표적인 제조사


파이퍼 베큠 (Pfeiffer Vacuum): 터보 분자 펌프를 최초로 발명한 회사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과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마즈 (Shimadzu): 일본의 정밀기기 제조사로, 고성능과 안정성을 갖춘 터보 분자 펌프를 생산하여 전 세계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널리 사용됩니다.




크라이오 펌프 (Cryo Pump / 초고진공 펌프)


크라이오 펌프는 터보 펌프와 마찬가지로 초고진공을 만드는 펌프지만, 원리가 완전히 달라요. 기체 분자를 밖으로 퍼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차가운 벽에 기체 분자를 얼려 붙여서(응축) 가둬버리는' 원리를 사용해요.


동작 원리


극저온 환경: 펌프 내부에는 액체 헬륨 냉동기에 의해 극저온(영하 260℃, 10~20K)으로 냉각되는 여러 단계의 차가운 금속판(Cryo-panel)이 있습니다.


1단계 응축: 챔버에서 들어온 기체 분자 중 수증기(H2O)나 이산화탄소(CO2)처럼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얼어붙는 분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차가운 바깥쪽 1단 패널(약 77K)에 먼저 부딪혀 얼어붙습니다.


2단계 응축: 1단 패널을 통과한 질소(N2), 산소(O2), 아르곤(Ar) 같은 기체들은 훨씬 더 차가운 안쪽 2단 패널(약 15K)에 부딪혀 얼어붙어 벽에 달라붙게 됩니다.


흡착(Adsorption): 하지만 수소(H2), 헬륨(He), 네온(Ne)처럼 아무리 온도를 낮춰도 잘 얼지 않는 가벼운 기체들이 있어요. 이런 기체들을 잡기 위해 가장 차가운 2단 패널 안쪽에는 활성탄(Activated Charcoal)이 코팅되어 있습니다. 활성탄의 미세한 구멍들이 이 가벼운 기체 분자들을 물리적으로 붙잡아 버립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요!)


Point! : 크라이오 펌프는 기체를 '가두는' 방식이라 내부에 잡힌 기체들이 포화 상태가 되면 성능이 떨어져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펌프의 온도를 높여 얼어붙었던 기체들을 다시 날려버리고(방출), 이 기체들을 러핑 펌프로 빼내주는 재생(Regeneration)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수분 제거 능력이 매우 뛰어나고, 오일이 전혀 없어 아주 깨끗한 초고진공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ED%81%AC%EB%9D%BC%EC%9D%B4%EC%98%A4.jpg?type=w773 <Cryo pump>


대표적인 제조사


브룩스 오토메이션 (Brooks Automation, CTI-Cryogenics): CTI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며, 크라이오 펌프 시장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점유율을 가진 회사입니다.


스미토모 중공업 (Sumitomo Heavy Industries, SHI): 일본의 대표적인 산업 기계 제조사로, SHI의 Cryogenics 사업부는 고신뢰성의 크라이오 펌프를 개발하여 브룩스와 함께 시장을 양분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완벽을 빚어내는 진공 펌프들의 이야기, 흥미로우셨나요?

이제 스마트폰을 볼 때면, 그 작은 칩 속에 담긴 극한의 기술과 펌프들의 노고를 떠올리게 될 거예요.

우리의 첨단 시대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위대한 기술들이 모여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