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and NZ (8)
중고물품 판매점을 시내에서 발견했다. 세상 모든 중고물품들이 마치 새것인 양 주인을 기다렸다. 가게 구석진 곳에 깨끗한 손바닥 크기의 티브이를 발견하고 며칠 밤 고민했다. 100달러, 8만 원이네, 저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연히 홈스테이에 티브이가 있지만 가족 8명이 채널을 돌리니 내 차례가 오지 않는다. 결심했어! 비싸지만 매주 주말에 하릴없이 이렇게 돌아만 다니니 구입하도록 하자. 원래 티브이를 좋아하기도 하니까 꼭 필요한 물품이야. 티브이를 가방에 넣고 자전거로 돌아오는데, 어찌나 신이 나던지 집까지 30분이 걸리던 시간을 25분으로 단축했다. 뉴질랜드는 티브이 채널이 모두 3개였다. 채널 1,2,3. 아주 잘 나왔다. 뭐라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선명하게 잘 나왔다.
주말 아침에는 어린이 만화, 주말 저녁에는 뉴질랜드 장수 드라마가 방영했다(우리나라 전원일기 같은 느낌). 평일 저녁 5시엔 '심슨 가족'이 방영했다. 꽤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심슨가족을 보게 되면 그 시절 추억이 생각난다. 창밖의 햇살과 고양이, 잔디를 깎던 홈스테이 아저씨.. 그리고 바트 심슨. 누구에게나 추억의 물건이 존재하지만, 심슨가족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추억을 불러온다.
"The Simpsons"
뉴질랜드는 영어를 쓰기 때문에 주로 미국 드라마, 영화가 티브이에서 방영된다. 그중에서 매일 저녁 5시 심슨가족을 보기 위해 귀가를 서둘렀다. 사고뭉치 '바트'의 행동을 보면서 대리 만족했다. 여전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어학연수생이 '바트'의 자유로운 행동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그날도 학원에서 돌아와 심슨가족을 보던 도중, 갑자기! '호머'(심슨가족의 아버지)가 말하는 게 들렸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영어 단어가 끊겨서 들렸다. '웅얼웅얼'하는 방식으로 들리던 영어가 단어 하나하나로 끊겨서 들리기 시작했다. 뿅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티브이를 보면서 받아 적어 보았다. 무슨 뜻 인지는 모르지만 받아 적기가 가능했다. 뉴질랜드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들리다니, 홈스테이에서 저녁 먹다가 깜짝 놀랐다. 땡큐 호머!
"어. 어 들... 들린다!"
귀가 뚫렸다. 뭘 해서 뚫렸는지 모르지만, 그냥 들리기 시작했다. 영어가 들리는 게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빨리 영어학원에 가고 싶었다.
다음날 기대에 부풀어 일찍 영어학원에 갔다. 커피 마시는 척하며 유심히 다른 사람들이 영어로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안 들렸다. 음.. 착각이었나. 그런데 학원 선생님들이 하는 말들은 들렸다. 귀가 뚫린 지 얼마 안 되어서 완벽하지 않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발음이 부정확하면 잘 못 알아 들었다. 여러 가지 발음들을 겪어보지 못해서 그렇다 했다. 한국말도 치아가 빠져 바람이 새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잘 못 알아듣는다. 같은 이치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의 영어는 각 출신 국가별로 따로 듣기 연습을 해야 한다. 영어는 전 세계 공용어이므로 이 모든 특징들을 연습해야 한다. 그중 일본 아저씨의 발음이 가장 어려웠다. 심지어 일본어로 뭘 물어보는 줄 알고,
"저 일본어 못해요."라고 대답해버렸다. 서로 민망했다.
이렇게 귀가 뚫리고 영어실력이 급상승했다. 바닥에서 시작하니 뭘 해도 급상승이다. 바싹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영어를 빨아들였다. 자신감도 생겨 다른 학생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일본, 중국, 네덜란드, 태국 등등 그 사람들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매일 학원 출석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식 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난 아직 학생이니 학원에만 다닐 수 없다. 학교에 가야 한다. 이번 입학 시즌을 놓치면 다음 한 해 동안 또 학원만 다녀야 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화내시겠지.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해 인터뷰 약속을 잡아야 하며, 학교 입학처장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입학 시즌 시작.